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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떠야 돼요, 여권이랑 짐, 아니 지갑만 챙겨서 나와요! 얼른!”

전화를 받지 않는 여자도 심상치 않은 음성 메시지를 들었는지 윤재가 그녀의 집에 도착할 때쯤 전화가 왔다. 빌라 건물에서 나올 줄 알았지만 여자는 대로변에서 올라오는 중이었다. 윤재가 그녀 앞으로 차를 세워 창문을 내린 채 물었다.

“어디 갔다 와요? 그새 딴 주머니라도 찼어?”

윤재의 예상대로 여자는 이미 적잖이 화가 나 보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이 앞에서 일해. 너 정말 미쳤어? 한낮에 왜 자꾸 전화하는 거야.”

“들었죠? 가야 된다고요. 빨리 필요한 거만 챙겨서 나와요.”

윤재의 말에 여자는 그리 탐탁지 않아 보였다. 그녀가 따지듯 물었다.

“어디로? 아니, 왜 가야 되는데.”

역시 깐깐한 성격에 호락호락 넘어가는 법이 없다. 윤재가 멋쩍게 귀 뒤를 긁으며 말했다.

“……일이 잘못됐어요. 나 우리 이제 외국 가서 살 돈도 준비해 놨어요. 돈 많다고요. 지금 큰일 났으니까 나 믿고 일단 가요.”

“안 가. 내가 왜 가.”

여자는 자신의 설득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윤재가 머뭇거리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미 우리 둘이 만나고 있는 거 들켰고, 회장님도 곧 알게 될 거예요. 그 외에도…….”

“안 간다고! 얼른 돌아가.”

여자가 소리치면서도 주위를 눈으로 힐끔거렸다. 이 와중에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쓰다니. 아니, 혹시나 남편이 이를 볼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자 윤재도 조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그렇게 살면서 도대체 왜 같이 가자는 말에는 동요도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줌마 진짜 미쳤어? 회장님 성격 몰라서 그래요? 빨리 여권이라도 챙겨요.”

그의 말에 참다못한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유윤재!”

듣기 힘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여자가 완전히 진심이라는 걸 실감하자 윤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여자는 그를 복잡한 감정으로 노려보다 입을 뗐다.

“너 진짜 내가 돈 때문에 그랬던 거 같니? 사람 말뜻을 왜 이렇게 못 알아먹어.”

“그럼 뭔데요?”

“너 날 사랑하긴 하니? 내가 보기엔 이제 아니야. 그런데 아직도 왜 이렇게 방황하는 거니.”

“…….”

순간 윤재의 말문이 막혔다. 언제나 여자를 속이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마음이 100퍼센트 사랑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주위를 절대로 떠날 수 없었다. 여자는 답답하다는 듯 그를 나무라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힘드니.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거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고, 우리는 남이야. 이제 네 자리를 찾아가.”

하지만 윤재는 자신이 혼란스러운 만큼 여자의 말도 인정하기 싫었다. 그가 그녀의 말을 여상스레 넘기려 입을 뗐지만 여자가 더 빨랐다.

“너 잘 생각해. 나랑 지금 한국을 떠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윤재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낮에 본 여자는 그간 맘고생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여자를 두고 간다는 건 여전히 내키지 않았고, 자신의 말에 너무나 냉정한 것도 못내 밉고 서운했다.

“나 진짜 준비됐어요. 후회 안 해요?”

“혼자 가.”

“…….”

“끝난 관계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미련 가지지도 말고. 혼자서도 행복해져.”

윤재는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떠나면 또 언제 어디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차량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 할 시간이었다.

“……그 말 후회할 거예요.”

그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표현하고 싶었으나 고작 나온 건 저주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이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재를 바라보다 뒤돌아 대로변으로 내려갔다.

* ♟ *

지금은 어느새 10여 년이 지나 버린 그해는 좀처럼 잊히지가 않는다. 독박 육아와 시간 강사를 시작하여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시가와 남편과의 불화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외롭고, 힘들고, 기댈 곳을 바라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학기 초, 수업이 개강하기도 전에 학과장은 그녀를 불러냈다. 깍듯한 인사 후, 그녀가 가장 먼저 들었던 이야기는 윤재에 관한 말이었다.

“수업 들어가면 학생 중에 유윤재라고 있을 거예요. 대원 회장님 식구니까 신경 좀 써 줘요.”

“네?”

“회장님이 또 총장님이랑도 친하고 우리 학교에 도움 많이 주니까. 응?”

“아,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누구길래.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깐, 막연하게나마 귀한 집 아들이구나 하며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강의 첫날, 그녀는 단번에 유윤재 찾아냈다. 그를 강의실에서 처음 봤을 때도 또렷했다. 유윤재는 요란하고 껄렁한 무리 속 주인공이었다. 말수는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강의실에 누워 있거나 따분한 표정으로 딴짓을 했지만 그는 확실히 한량 도련님 무리의 우위에 있었다.

다만 절대로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수업을 잘 듣다가 뜬금없이 자신에게 다가오긴 했지만 오히려 불편했다. 차라리 이 수업이 얼른 끝나 저런 놈팡이들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사랑해요.”

