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대원그룹 유윤재, 상간남‧성추행 논란…….]
“장난 없네.”
윤재가 궁지에 몰렸을 때, 기사를 보자마자 해준이 터트린 것임을 직감했다. 자신을 죽여 재이를 살리려는 셈일 테지.
윤재는 혼자만의 힘으로 해준을 맞서기엔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여자가 최근까지 접촉한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맞서는 것보다 숨는 게 더 현명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단단히 화가 난 유 회장은 윤재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받지 않았다. 수차례 경고해 왔고, 여태 매번 마지막 수습이라며 도와줬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재는 두려웠다. 유 회장은 자신을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이미 집안에 해준의 부친이라는 선례가 있었다.
억지로 유학을 가서 향수병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큰 사고를 친 삼촌은 영영 복귀하지 못했다. 가지고 있던 재산 조금으로 연명하며 여전히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윤재에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어렵사리 비서 실장과 연락이 닿았다. 비서 실장조차도 조금 딱딱하게 자신을 대했다. 유 회장의 부탁을 들어줄 때는 상냥하던 태도가 순식간에 다시 돌아와 버렸다. 윤재는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고 위기감을 느끼며 도움을 청했다.
-윤재 씨. 회장님이 굉장히 화가 나셨어요.
“실장님 죄송하지만 한 번만 도와주시면…….”
-……일단 한국에서 나가계시죠. 바로 비행기 티켓 끊어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네. 그게 회사 차원에서도 좋고, 윤재 씨도 안전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처리할 테니 얼마간 근신하고 계시는 게 좋겠네요.
비서 실장은 준비라도 한 듯 단호히 말했다. 윤재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국을 떠나라니. 발등에 불이 붙었지만 한국에 남아 있을 그 여자가 맘에 걸렸다.
“어디로요?”
-집 하나 구해드리겠습니다. 거기서 한동안 지내세요.
“얼마나 시골에 처박으려구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혼자 지내는 건 아니에요. 그 점은 앙해해 주세요.
“혼자가 아니라고요?”
-재이 씨랑 한동안 지내시다 잠잠해지면 나오세요.
아무리 윤재라고 해도 그 말을 듣고선 잠시 말문이 막혔다. 노친네 드디어 노망난 거냐고 물으려다 간신히 참았다.
“저 걔랑 스캔들까지 났어요. 게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고요. 회장님은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래요?”
-결혼 상대야 누구든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틀린 것은 정정하면 되는 것이고요. 억지로 하거나 일방적인 게 아니라면, 애초에 성추행이 아니니까요.
“……일부러 이러시는 거예요? 대단하시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유 회장의 미련에 윤재마저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자 의도적으로 자신을 안재이와 함께 붙여 놓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해 마시고. 특별한 지시는 없으셨습니다.
비서 실장은 덤덤히 의례적인 말을 했지만 유 회장의 의도는 선명했다. 사실 윤재는 비서 실장의 말에 따를 생각이 그다지 없었지만 항공권을 빠르게 구하기 위해서라도 알겠다고 했다.
윤재는 여자를 데리고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나 진짜 준비됐어요. 후회 안 해요?”
“혼자 가.”
하지만 그의 계획이 보란 듯이 엎어지고, 혼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재는 여자의 거절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끝끝내 자신을 밀어낸 그 선택이 야속하고, 밉고,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겪게 될 수난이 눈에 선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남아 있겠다니.
윤재는 미국으로 떠나는 내내 골똘히 생각했다. 왜 기어코 자신을 내쳐 버린 건지,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지만 복잡한 생각과 싸워야 했다.
“개같아 죽겠네.”
윤재는 가릴 수 있는 모든 곳을 가린 채 미국에 도착했다. 그는 인파를 피해 공항을 나가며 욕을 지껄였다. 이제야 좀 한국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나 했는데 또다시 방랑자 신세가 된 것이다.
의미와 목표 없는 나날을 보내며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한량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자신을 쫓아낸 건 유 회장도 아닌 해준이었다. 윤재의 억하심정과 자격지심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악만 남은 윤재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자신은 이미 성추행범과 상간남의 이미지를 뒤집어썼고, 계획이 엎어지고 여자를 잃었다. 벼랑 끝에 외줄 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해준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히고 싶었다. 자신을 이미 성추행범으로 몰았으니 그가 가장 아끼는 것에다 실천해 줄 셈이었다.
“아저씨는?”
