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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일행은 모두 유 회장을 만나러 가야 했다. 저택이라고 불릴 만한 크기에 칼같이 관리된 조경은 이 집이 얼마나 귀한 집인지 보여 주었다. 성벽 같은 담으로 둘러싸여 쉽게 발 디딜 수 없는 곳. 유 회장의 가족들과 검증된 사람만이 오가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철저한 보안을 지켰다.
대문에서부터 마당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앞에 선 재이에게 권 팀장이 말했다.
“올라가시죠.”
“…….”
재이가 마른침을 삼키고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갔다.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던 유 회장이었다. 해준이 노력했지만 매번 눈치 보고 소외되어야 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유 회장이 자신을 집으로 불렀다. 재이는 떨리는 마음을 품고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녀의 앞에 선 해준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앞서 걸었다. 칼에 찔려 봉합한 부위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힘들 텐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가 놀라웠다. 재이가 그의 넓은 어깨와 등을 바라보며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현관에서 직원들이 재이와 해준 그리고 비서 실장과 권 팀장을 맞이했다. 곧이어 조모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등장했다.
“해준아. 우리 장남.”
“잘 계셨어요.”
“그럼. 에구 잘생긴 얼굴이 많이 상했다.”
해준이 대답 대신 설핏 웃고서 뒤돌아 말했다.
“나랑 재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해준의 말에 조모가 조금 긴장된 얼굴로 말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해준은 재이에게 별다른 말 없이 눈을 마주치더니 먼저 서재로 앞장섰다.
그쯤에서 재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성인이 되어 스스로 돈벌이를 할 만큼 커도 그녀에게 유 회장은 여전히 어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녀가 숨을 참고 서재로 들어갔을 때, 의자에 앉아 있는 유 회장을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녕하세요.”
쥐어짜듯 어렵게 꺼낸 인사였지만 들릴락 말락 하는 정도였다.
“왔구나. 앉아라.”
유 회장은 둘을 보고 덤덤하게 맞이했지만 눈빛은 날카롭고 차갑기 짝이 없었다. 해준이 짤막하게 인사하며 대꾸했다.
“예. 오랜만에 뵙네요.”
재이와 해준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유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재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재이는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듯 답답했다. 유 회장은 말없이 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노려보다 느릿하게 물었다.
“소식 들었다. 윤재랑 몸싸움을 했다고.”
“네. 그렇게 됐습니다.”
둘의 대화에 재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 회장은 해준이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분명 그가 직원들과 병원 측에 입단속을 시켰을 테지. 심문 같은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미국에서 못 찾고 귀국했고.”
“네. 어디서든 살았던 놈 아닙니까. 신원 파악하라고 이야기해 놨습니다.”
유 회장은 마땅찮은 얼굴로 혀를 찼다. 재이는 이 모든 게 왠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아 죄스러운 기분에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이쯤 하고 출근해라. 새 명함 준비해 놨다.”
“알겠습니다.”
유 회장은 탐탁지 않은 어투로 해준에게 말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쉽게 대답했다. 새 명함이라니. 둘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재이는 궁금했지만 침묵을 지켰다.
그때 질문의 화살이 재이에게 향했다.
“넌 어쩔 셈이냐?”
“……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냔 말이다.”
순간 당황한 재이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평소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유 회장이 자신에게 말을 걸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이런 걸 궁금해할 줄도 몰랐다.
“재이는 일단 제가.”
재이가 입을 벙긋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자 해준이 대신 말하려던 참이었다. 유 회장이 그의 말을 잘랐다.
“너 나이가 몇인데 대답 한마디도 못 해?”
“회장님.”
“……다시 일할 예정입니다.”
재이가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해준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 회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쓴소리가 나왔다.
“너는 말이야. 차라리 세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집에서 있지, 왜 소란을 키워.”
재이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회장님께 부끄럽지만 오빠, 아니 본부장님이 대학까지 졸업시키느라 많이 고생했습니다. 항상 고맙고 미안했구요. 이제 제가 일해서 은혜를 갚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극도의 긴장으로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며 볼품없었지만, 재이는 기어코 여태 하고 싶었던 말을 갈무리했다.
“지켜봐 주시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열심히 해서…… 제가 꼭 힘이 되겠습니다.”
* * *
해준은 재이를 데리고 특급 호텔로 체크인했다. 집은 여전히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것을 염려한 선택이었다. 해준은 직접 운전을 하여 이동했다. 재이는 아무거도 모르는 채로 따라가다 주차장에 차를 멈추고서야 그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더워요? 아니.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요?”
한겨울에 더울 리가. 재이는 무심결에 물었다 곧바로 그가 통증 때문에 앓고 있음을 깨달았다.
“많이 아파요? 119 부를까요?”
“괜찮아. 진통제 먹으면 돼.”
“의사는.”
“괜찮아. 약 먹고 푹 자고 나면 나을 거야.”
