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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의 결혼설은 해외의 보석 세공 장인에게 유색 다이아몬드 3캐럿짜리 반지를 주문했다는 소문에서 시작했다. 물론 그 반지는 재이의 생일날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졌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게 없는 재벌의 이야기였지만 이만큼 화제가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모 방송사 과장과 약혼까지 갔다 급하게 파혼을 한 지 일주일도 안 되었고, 심지어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동거녀가 있었다는 소문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소문은 그간 해준의 흠 없이 완벽한 이미지 덕에 더욱 화젯거리가 되었다. 소문은 기사가 되고, 기사는 유 회장에게도 예외 없이 당도했다.
“이 자식이 미친 게냐!”
유윤재로 지저분한 열애설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었다. 유 회장은 자리에서 분통을 터트리며 몸을 떨었다.
“데려와. 당장 내 앞에 데려다 놔!”
코앞에서 피가 거꾸로 솟은 유 회장을 진정시켜야 하는 비서 실장은 난감할 수밖에. 한편으로는 유 회장이 짠하기도 했다. 모두 유 회장을 몹시 지독하다며 손가락질하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를 바로 옆에서 봐 온 비서 실장은 다소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후계자라며 손주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회사를 박차고 나가 정말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작은 계집애를 조심하라며 전전긍긍해 왔던 세월이 10여 년인데 기어코 사고를 쳐 버렸다. 심지어 유 회장이 그렇게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반지까지 해다 바쳤다니.
회사를 중요시 여기는 것만큼 손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유 회장이 이만큼이나 동요하는 것도 해준에 관한 것뿐이었다. 문득 비서 실장은 무언갈 지독하게 아끼는 건 집안 내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가 최대한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오늘까지 내 앞에 데려다 놔, 당장! 이 기사 낸 기자 죽일 놈도 같이. 안 그럼 자네도 끝이야!”
유 회장이 엄포를 놓았다. 비서 실장은 자리로 돌아와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았다. 권 비서를 그때 해고하지 말았어야 했다. 해준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큰 문제였지만 권 비서 없이 해준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미치겠네.”
유 회장에게 잠깐이나마 들었던 연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찾지 못하면 저 망할 영감이 자신까지 내쫓을 것이다. 비서 실장은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법을 찾기 위해 옆 건물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를 찾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퇴근하긴 글렀다. 일단 카페인부터…….
“……주문하신 아이스아메리카노 샷 두 개 추가하신 거 나왔습니다.”
비서 실장이 커피를 건네받고 무심결에 창밖을 쳐다본 순간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길은 있다더니. 마법처럼 권 비서가 가게 밖을 지나갔다.
“권 비서! 권 비서!”
비서 실장은 잃어버린 부모라도 찾은 듯 그를 따라 뛰쳐나갔다.
비서 실장과 권승수는 사수-부사수의 관계였다. 입사 시절부터 화려한 스펙과 꼼꼼한 실력으로 비서 실장의 눈에 띈 권승수는 해준을 모시기 위해 키워졌다. 그는 엄격한 비서 실장의 전담 마크를 버티고 살아남은 인재였다.
비서 실장은 권승수를 구슬려 카페에 앉혔다. 말이 ‘구슬렸다’지 사실상 애걸복걸과 다를 바 없었다. 예상한 대로 마주 앉은 둘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비서 실장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잘 지냈어?”
“아…… 좀 쉬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인지 1년 365일을 다크서클을 달고 판다처럼 살더니 한결 나아진 낯빛을 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본부장을 내놓으라고 할 수 없었던 비서 실장은 어렵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참……. 이렇게 다시 보니까 마음이 그렇네. 그땐 미안했어.”
“아닙니다. 회장님 뜻이 그러시다는데 별수 있나요.”
예상대로 권승수는 덤덤히 대답했다. 문득 비서 실장은 자신이 해고 통보를 대신 전하던 당시 권승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장님께서 나가 달라고 하시네.”
“예?”
“수당은 이래저래 챙겨 줄 테니 인사부 들러서 비밀 유지 서약서 쓰고 나가. 무거운 것들은 내가 직접 퀵으로 보내 줄게.”
가장 아끼던 후배였다. 그런 직원을 유 회장의 지시로 훌쩍 떠나보내야 했을 때, 비서 실장은 3일 밤낮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제 손으로 키운 친구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끔찍했던가.
게다가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렇게 비굴하게 부탁해야 하는 순간이 오다니. 비서 실장은 자신의 마음을 피력하듯 최대한 부드러운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해남에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서울에서 볼 줄이야.”
“겨울이라 농사도 안 되더라구요. 서울 집 계약도 끝나지 않아서 좀 쉬다가 다시 이직했습니다.”
“그래? 잘됐네. 어디로 갔어?”
“아. 아직 스타트업 규모의 단계라서……. 이름은 들어도 모르실 거 같은데요.”
이런. 유 회장이 미리 블랙리스트를 돌린 건지 형편없는 곳에 취업한 듯했다. 비서 실장은 괜스레 안심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저기 미안한데. 본부장님이랑 혹시 연락하나?”
“본부장님이요?”
“연락이 되면…… 제발 회장님 댁으로, 아니 회사로 전화 한 통만 부탁한다고 전해 줘. 기사 봤지?”