그와 관계가 깊어진 뒤에도 윤재의 진심이 궁금한 건 변하지 않았다.

“……이러지 마.”

그때마다 여자는 한 번도 쉽게 수긍하지 않고 윤재를 밀어냈다.

폭풍 같은 몇 년이 지나고 자신을 돌아봤을 때는 불장난 같은 관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상태였다.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남편은 의처증이 심해지고, 주폭이 생겼고, 본인과 아이들은 외국으로 도망치다시피 했으며, 윤재도 예외는 없었다.

남편이 알게 되어 난리가 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지만 질긴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자는 윤재를 강하게 밀어낼 수 없었고, 윤재는 미련을 끊지 못했다.

“나 진짜 준비됐어요. 후회 안 해요?”

“혼자 가.”

여자는 뛰쳐나온 편의점으로 도로 들어갔다. 회사 로고가 적힌 조끼를 입고 손님을 맞아도 윤재와 했던 대화가 그 서글픈 눈빛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끝난 관계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미련 가지지도 말고. 혼자서도 행복해져.”

“……그 말 후회 할 거예요.”

여자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고 바코드를 찍었다. 삑, 삑 거리는 소리가 귀에 이명처럼 남았다. 카운터에 틀어 둔 작은 티비에선 뉴스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와. 저건 또 뭐야?”

새로운 소식을 본 손님이 놀란 마음에 중얼거렸고, 여자는 반사적으로 본인도 티비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대원 그룹 유윤재, 상간남‧성추행 논란…….]

* * *

재이가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대원의 후계자란 이유로 무턱대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못하는 게 해준의 현실이었다.

권 팀장은 곧장 관리 사무실로 가서 CCTV를 열람했고, 재이가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SUV에 올라타는 걸 확인했다. 그게 대원의 차량인 것도 바로 알아보았다.

-아마 회장님께서 재이 씨의 행방을 아실 것 같습니다.

“일단 알겠어. 끊어.”

해준은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전화를 끊었지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권 팀장을 빼내 오니 이젠 그새 재이를 건드리다니. 이런 일을 아주 상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해준은 유 회장을 잘 알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수세적으로 반응한다면 도리어 사람을 찍어 누르는 사람이었다. 재이는 여전히 요란한 기사에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재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대원그룹 유윤재, 상간남‧성추행 논란…….]

그가 선택한 것은 윤재를 죽이는 것이었다. 재이를 ‘재벌가 남자 둘이나 잡아먹은 양다리의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뒤엎을 유일한 카드였다.

재이가 그를 밀어내는 모습과 유부녀와 여러 차례 염문이 있었다는 것까지 터트렸다. 재계 1위 그룹의 사생활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주가는 요동치고,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괜찮을까요?”

“상관없어.”

사무실에서 기사 자료를 보내기 직전, 권 팀장이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해준은 끄떡하지 않았다.

“이대로 괜찮을까요?”

“물론 아니라고 하겠지. 뭐 뻔한 거 아니겠어.”

하지만 해준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푼 게 아니었다. 회사에선 당연히 모든 사실을 부인할 테지만 그에겐 윤재가 최근까지 여자와 만났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만만하게 보였던 탓이지.”

태평한 중얼거림을 듣던 권 팀장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신문 1면까지 진출한 대원의 루머로 대한민국이 들썩이는 중이었다. 해준은 무섭도록 평정을 유지한 채 대원의 대응에 즉각적인 판단을 이어 나갔다. 그가 유 회장과 다른 점이라면 그런 것이었다.

Rrrrrrr-

해준과 권 팀장의 휴대폰으로는 대원에서 전화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비서 실장, 동기, 인사부, 전무, 그간 거액의 로비를 거절하고 정치권의 압박을 버티며 기십 년 동안 쌓아 온 이미지는 단 며칠 만에 무너져 버렸다. 회사와 집안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유 회장님]

Rrrrrrr-

해준은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사무실 안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혼란한 틈을 타 재이를 멋대로 데려가다니. 자신이 회사를 비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재이에게 손을 뻗었다는 게 황당하기까지 했다. 해준은 느지막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휴대폰에선 유 회장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해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 회장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윤재 기사 네 짓이냐?

“네.

네. 대단히 단출하고 도발적인 대꾸였다. 간신히 분을 참아 내던 유 회장이 결국 욕지거리를 터트렸다.

-너…… 유해준 너 이 새끼야……!

“뭐 어떡합니까. 그러게 재이를 왜 데리고 가셨어요. 저도 더 이상 카드 끊기는 어린애가 아닌데.”

-너 정신 차려! 그 계집애랑 집안 식구랑 같다고 생각하냐!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게 윤재 팔자인가 보죠.”

-유해준!

그가 한쪽 허리에 손을 올리며 더욱 태연하게 말했다. 그 안이 쑥대밭일지라도, 꼿꼿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니라고 해 보세요. 사진, 녹취, 자료라면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주가 더 떨어지기 전에 재이 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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