그의 말에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재이는 권 팀장을 통해 왕진이라도 부탁하려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울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스위트룸에 들어갔다. 해가 짧은 겨울에 일찍이 찾아온 화려한 야경도 둘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집이 아닌 호텔로 귀가하자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실감도 덜했다.
재이는 룸에 들어가자마자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짐을 뒤져 처방받은 약을 그에게 건넸다. 해준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으나 재이의 마음이 훨씬 급했다.
“얼른 먹어요. 룸서비스도 시켜 놓을게요.”
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증이 점점 밀려오는 듯 보였다. 재이는 안절부절못하며 해준의 주위를 맴돌았다.
“괜찮으니까 티비 보고 있어. 씻고 나올게.”
해준이 옅게 웃으며 재이를 안심시켰다. 재이는 괜스레 유난처럼 보일까 알겠다고 대답하며 한발 물러났다. 해준이 조금 떨어진 욕실로 들어갔다. 재이는 억지로 티비를 틀고 채널을 돌렸지만 영 집중되지 않았다.
마침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물소리라거나 사람의 인기척이 없었다. 조금 이상하게 여긴 재이가 고민 끝에 욕실로 가서 노크하며 물었다.
똑똑
“괜찮아요?”
한 박자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응. 걱정 마.”
“……정말요?”
평소와 다른 모습이 꺼림칙한데 곧이곧대로 믿길 리가. 재이가 미심쩍게 묻자 해준이 설명했다.
“드레싱 중이라 오래 걸리는 거니까. 가서 쉬고 있어.”
순간 재이는 울컥 솟는 화를 삭여야 했다. 왜 아픈 몸으로 도와달라는 소리 한마디를 못 하는 건지. 자신이 그렇게 못 미덥고 아이 같은 걸까. 물론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런 순간까지 혼자 감당하려는 그가 미련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왜 사람이 있는데 혼자 해요. 들어갈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해준은 겨우 샤워 가운과 속옷만 걸친 채 욕조에 걸터앉아 있었다. 바닥과 세면대에는 약물이 묻은 붉은 솜이 떨어져 있었다. 해준이 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보기 흉해. 쉬고 있어.”
약을 먹은 후라 막 도착했을 때보단 조금 나은 안색이었지만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는 듯 보였다. 재이는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서둘러 손을 씻었다.
“말 좀 들어요. 맨날 본인 말이 맞대.”
재이의 불친절한 말에 해준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여태 해준을 애처럼 다루며 잔소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재이가 도리어 답답해하며 해준을 챙겼다.
“별로 흉하지도 않은데.”
재이는 여전히 화가 남았는지 투덜거리며 조심스럽게 상처를 소독했다. 혹시라도 잘못 누를까 싶어 그의 발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심히 바라보며 섬세하게 움직였다. 그런 재이를 내려다보던 해준이 중얼거렸다.
“……내가 힘들어서 그래. 내가.”
그의 말에 재이가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았다. 최대한 손에 힘을 빼고 한 건데도 많이 고통스러웠을까. 안절부절못하며 묻자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많이 아파요?”
“아니. 참기 힘들어.”
순간 재이는 생각이 멈췄다.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고 재이는 그의 대답을 곱씹다 되물었다.
“……제가 쓰레기라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럼 나는 쓰레기통쯤 되겠군.”
그런 말을 하고도 덤덤하게 대답하는 것은 일종의 뻔뻔함 아닐까. 부인하지 않는 모습에 재이가 더욱 당황하여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조심해. 닿으니까.”
해준이 태연하게 말했지만 ‘조심하라는 것’은 어느새 잔뜩 화가 나 버린 해준이었다. 재이는 순식간에 얼굴에 불이 붙은 듯 벌겋게 물들었다. 재이의 목덜미까지 색이 변한 걸 보며 해준은 자연스레 달아오른 재이의 흰 피부가 떠올랐다. 재이가 항의하듯 어렵게 말을 꺼냈다.
“괜히 놀리지 마세요.”
“괜히 하는 말이었다면 이러지도 않았어.”
해준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점점 존재가 두드러지는 것을 느끼며 재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얼른 마무리할게요.”
“지금이라도 나가. 내가 마무리하면 돼.”
“고집부리지 마세요.”
“고집은 네가 부리고 있어. 참는 게 더 고역이다.”
그와 완전한 하나가 되기 전까지 이런 말을 할 줄 안다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뉘앙스만 남기는 은근한 음담패설에 입이 말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 상태로 그런 말을 하다니. 간단한 동작 몇 번이면 되는 상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몹시 자극적이었다. 그가 무심한 듯 툭툭 던진 몇 마디에 재이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넌 아무거도 몰라.”
그가 손을 뻗어 재이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정확히 그 지점이 아주 뜨겁게 느껴졌다. 재이가 달뜬 숨을 억지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