“아아.”
권승수가 금세 수긍했다. 비서 실장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닿길 바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제발 부탁해. 너 회장님 잘 알잖아? 이러다 영감 화병으로 오늘내일하겠어…….”
* * *
해준과 대원의 이미지는 수습이 불가능해지는 듯했다. 그 화제는 며칠 내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가윤도 예외는 없었다. 조금 늦게 소식을 알게 된 가윤은 아버지의 힘을 빌려 소문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미 때를 놓쳐 버렸다.
“야 너 정말 불쌍하다.”
“갑자기 왜 넌 내팽개친 거래?”
“너는 알고도 진행한 거야?”
“와 혹시 그 반지 받았다는 애 너는 봤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가윤의 자존심을 흔들었다. 결혼이 엎어진 것도 분했고, 3캐럿의 반지가 결국 재이에게 갔을 거라 생각하면 속이 뒤틀렸다. 자신은 얻은 것도 없이 순식간에 ‘불쌍한 여자’, ‘밀려난 여자’가 되어 함께 이미지가 추락해 버렸는데.
“괘씸한 새끼들…….”
전 국민의 파혼녀가 된 가윤은 소수의 동정을 받기도 했으나 결혼 시장에서 가치가 뚝 떨어져 버린 건 기정사실이었다. 아버지의 등쌀, 쏟아지는 후회와 스트레스, 가윤은 분노로 머리가 반쯤 익어 버릴 거 같았다.
Rrrrrrrr-
“…….”
휴대폰은 쉴 틈 없이 울리다 끊기길 반복했다.
[부재중 통화 유윤재 (3)]
윤재에게도 전화가 왔으나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대원과 지긋지긋한 연을 끊고 싶었다. 다음 날에도 여전히 포털 사이트를 점령해 버린 뉴스창을 보다 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기자님. 시간 되세요?”
-이게 웬일이야! 가윤 씨 괜찮아?
“저 제보할 게 있는데요.”
-어, 어. 말해. 말해 봐. 무슨 일인데.
연예 뉴스에서 악독하기로 정평이 난 기자였다. 자신을 꾀어내는 악마의 목소리처럼 들렸지만 가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돈이라도 한발 빨리 건져야 했다.
“사진 하나 팔게요.”
* * *
집안이 뒤집힌 건 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안간 시작된 소문은 좀 더 극적이고, 지저분한 루머로 번지기 시작했다. ‘문제의 동거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파다했다. 그 ‘문제의 동거녀’가 사내에서는 은연중에 ‘대원 프린세스’ 따위로 불리고 있다는 소문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스포츠 기사까지 당도했다.
재이의 구체적인 신상은 아직이었지만 대략적인 정보는 이미 퍼지는 중이었다. 해준보다 어린 그 여자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함께했고 집안 식구들 모두 알고 있는 사이다.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는데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냐, 알고도 가윤과 결혼을 진행할 수 있는 거냐.
“저기, 소문은 어떻게 되는 중이에요?”
“신경 쓰지 마. 곧 가라앉을 거야.”
해준이 가장 먼저 했던 건 재이에게 모든 뉴스를 접촉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해준은 되도록 관련 소식을 보지 말라는 말과 함께 카페 출근도 중단시켰다. 그의 말이 곧 법이었던 재이는 쉽게 수긍하며 휴대폰을 피했다. 대신 해준은 입사 전 필요한 공부를 조금 혹독하리만치 주문했다.
“공부는 어디까지 했어?”
“아. 여기서부터……. 제가 찾아본 게…… 잠시만요….”
재이가 방에서 자신이 공부한 걸 허겁지겁 꺼내어 보였다. 행복한 연말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공부에 매진 중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 당연히 환영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남지 않은 기간과 전문적인 내용에 애를 먹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사실은 잘 이해가 안 되어서.”
“정 힘들면 권 팀장을 붙여 줄까? 이미 다 숙지한 모양이던데.”
“그래도 될까요?”
“아까 사무실에서 심심하다고 하던데. 집 앞으로 오라고 할 테니 잠깐 갔다 와.”
그의 말에 재이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내내 집에서 내리 공부만 했더니 좀이 쑤시던 차였다. 재이는 미리 아파트 내에 있는 라운지 카페로 가서 권 팀장을 기다렸다.
며칠 전에 터졌던 결혼 기사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모자에다 마스크까지 꽁꽁 싸맨 상태였다. ‘너무 자의식 과잉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라도 하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해준의 태평한 반응대로 기사는 점점 사그라들고 있는지 자신을 힐끔거린다거나 아는 체하는 사람은 없었다. 재이는 조용히 빨대로 커피를 마시며 권 팀장을 기다렸다. 그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옆 테이블 손님들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야 대박! 이거 봤어?”
“와 씨. 완전 난 년이네 이거.”
“그럼 뭐야? 양다리 걸친 거야?”
“미친 진짜 뻔뻔하다. 유해준이랑은 결혼하고 사촌이랑은 섹파인 거 아니야?”
가까운 거리 탓에 별생각 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재이가 ‘유해준’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흠칫 놀랐다. 사촌이라면 유윤재를 말하는 건가? 불길한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 더러워.”
확인도 하기 전이지만 날카로운 말이 칼이 되어 재이의 등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