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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재이를 감싸 안고 밖에 세워 둔 검은 SUV 뒷좌석에 재이를 태웠다. 쌀쌀한 날씨에 재이가 떨자 미리 챙겨 온 담요를 꺼내 덮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가 재이의 볼을 감싸 쥐고 안심시켰다. 재이는 너무 어리광 부리지 않으려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릴 수 있겠어?”

재이는 그와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욕심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죠.”

해준은 재이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새삼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근사하게 느껴졌다. 보기만 해도 위로가 될 만큼 준수한 외모였다. 이런 남자가 자신을 찾으러 바다 건너 여기까지 왔다. 재이에게 중요한 건 그의 마음이자 둘의 결속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해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차 안에서 그의 동선을 따라 재이의 고개가 따라갔다. 그때였다.

“……재이 씨.”

“엄마야!”

조수석에서 홀연히 몸을 숙여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다소 애틋한 시간을 보냈던 재이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좀 놀라셨죠……?”

뒤이어 운전석에 있던 권 팀장도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와중에 한쪽 팔이 수갑에 채워진 채로 차량에 묶인 비서 실장을 보며 재이가 놀라 물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상당히 금방 뵙네요.”

비서 실장은 몹시 머쓱한 표정으로 난감하게 대답했다. 하루 전까지 보이던 의기양양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저는 그냥…… 뭐. 잡혀 있죠.”

“…….”

그의 말대로 누가 봐도 강제로 붙잡혀 있는 꼬락서니였다. 권 팀장이 어색하게 웃을 뿐 묵비권을 고수하는 걸 보아 해준의 짓이었다. 재이가 조금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고의적인 사고를 내어 비서 실장을 잡은 해준은 곧장 자신의 차로 태웠다. 바짝 붙어 친히 자신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타세요.”

말이 ‘타세요.’지 어투는 ‘타.’에 지나지 않았으나 비서 실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유 회장의 심복이라 하더라도 유일한 후계자이자 아끼는 손자의 명령을 거스르긴 어려웠다. 일단 타고, 여차하면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 유 회장에게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팔 주시고.”

해준은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며 말했다. 비서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죄송하지만 이게… 제가 아는 그겁니까?”

비서 실장이 버벅이며 말했다. 헛것을 보았다 싶어 다시 봐도 소위 말해 은팔찌라고 불리는 수갑이었다. 사고를 내지 않나, 이런 걸 들이대지 않나 해준의 거침없는 행동에 연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 정확하게 그겁니다.”

사고까지 낸 해준은 이 모든 게 남의 일인 듯 심드렁하게 말하며 비서 실장의 팔을 가져와 내부 손잡이에 수갑을 채웠다.

해준은 직접 운전대를 잡아 도로 공항으로 직행했다. 회사 전용기를 띄워 비서 실장과 함께 올라탔다. 권 팀장이 그 뒤를 따랐다.

해준은 전용기에 여전히 수갑을 찬 비서 실장을 앉혀 두고 그 맞은편에 서서 물었다.

“재이랑 같이 미국 출국했던데. 어디에 처박았어요.”

“본부장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래도 비서 실장에게도 체면과 직업 윤리가 있었다.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지만 유 회장의 비밀스러운 지시를 멋대로 유출할 수 없었다. 말했을 때의 후폭풍도 부담스러웠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의 자존심과 직결되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해준은 그런 반응을 예상한 상태였다. 유 회장만큼이나 꼿꼿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진짜 곤란이 뭔지 보여 줘요?”

“…….”

정작 묻는 사람은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듣는 사람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질문이었다. 해준은 준비했다는 듯 비서 실장의 부정을 줄줄 읊었다.

“지금이……아이 학원 끝나고 갈 시간이죠. 아이도 열심히 하는데 가족 생각하셔야죠. 내년에 과학 고등학교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던데 회장님이 봐주신다고 하셨죠. 용인 땅에는 장모 명의로 투기도 소소하게 하셨고. 그리고 지금 외도도 하고 계시죠?”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유 회장님의.”

해준이 비서 실장의 말을 잘라먹으며 본인의 휴대폰을 꺼내 들어 보였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이 내용이 여러 사람에게 메일로 발송될 겁니다. 재이 어디 있어요.”

“…….”

“대답해요. 지금 당장.”

비서 실장이 시선을 내린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유 회장과 무섭도록 닮았다. 무언가를 위해 사촌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회사를 뛰쳐나가고, 자신 하나를 잡겠다고 교통사고까지 감행했다. 단순히 겁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본부장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비서 실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 *

해준이 재이를 안심시키고 도로 집으로 들어갔을 때, 윤재는 억지로 일어나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준은 팔짱을 낀 채로 그 모습을 퍽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뭘 봐……!”

