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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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의 표본인 유 회장은 살기 위해 달려왔다. 그의 부모님은 작은 양장점을 겨우 운영하다 망했고, 그는 가난에 시달리다 맨손으로 회사를 키웠다. 생각지도 못한 큰 성공을 이뤘지만 이후에도 각종 정신과 약을 달고 살 정도로 거대한 리스크를 감내했다. 회사를 차린 이후 단 하루도 편히 자 본 적이 없었다.

회사는 자신이었고, 자신은 곧 회사였다.

아들을 버리고, 부인을 방치했다. 이 회사를 물려받을 만한 인재는 해준이 유일했고 후계자의 무게가 만만찮을 걸 감안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쏟았다. 누구든 치켜세우는 해준을 보고 있노라면 그간의 불안과 걱정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아니라고 해 보세요. 사진, 녹취, 자료라면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주가 더 떨어지기 전에 재이 돌려주십시오.

특별하디 특별한 손자였다. 그런 아이가 제 손으로 회사와 집안을 곤란케 하고 있다. 유 회장은 이 사달보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맹랑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해준이 못내 밉고 서글펐다.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고작 한다는 게 협박이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해준은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하게 제 패를 보였다.

-아니요. 협상이죠. 재이는 더 이상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처치 곤란인 계열사 제가 맡겠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유일한 인재이자 후계자가 본사에서 유출되는 꼴이었다. 유 회장이 벌컥 소리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언제까지 차일피일 미루실 겁니까. 지금이라도 발맞추지 않으면 그대로 퇴보할 겁니다. 여태 버틴 것도 용할 판인데 임원 중 누구라도 제대로 이끌 사람이 있다고 보십니까?

“…….”

유 회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해준이 말한 것은 요즘 그의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여태 해 놓은 것으로 버텨 왔지만 당장 5년 그 이후는 재계 1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혁신의 직전, 결단을 내려야 했지만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적합한 사람은커녕 임원들은 모두 ‘계열사를 말아먹었다’는 오명이 싫어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했다. 흔들리는 유 회장의 마음을 낚아채듯 해준이 강하게 힘주어 말했다.

-저는 회장님을 잘 압니다. 아무도 성에 차는 사람이 없어서 여태 미뤄 놓은 거 아닙니까?

“고얀 놈…….”

손자의 흠이라면 너무 똑똑하고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아는 놈이라는 것. 까마득하게 어린 놈이었지만 결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돌려주십시오. 그리고 재이랑 결혼하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자료는 파기하고, 소문은 시간이 해결할 겁니다. 그동안 그 계열사 5년 안에 업계 1위로 올려놓겠습니다.

자신이 어릴 적 해준에게 가르쳐 준 대로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 * *

재이는 긴 비행 중에도 잠들지 못한 채 괴로움과 싸워야 했다. 갖은 생각과 걱정, 후회가 좀처럼 수습되지 않았다. 비행이 시작되고 한참 지난 후에야 해준에게 연락도 남겨 두지 않았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연신 한숨을 속으로 삼키자 옆자리에 앉은 비서 실장이 입을 뗐다.

“많이 힘드세요?”

“……그냥. 저는…….”

“드세요.”

비서 실장이 잠자코 짐을 뒤지더니 알약을 건넸다.

“이게 뭐예요?”

“수면제입니다.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나을 때가 있죠. 어찌 됐든 시간은 가니까요.”

“…….”

재이가 비서 실장과 그의 손바닥에 올려진 약을 번갈아 보다 머뭇거리며 건네받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지나갔으면 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한순간이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약을 복용하고, 재이는 곧 몽롱함을 느꼈다. 문득 해준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내내 질문을 삼켜 왔던 그녀가 용기를 내어 어눌하게 물었다.

“아저씨 아니 본부장님은요……?”

“주무시고 계시면 곧 오실 겁니다.”

비서 실장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니 믿을 수밖에. 재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긴 잠에 들었다.

재이는 길고 긴 잠에서 깨어 미국에 도착했다. 몽롱함이 가시지 않아 반쯤은 자는 것 같은 상태로 이동했다. 비서 실장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줄 알았지만 계속 동행했다. 둘은 공항을 떠나, 함께 픽업 차량을 타고 이동했다.

“실장님. 죄송하지만 수면제 좀…….”

그 와중에 재이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수면제를 먼저 찾았다. 차량은 뉴욕 시내를 뚫고 비교적 한적한 도시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달렸다. 재이는 해준을 그리워하며 자다 깨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도착한 곳은 마당이 좁고 집이 큰 전원주택이었다. 앞서 걷는 비서 실장을 재이가 비척비척 따라갔다. 잊고 있던 공기의 냄새, 주변 환경, 주위에서 드문드문 들리는 영어. 자연스레 해준과의 유학 시절이 떠올랐다.

