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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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재이를 차에 두고 윤재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재의 상태가 전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재이는 걱정이 되었지만 별일 없을 거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재이는 운전석에 앉은 권 팀장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오네요.”

창밖을 보자 눈이 부슬부슬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듯했다. 해준과 함께 보냈던 미국에서의 숱한 겨울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재이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올까요.”

해준과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재이가 넋을 빼고 창밖을 볼 때쯤, 윤재가 집 안에서 뛰쳐나왔다. 혼비백산한 채로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어…….”

윤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네를 뛰쳐나갔다. 재이의 시선이 그를 좇아갔지만 빠르게 멀어졌다.

“무슨 문제라도…….”

둘이 싸우기라도 할 걸까.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권 팀장과 비서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권 팀장은 차에서 내려 윤재를 불렀다.

“윤재 씨!”

하지만 윤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더욱 빠르게 뛰었다. 끝끝내 돌아보지 않자 권 팀장이 재이에게 말했다.

“차로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겠어요?”

“아, 네.”

재이는 엉겁결에 외투를 고쳐 입고 차에서 내렸다. 차는 서둘러 윤재가 사라진 쪽으로 출발했다. 재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해준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아저….”

재이가 반색하며 그를 불렀지만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준의 니트가 피로 흥건했기 때문이다. 재이가 그 자리에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아. 놀라지 마.”

“아니, 이거 피 아니에요?”

“많이 안 나. 아무거도 아니야.”

해준이 연신 재이를 안심시켰지만 재이는 놀란 마음에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뭐가 아무거도 아닌데요……!”

권 팀장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휴대폰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재이는 멋대로 해준의 코트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괜찮아. 심각한 거 아니야.”

“아니, 피가 이렇게 나는데 왜 심각한 게 아니에요!”

자신도 모르게 답답하고 놀란 마음에 소리쳤다. 해준이 쓰게 웃었다. 두꺼운 니트가 피로 흥건해질 정도였지만 아프지도 않은지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태도였다. 뒤늦게 후회가 됐다. 혼자 들여보내질 말걸. 아니면 가지 말라고 말릴걸. 윤재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왜 보냈을까.

재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권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가 칼에 찔린 거 같아요! 와 주세요. 빨리요!”

-예? 칼이요?

“빨리요. 빨리요.”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권 팀장 역시 몹시 놀란 듯 전화상으로 바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감당 못할 짓을 벌였다. 해준을 찔렀을 때야 아차 싶은 윤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칼자루를 잡은 손을 놓고 벌벌 떨자 해준은 직접 칼자루를 쥐어 배에 꽂힌 걸 뽑아냈다.

“허억.”

윤재가 끔찍한 광경에 숨을 들이마셨다. 해준의 옷과 손에 검붉은 피가 선명했다.

“쓰읍…….”

정작 칼에 찔린 해준은 공기를 쓰게 마셨을 뿐, 초연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가 윤재를 빤히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뒷감당할 자신 있나 보지.”

“…….”

그 모습을 보자 윤재의 두려움과 후회가 극에 달했다. 피를 쏟아도 눈 깜짝하지 않는 이런 놈을 찔렀다. 그가 비인간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해준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자신에게 분명 복수할 것이다.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고, 언론 보도를 터트린 것처럼 사회적으로 매장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도망쳐야 했다. 윤재는 뒷일을 내팽개치고 가능한 빨리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다 못해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멈추고 싶었으나 해준과 그의 일행들이 자신을 쫓아올 거 같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뛰다 못해 걷고, 걷다 못해 기어가다시피 할 때야 멈췄다.

“허억. 허억.”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더 멀리 가고 싶었지만 이게 한계였다. 주머니를 뒤지니 재이의 것을 포함한 휴대폰이 울렸다. 윤재는 개의치 않고 모두 무시하며 걸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조금 더 가자 멀찌감치 마트가 보였다. 그는 비척비척 걸어가 간단한 음료를 사고, 현찰을 인출했다. 자신의 것을 제외한 휴대전화는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뒤를 돌아보고, 주위를 의식했지만 누가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공원 벤치에 주저앉은 윤재는 멍하게 넋을 놓고 있었다.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형을 찌르고 도망쳤다. 이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생각을 포기하자 모든 게 쉬워졌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여자에게 전화했다. 여자는 처음에는 받지 않았으나 다시 한번 걸자 전화가 끊길 때쯤 받았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윤재는 할 말을 떠올리다 그냥 무작정 생각나는 말을 뱉었다.

“나 미국이에요.”

-거기까지 갔는데 왜 전화했니.

“마지막으로 전화했으니까 끊지 마요.”

-…….

여자는 전처럼 그가 자신을 포기 못 하고 추근거릴 거라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여자를 영영 끊어 낼 용기가 생긴 게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윤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잘 먹고 잘 살아요. 좆같은 놈 또 만나지 말고. 아줌마 남자 보는 눈 꽝이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독수공방 꼬부랑 할머니가 되라고.”

