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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는 침착하려 했으나 손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짐을 챙기고, 카페를 나서는 발걸음은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조급했다. 카페를 나왔지만 사고 회로가 끊긴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이는 아파트 커뮤니티 안을 정처 없이 떠돌다 건물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침착하게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오랜만에 전원을 켰다. 심상치 않은 뉘앙스의 연락들이 쌓여 있었다. 재이는 모두 무시하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들어갔다.
이미 그녀를 암시하는 듯한 기사가 기록적인 조회 수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재이는 홀린 듯이 기사를 클릭했고, 유윤재와 자신의 얼굴이 일부 모자이크된 사진을 똑똑히 확인했다.
[……대원 그룹 유해준 본부장의 예비 신부로 추정되는 여성이 유 본부장의 가족과 입을 맞추는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
벼락 맞은 듯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재이는 휴대폰을 놓쳐 떨어트렸고 화장실 칸 밖으로 자신의 비명이 들릴까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 두려운 건 지금쯤이면 해준이 이 기사를 봤을 거란 사실이었다.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윤재와 자신이었다. 대학 졸업식 날, 아주 멀리서도 인파에 섞인 자신을 단번에 찾은 그였다.
이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죄책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기사는 자신을 유해준의 예비 신부라고 칭했다. 결국 자신은 해준과 회사의 이미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는 적잖은 실망을 했을 것이고, 화도 났을 수 있다.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싶었다. 재이는 집에 다이아 반지를 빼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Rrrrrrr-
[대원 비서 실장님]
화장실 바닥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재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발신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회장님과의 연락이 닿을 때 오는 번호였다. 손자 앞길을 막는다며 불같이 화낼 유 회장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대로 증발해 버리고 싶었지만 어렵사리 전화를 받았다.
-재이 씨, 갑자기 연락드려서 놀라셨을 텐데 혹시 기사 보셨을까요?
비서 실장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재이가 울컥하며 거듭 사죄했다.
“네? 아…… 네, 네. 죄송해요. 정말로…….”
-일단 상의가 좀 필요할 거 같습니다. 지금 어디신가요?
“지금…… 지금 아저씨, 아니 본부장님 아파트 커뮤니티 건물 1층인데요.”
-본부장님은 이미 회사로 급히 가셨구요. 저희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시면 차 대기해 있을 겁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주민들이 수다 떠는 말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반사적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재이는 앞뒤 분간할 겨를 없이 쫓기는 사람처럼 커뮤니티를 뛰쳐나갔다.
“타세요!”
비서 실장이 차창을 내려 다급히 외쳤다. 차가 지상으로 다닐 수 없는 아파트였지만 단지 안으로 끌고 온 것을 보자 사태의 심각성이 절실히 느껴졌다. 재이는 홀린 듯이 뒷좌석에 탔다.
몇 번 본 적 있는 회장님의 수행 기사는 거칠게 차를 몰고 단지를 빠져나갔다. 위험한 운전을 계속하면서도 속도는 줄이지 않았다. 비서 실장이 못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은 별장으로 떠나셨고 본부장님은 기자들 때문에 급히 출국하셨습니다. 지금 대책반 꾸려서 회의 중이고, 경황이 없으셔서 연락도 어려우실 거예요. 먼저 뉴욕에 도착해 계실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덜컥 겁이 나고 머리가 멍했다. 재이는 자신이 벌인 일이 이렇게나 심각하게 돌아올 줄 몰랐다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그럴 염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고민하다 걱정스레 질문했다.
“회장님은 화가 많이 나셨죠?”
“아니라고는 대답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
눈물이 찔끔 흘렀다. 재이는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기분이었다. 평생 그녀는 해준에게 짐이 되지 않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 왔다. 너무나 완벽한 해준 앞에서 자신의 자존감 같은 건 사치였다.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되어 조금 더 성장했다고, 다음 목표는 그를 돕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뒷걸음친 기분이었다. 아니, 그를 안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는 게 더 정확해 보였다.
절망에 빠져 있던 재이는 공항에 도착해 출발이 임박한 비행기에 비서 실장과 함께 허겁지겁 올랐다. 그때까지도 비서 실장은 기사와 관련해 쏟아지는 전화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탑승 직전 재이는 문득 해준이 떠올랐고 슬픔을 참을 수 없어 입을 뗐다.
“혹시 본부장님은.”
“…….”
하지만 자신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 말도, 제스처도 하지 않았지만 무뚝뚝한 표정은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도 해준을 찾느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아니에요…….”
재이는 그렇게 넋이 빠진 채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 *
해준은 재이가 나간 뒤 정신없이 밀린 업무를 처리 중이었다. 대원에는 여전히 자리를 비우고 있었지만 새로운 회사를 준비하며 자리 잡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은 굉장했다. 복귀 전에 조금이라도 업무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문득 해준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재이에게도, 권 팀장에게도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메일을 확인했다.