살면서 되도록 찾고 싶지 않았던 미국이었다. 귀국 직전에는 향수병에 심하게 시달려 다시 우울증이 도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외국 생활에 지쳐 귀국일이 정해졌을 때는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여기서 일단 대기하고 계시면 됩니다.”

“…….”

“지금 출국 소식에 기자들도 많이 따라붙었습니다. 보안을 위해서 밖에서 잠가 둘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이 휴대폰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재이가 거물거리는 눈을 붙잡고 잠자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비서 실장이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휴대폰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그것을 따지고 씨름할 여유가 없었다.

“예? 예……. 저 좀 쉬고 있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약 기운이 빠지려면 좀 더 자야 할 겁니다.”

“오빠는 언제 와요?”

재이는 비서 실장 앞에서 그를 오빠라고 부를 정도로 몽롱한 상태였다.

“곧 있으면… 올 겁니다.”

비서 실장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이게 정말 수면제가 맞나? 과도하게 몽롱한 컨디션을 부여잡으며 도로 잠들었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선잠을 자는 와중에 들렸다.

눈을 떴을 때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이는 잠결에 자신이 있는 곳이 여전히 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신이 점점 또렷해질 때마다 그게 자신의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첫 번째로 해준은 자신이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을 때 가사 도우미를 돌려보낼 사람이었고, 그는 애초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럼 이 소리는 누가 내는 걸까?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머리칼이 쭈뼛 섰다. 의아함은 두려움으로 번졌다. 재이가 머뭇거리다 최대한 인기척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재이의 의심과 달리 낭창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안녕.”

“……뭐야?”

소리의 주인공은 유윤재였다.

“뭐긴 뭐야. 윤재야.”

그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능청맞게 굴었다. 순간적으로 아는 얼굴이라는 점에서 안심이 되었지만 안도감은 금세 사라졌다.

낯선 집, 낯선 냄새, 꺼려지는 남자. 자고 일어나면 해준이 자신을 반길 거라는 기대가 무너졌다. 그제야 재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잠시만.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유윤재는 묘한 얼굴이었다. 납득되지 않는 상황도 불편했지만 유윤재도 평소와는 달라 보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능청은 꾸며 낸 듯했고, 자신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듯 보였다. 그런 작위적인 모습은 윤재도 이 상황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스캔들이 난 사이에 한집에 있는 것 자체가 껄끄럽고 불편했다. 재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저씨는?”

재이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윤재가 재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았다. 속을 읽기 힘든 그의 시선에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둘 사이의 침묵에 긴장감이 흘렀다. 윤재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왜 안 돼?”

“…….”

재이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윤재가 자신을 벼르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위협적인 말이나 행동 하나 없었지만 눈빛은 분명히 평소와 달랐다. 재이는 대답 대신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한가운데에 섰다.

윤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재이는 흠칫 놀라 서둘러 그가 다가온 만큼 물러섰다. 머릿속으로는 집의 현관문이 어디 있었는지 더듬었지만 비서 실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출국 소식에 기자들도 많이 따라붙었습니다. 보안을 위해서 밖에서 잠가 둘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이 휴대폰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약을 먹고 흘려들었던 것이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현관문으로 달려가더라도 나갈 수 없다니. 주머니를 더듬어도 원래 사용하던 휴대폰은 온데간데없었다. 식탁을 눈으로 힐끔거렸지만 비서 실장이 두고 간 휴대폰 역시 보이지 않았다. 윤재가 들고 있는 걸까.

“말해 봐. 이유나 들어 보자. 형 지금 자리에 없잖아.”

“왜 이상한 데 꽂혀서 따지는 거야?”

“따지다니. 난 질문이라고. 형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보자고.”

아니다. 순수한 의도로 하는 질문이 절대로 아니었다. 윤재는 속에서 무언갈 억누르는 듯 보였다. 언제든지라도 돌발 행동을 할 수 있어 보였고, 그게 가능한 환경이었다. 두려움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연히 아저씨가 와야지.”

“왜? 왜 난 안 되는데?”

“무슨 소리야. 자꾸 말꼬리 잡지 마.”

“내가 형보다 가방끈이 짧아서? 어? 내가 능력이 없어서?”

재이에게 비슷한 질문을 집착적으로 하는 윤재의 눈에서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안광이 번쩍였다. 웃음기를 잃고 자신을 쏘아보며 묻는 그가 점점 가까이 왔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재이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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