-유윤재.

“됐어요. 끊어요.”

윤재는 말을 하는 와중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오르는 느낌에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긴 기다림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전화 한 통으로 마무리되었다. 기분이 몹시 싱숭생숭했다.

“……하하.”

헛웃음이 났다.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없어진 그는 거리의 미아가 된 듯 막막했다. 회의감이 몰려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생각하던 윤재는 그만두기로 했다. 후회가 아무 의미도 없을 때까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휴대폰에서는 대원과 가족들의 전화가 드문드문 울렸지만 그는 휴대폰을 꺼 버렸다. 한동안 한국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그는 천천히 바다에 가라앉듯 자취를 감추었다.

* * *

해준은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도 덤덤히 굴었다. 오히려 난리가 난 건 권 팀장과 비서 실장이었다. 해준과 재이를 차에 태운 권 팀장은 과속을 감수하며 급박한 운전을 했다. 재이는 옆에서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해준을 만지지도, 내버려 두지도 못한 채 쩔쩔매야 했다.

더 이상의 언론 보도를 막기 위해 한인 의사를 찾아갔다. 급하게 진행되어야 했기에 마취도 하지 못한 채 비밀스러운 수술이 진행되었고 재이는 수술실 밖에서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수술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봉합 잘 끝났고, 회복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직원 분들을 찾으시는데요.”

의사의 말에 권 팀장과 비서 실장이 해준이 있는 회복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해준과 한국에 연락한 후, 상의를 끝내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두 남자는 여전히 심란한 표정이었다. 재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유윤재는요?”

권 팀장이 비서 실장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연락이 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통화 기록은 남았다고 합니다. 어디 가서 자살하고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해준을 찔렀다고 무작정 미워하기가 힘들었다. 그간 윤재와 함께 일하며 인간적인 정이 안 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으니까. 언뜻 느껴지던 해준에 대한 자격지심을 고려하면 자신이 모르는 둘 사이에 사정이 있었을 거라 추측됐다.

“아저씨는…… 좀 괜찮대요?”

“일단 수액 맞고 잠시 눈 붙이고 계십니다. 깊게 찔린 건 아니라고 하네요.”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 실장이 덧붙였다.

“회복되자마자 한국으로 간다고 하십니다. 회장님께서도 전용기로 오시라고 하십니다.”

“회장님이요?”

재이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비서 실장이 설명하려 할 때쯤 회복실에서 해준이 느릿하게 걸어왔다.

“괜찮으니까 바로 출발하지.”

모두 놀라 기겁을 하며 일어났다.

“괜찮아요?”

“진통제 들어갔어. 천천히 움직이면 괜찮아.”

권 팀장과 비서 실장이 혀를 내둘렀다. 그의 집념은 보통의 수준이 아니었다. 저런 정신으로 하루에 20시간을 일해 왔던 거겠지. 재이도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해준의 말처럼 일행은 전용기를 타고 끔찍한 미국을 떠났다. 대원 미국 지사에서 상주하는 전문의가 비행에 따라붙었다. 해준은 진통제가 투여되는 내내 태블릿 피시를 보며 간단한 업무를 보았다.

재이는 비행하는 동안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걱정을 억눌러야 했다. 유 회장이 해준뿐 아니라 자신을 함께 불러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자신을 자처해서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회장의 저택에는 발 한번 디딘 적이 없었다.

“걱정되는 거 있어?”

해준이 태블릿을 터치하며 물었다. 아픈 채로 일하는 와중에 재이의 안색을 본 듯했다. 재이는 아니라고 하려다 그를 속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기에 순순히 실토했다.

“……회장님께서 무슨 말을 하실까 싶어서요.”

“그냥 흘려들어.”

추상적인 위안이 아니라, 해준은 100퍼센트 진심이었다. 재이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그래요.”

그게 쉬웠으면 여태 속 편하게 살았겠지. 해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떡하긴. 그냥 무시해. 영감 말이 무슨 상관이야. 내 마음대로 할 건데.”

평소와 달리 다소 자극적인 그의 말에 권 팀장과 비서 실장이 둘을 힐끔거렸다. 자신을 안심시키려 한 의도였겠지만 재이는 그제야 조금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 안 된다 싶으면 네덜란드 가자.”

“…….”

재이는 한때 해외로 도피하자며 울며불며 애원했던 것을 그가 여전히 기억하는 것에 머쓱했다. 해준은 직원들에게도 귀띔했다.

“비서 실장님도 그렇게 알아두세요. 이제 나도 피곤해서 노친네 앙탈 못 받아 주니까.”

“아,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재 신원 파악해서 보고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준의 말에 비서 실장이 엉거주춤 대답했다. 확실히 해준은 전과 달리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느낀 듯했다.

해준을 제외한 모두 그와 유 회장의 신경전을 걱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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