윤재는 악에 받쳐 소리쳤지만 해준은 눈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반응에 되레 자신만 우스워진 것 같아 윤재는 오기가 생겼다. 빈정거리며 해준의 성질을 긁었다.

“미친 새끼. 할아버지랑 똑같은 새끼야 넌. 욕할 필요도 없어.”

살면서 윤재가 해준에게 보인 가장 공격적인 태도였다. 해준에게 반감과 자격지심을 오래 품고 있었으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는 해준을 보며 은연중에 ‘더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말을 찍찍 뱉으며 후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래도 되는 것인가 불안하기도 했다. 윤재를 내려다보던 해준은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나직하게 맞받아쳤다.

“그 여자는 안 본 사이 많이 늙었더라. 밥벌이한다고 고생해서 그런가. 과외도 하고, 알바도 하고 투잡 쓰리잡 뛰느라 정신이 없더라고.”

순간 윤재가 여자의 이야기에 흠칫 놀랐지만 곧장 더욱 공격적으로 소리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출국 직전에 만난 것 같던데, 안 따라온 걸 보니 둘이서 무슨 이야길 한 건지 몰라도 말이야.”

“…….”

윤재는 해준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설마설마했지만 그새 자신의 뒤를 밟았다니. 해준은 조금 피곤한 듯 무신경하게 자신의 예상을 읊었다.

“보나 마나 무식하고 뒷일은 모르는 너는 같이 가자 했을 거고. 그 여잔 먼저 가 있으면 따라가겠다 이런 소리나 지껄였겠지. 아님 꺼지라고 했든가.”

“미친……. 존나 재미있는 상상하며 사네.”

아주 틀린 예상은 아니었기에 더욱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아마 해준은 자신이 여자와 최근까지 접촉한 것을 보아 두 사람의 내면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해준은 한심하다는 듯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뭘 제대로 모르는 거 같다.”

“너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지 마.”

“그 여자, 똑똑한 사람이야. 너랑 다시 만나거나 붙어먹지 않을 거란 건 알아라. 내가 형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야.”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침전물처럼 사라지지 않는 불안이었다. 그 여자가 자신을 끝끝내 내치는 것. 그리고 해준은 윤재의 아픈 곳을 정확히 조준해 찔렀다. ‘너는 죽어도 안 될 거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윤재가 분에 차서 울컥했다.

“지랄하네……. 돈이나 있으면 내놔!”

해준은 여전히 뻔한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있는 윤재를 안쓰럽게 여겼다. 해준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가끔, 재이가 없을 때나 피우는 것이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혹여 재이가 볼까 바닥에 라이터와 남은 갑을 던져 버리며 물었다.

“여자가 혼자 살고 있는 건 아나?”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윤재는 머리를 크게 맞은 듯 멍해졌다. 혼자 살다니. 여자는 아이들을 건사하며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나?

뻣뻣하게 굳어 악도 쓰지 못하는 반응에 해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달싹였다.

“이혼한 지 오래고, 양육권은 남편이 가져갔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네. 내가 그 여자를 너보다 잘 알아.”

“…….”

사실이었다.

자신은 모두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 지긋지긋한 남편에게서 벗어났었다니. 아이도 없지만 자신을 피했고,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면서도 한국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니. 갖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여자가 앞에 있다면 그녀를 흔들며 다그치고 싶었다. 왜 그랬냐고. 정말로 왜 나는 안 되는 거냐고. 자신의 생각을 비웃듯 해준이 그를 몰아붙였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네게 했는지 알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함께 가지 않은 이유가 뭘까.”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의 윤재에게 배신감과 혼란스러움이 몰아쳤다. 악에 차서 턱이 떨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해준 역시 재이가 리모컨을 쥐고 넋이 빠진 광경을 목격했기에 봐줄 생각이 없었다. 잔인하다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윤재를 철저히 망가트릴 생각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왜일까. 너 같은 새끼랑은 죽어도 못 붙어먹겠다는 거지.”

해준이 결론을 애써 회피하는 윤재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리고 윤재는 그 대상이 해준이라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이성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입 닥치라고 했어!”

윤재는 별안간 기합 같은 비명을 지르며 눈에 핏발을 세운 채 품에서 칼을 꺼냈다. 그대로 해준에게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윤재.”

허리를 숙인 채 몸을 굳힌 해준의 셔츠에 스멀스멀 붉은빛의 핏자국이 올라왔다. 해준이 윤재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

윤재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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