자신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고, 해준을 찾는 재이에게 곧 죽어도 자신은 안 된다던 여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윤재의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재이에게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핏발이 선 눈에는 안광이 번쩍였다. 마약을 했을 때처럼, 다른 사람이 된 듯 감정은 파도를 치며 극과 극을 넘나들었다.
“나는 왜 안 돼?”
재이는 자신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단박에 알아챈 듯했다. 더 이상 빈 가게에서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때우던 화기애애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살벌한 분위기가 몇 차례 지나갔지만 윤재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재이는 여전히 떨고 있고 윤재는 시간이 갈수록 앞으로가 막막하며 더욱 화만 날 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못 할 것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랑도 해 볼래? 너 나랑 안 뒹굴어 보니까 자꾸 형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난 그런 거 자신 있거든.”
“저리 꺼져. 가까이 오지 마.”
“왜 씨발!”
“…….”
“세상 사람들은 기회도 안 주면서 형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몰라? 아님 너도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아? 애 싸질러 놓고 나 몰라라 할 거 같아? 제 식구도 건사 못 할까 봐?”
자신의 분노가 엉뚱한 곳을 향하든, 논리에 맞지 않든 아무거도 상관없었다. 그는 당장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윤재는 드디어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재이는 바들바들 떨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해준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아프고 약한 구석을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형이 날 성범죄자로 만들었던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
그가 재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재이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 * *
재이는 해준이 윤재에 관한 기사를 올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윤재의 말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위협적인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났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했어.”
성범죄자.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던 부장. 무기력했던 자신의 모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재이가 마른침을 두려움과 함께 삼켰다. 도화선에 불이 붙은 듯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왜. 또 형이 아니면 안 돼?”
“…….”
신경은 곤두서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침착하고 이를 슬기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이성은 흐려지고 살아야겠다는 본능만이 남았다. 과거의 기억이 겹쳐지며 재이도 빠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내가 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얼마나 후회했는데. 그때처럼 병신같이 당할 수는 없다.
“말해 봐! 왜 나는 안 되냐고!”
윤재가 고함치며 어깨를 잡았을 때, 재이는 등 뒤로 움켜쥔 리모컨을 꽉 잡고서 발로 윤재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어억!”
빗겨 나갔지만 그것도 효과가 있었는지 윤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재이는 일어나 그를 내려 보다 움켜쥔 리모컨으로 윤재를 내리쳤다.
윤재는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지만 재이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세게 치고 있는지, 그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그런 건 떠오르지 않았다. 재이는 벌레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때려죽이듯 쉬지 않고 내리치고, 윤재를 걷어찼다.
“죽어, 죽어!”
재이가 이를 악물고 소리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실감 났다.
리모컨이 부러질 때까지 사람을 때렸다. 문득 이 상황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몸을 웅크리고 끙끙 앓고 있는 유윤재. 문득 낯선 곳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자신. 바닥에 흩어진 피 묻은 리모컨 파편들…….
어디서부터 이렇게까지 엉망이 된 건지. 환멸, 분노, 복수 뒤에 자기혐오가 쏟아졌다. 재이가 다시 혼란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덜컥!
그때 현관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이가 눈을 크게 뜨고 문을 응시했다. 엎어져 있던 윤재도 애써 고개를 들었다.
“재이야.”
해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검은 코트와 머플러를 걸치고 온 그가 재이를 찾으러 왔다. 짙은 동공은 흔들림 없이 또렷이 재이를 향했다. 머리와 차림은 평소보다 단출했지만 그는 온몸으로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
그를 보는 재이의 얼굴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며 일그러졌다. 그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게 꿈처럼 느껴졌다. 서러움과 반가움에 눈물이 맺혔지만 하필이면 지금 이렇게 추한 자신의 바닥을 그에게 보여야 하다니.
“이리 와.”
그가 팔을 조금 벌려 보였다. 재이는 손에서 리모컨을 떨어트렸다. 마음속에서 일던 거친 해일은 그를 만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반갑게 안길 마음보다 그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다. 재이가 그에게 비척비척 다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앞에 섰다.
“죄송해요.”
“가자.”
“…….”
그가 재이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재이는 그 자리에 서서 버텼다. 윤재와 입을 맞춘 것도 자신이었고, 사건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도 본인의 탓 같았다. 재이가 입술을 깨물고 울먹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해준은 재이의 어깨를 감싸 안아 품에 넣으며 달랬다.
“내 새끼 집에 가자.”
결국 재이의 울음이 터졌다.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에게선 자신이 골라 준 향수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