[(빠른 회신 부탁) 대원입니다 본부장님.]
쌓여 있는 메일에는 평소보다 유독 급박한 뉘앙스가 실려 있었다. 해준은 뭔가 또 다른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고 포털 사이트를 확인했다.
“…….”
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윤재와 재이가 입을 맞추는 사진. 문제는 자신이 받았던 CCTV 캡쳐본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였다. 누가 봐도 촬영을 작정하고 의도한 듯한 포커스였다. 윤재의 짓이 분명했다. 재이는 이 사실을 모른다. 기사를 보게 되면 크게 죄책감을 가지며 낙담할 것이다. 해준은 곧장 권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빠르게 지시했다.
“여보세요. 권 팀장 지금 재이랑 있지. 최대한 기사 확인하지 말라고 전달해 줘.”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침묵과 함께 의아한 목소리였다.
-예……? 저는 두 분 함께 있는 줄 알고 지금 내내 재이 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뭐?”
해준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전류처럼 흘렀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 전화를 끊고 재이에게 전화해 봤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해준은 권 팀장에게 전화해 단호히 말했다.
“재이 나간 지 정확히 두 시간 됐어. 아파트 라운지 카페로 갔을 거고, 그 이후부터 찾아봐.”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냉정을 찾아야 했다. 해준은 거실로 나가 통창으로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사진이 퍼지게 된 지점. 사건의 실마리.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는 곧장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능청맞은 목소리의 인사 대신 기계음이 돌아왔다.
[고객님의 전화기는 지금 꺼져 있어…….]
정확히 그 지점에서 해준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그가 휴대폰을 바닥에 내리쳤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
* * *
그 시각 윤재는 며칠 전 칵테일 바에서 만난 여성과 데이트 중이었다. 마냥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다. 어젯밤 만난 여자와 하필 이름이 비슷해 헷갈려 하며 발음을 일부러 뭉뚱그리느라 애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딱히 아주 호감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 정도면 몇 번 만나기 적당하다 싶은 상대. 윤재에게 대부분의 여자는 허한 마음을 채우고 부족한 자신감을 채우는 도구였을 뿐이다.
“전 요새 구독해 놓은 게 너무 많으니까 오히려 손이 안 가더라고요.”
“그렇죠. 저도 항상 뭘 볼까 고민하다 옛날 영화를 찾게 되는 거 같아요.”
이름이 헷갈리는 상대는 예상처럼 아주 평범했다. 절대로 윤재가 대학생 때 겪은 그런 오기와 열정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윤재는 조잘거리는 상대의 눈을 보며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가늠하던 중이었다.
“아 맞아, 이번에 대원 그거 보셨어요?”
“재응 씨는 뉴스 자주 보나 봐요?”
‘재윤’인지 ‘재은’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발음하거나, 능청을 떨며 어눌하게 지나가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는커녕 피곤하니 얼른 이 만남을 끝내고 돌아갈 궁리를 했다.
“아, 아니요. 이번에 그 키스 사진 뜬 거요.”
“키스 사진이요?”
“와 못 보셨어요? 그거 이번에 난리 났는데.”
여자는 호들갑 떨며 휴대폰으로 직접 기사를 클릭해 윤재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윤재는 일부러 여자에게 가까이 밀착했고 상대가 긴장으로 숨이 멈추는 것까지 느꼈다. 하지만 사진을 확인한 후로는 그런 여유 따윈 부릴 수 없었다.
“아…… 언제 뜬 거예요?”
윤재의 목소리가 떨떠름하게 변했다. 문제의 사진은 자신이 가윤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기껏해야 유 회장에게 보여 주는 것 정도를 상상했지만 이걸 이렇게 대대적으로 터트리다니. 윤재도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다행이라면 모자이크된 사진으로는 문제의 사촌이 자신인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는 해맑게 열띤 얼굴을 하며 물었다.
“대박이죠! 아까 저희 만나기 전에 떴더라구요. 여자 완전 난리 났어요.”
윤재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려 묘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대원도 재벌 어쩌고저쩌고하더니 보기만 그럴 듯하지 알고 보니 콩가루 집안이죠 뭐.”
가윤이 제보한 사진은 몇 다리 건너지 않았으니 진짜 출처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시작이 자신임을 알면 유 회장도, 해준도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윤재는 자신이 아주 위험해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짐을 챙겨 일어났다.
“죄송한데 저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볼게요.”
“네? 지금요?”
“예. 지금요.”
여자는 황당한 듯 윤재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윤재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며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한낮에 전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그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재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며 그 여자의 빌라 앞으로 출발했다. 기계음이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자 윤재가 소리쳤다.
“지금 한국 떠야 돼요, 여권이랑 짐, 아니 지갑만 챙겨서 나와요! 얼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