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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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윤은 골머리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잘 풀리려던 인생이 코앞에서 엎어졌을 때의 심정이란. 차라리 가망도 없었다면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것이다.

대원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꿈같은 소리라기엔 자신은 유 회장의 생일잔치에도 갔을 만큼 유력한 후보였다. 가윤은 끊임없이 파혼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복기하며 문제점을 찾았다. 이미 다 끝나 버렸지만, 좀처럼 미련은 떨쳐지지 않았다.

아쉬운 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방송 국장인 부친은 무리해서 시집보내지 않겠다며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파혼 소식을 알리자마자 발칵 뒤집어졌다.

“너 지금 장난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결해 놔!”

“……당사자가 싫다는데 내가 뭘 어떡해요.”

“그럼 넌 당사자가 아니야? 어! 쪽팔린 줄 알아야지! 회사 망신은 망신 대로 다 시켜 놓고 싫다 그러면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나?”

해준 때문에 큰 위기를 넘긴 부친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지만 가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 회장에게 연락했을 때는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았고, 대신 비서 실장이 답했다.

-해준 본부장님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회사를 오래 비우고 계십니다.

“아…… 그럼 뭐 만나 보는 건 힘들다는 이야긴가요? 잠깐이라도 되는데. 부탁드릴게요.”

-저희도 못 뵌 지 오래라서요.

“그럼. 회장님도 소식 듣고 놀라셨을 텐데 제가 가서 설명이라도 해 드리면…….”

-아니요. 괜찮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업무로 경황이 없으십니다. 마음 잘 추스르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무적인 위로를 듣는 순간 손에서 진땀이 났다. 사면초가였다. 어느새 파혼 소식이 정재계에 며칠 사이에 퍼져 버렸고, 대원에서 자신을 내팽개쳤다며 비웃었다. 그간 해준에게 갖은 푸대접을 받았던 가윤도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억하심정만 커져 결국 유윤재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다.

“저 정가윤이라고 해준 씨 약혼녀였던 사람이에요. 접때 회장님이랑 식사하는데 들르셨잖아요. 기억나시죠?”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최근 그녀는 유윤재와의 접촉 이후 극심한 후회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겪어야 했다.

첫인상이나 묻어 나오는 행동을 보아 윤재가 해준과는 다르다는 걸 눈치챈 지 오래였지만 행실이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에 비해 몹시 불성실한 태도로 거래에 임했다.

그제야 가윤은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했다. 이대로 자신이 물러나면 윤재는 이 제안으로도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것이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아니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 말고, 둘이 무슨 말을 한 녹취라든지, 멀리서 찍은 사진 같은 건 없냐구요.”

“그건 그거고. 선금이 필요한데.”

윤재는 태연하게 수시로 돈을 요구했다. 가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이미 집안에서는 해준과의 만남에 수준을 맞추기 위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등등 큰 지출을 감당해야 했다.

“무슨 선금이요. 맨날 돈 이야기만 명확하네요?”

“싫음 말고. 나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니까. 근데 녹음기도 없고 카메라도 없는데 못 믿겠다고 하면 어떡해. 나도 뭐 장비 살 돈은 있어야지.”

이제 더 물러날 데가 없다. 아버지가 이런 상황을 알면 자신을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가윤을 궁지에 몰았다. 그녀가 탁한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고 물었다.

“……하. 얼마 필요한데요.”

“일단 500 쏴 줘요.”

“…….”

가윤은 윤재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잘못 걸렸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다 휴대폰으로 윤재에게 계좌 이체를 해 주었다. 윤재는 휴대폰 입금 알람을 보고 반색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남은 건 밥이나 사 먹을게.”

“올해 끝날 때까진 확실히 매듭지어요.”

이 집안 남자들은 죄다 지긋지긋하다. 이 상황 자체에 신물이 나 버린 가윤이 한숨을 푹 쉬었다. 쉽게 진행될 줄 알았던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너무 그렇게 사람 몰아세우진 말고. 고마우니까 내가 재미있는 거 말해 줄까?”

“뭔데요.”

“재이가 나를 꽤 좋아하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양다리 걸치고 있단 소리예요?”

윤재의 눈빛이 반짝였다.

“본인한테 물어봐요. 얼마 전에 나랑 키스했는지 안 했는지.”

순간 둘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가윤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인지 의심하면서도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거 진심이에요? 아니.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럼.”

“……못 믿겠는데.”

“맘대로 해석해요. 당신은 마음 없는 남자와 키스 막 하고 다닐 수 있다면 양다린 아니겠지.”

윤재가 휴대폰에 사진을 띄운 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윤재와 재이가 입을 맞추는 사진이었다. 재이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가 노트북으로 촬영한 동영상 캡쳐본이었다. 윤재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사진 팔게요. 1억 원.”

* * *

크리스마스, 재이는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을 지내고 있었다. 해준에게 반지를 받았지만 끼고 다니는 것도 아까워 집에 고이 모셔 둔 채 나왔다. 해준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타고 이동해도 어쩐지 꿈을 꾸는 듯했다.

그간 겪어 온 맘고생은 지독하게 아프고 힘들었지만 막상 애틋한 고백을 받자 모든 게 이 순간을 위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저씨. 나 사랑해요?”

“그럼.”

재이는 운전하는 해준의 옆에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재차 물었다.

“얼마나요?”

“많이.”

“어떻게?”

“어떻게라니.”

“아니, 나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거 아니죠?”

“그럼.”

식사를 하고 나온 둘 사이에서 여전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재이는 해준이 운전하는 내내 유치한 질문들을 참지 못하고 쏟아 낼 만큼 상기되어 있었다.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어도 들어도, 더 듣고 싶었다. 해준 앞에서 좌절해 왔던 자신의 마음에, 말라 버린 화초 같던 둘 사이에 다시 비가 내렸다.

해준의 차량이 역세권 빌딩 숲으로 들어갔다. 재이는 어련히 자신을 좋은 곳에 데려다줄 거라 생각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건물 앞에 주차한 해준이 차의 시동을 끄며 말했다.

“내리자. 잠깐 들를 데가 있어.”

“여기요?”

재이가 더 물어보기도 전에 해준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차에서 내렸다. 당황한 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따라 내렸다.

“어디 가요?”

“올라가자.”

그는 뭘 하고 싶은 건지 선뜻 행선지를 낱낱이 밝히지 않았다. 재이는 보폭이 훨씬 큰 해준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그는 건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널찍하고, 사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휑한 사무실에선 새 가구 냄새가 났다.

해준의 선물은 끝나지 않았다. 재이에게 가장 특별한 선물을 해 줄 생각이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따라 들어온 재이에게 말했다.

“항상 일하고 싶어 했잖아. 새로 회사 냈으니까 카페 그만둬.”

“예?”

“대표 이사는 아버지 이름으로 해 놓을 거고, 나는 고문으로 이름만 들어가 있을 거야.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일해.”

재이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머릿속에 대원의 후계자란 이유로 순응해야 했던 유 회장의 불같은 모습이 스쳐 갔다.

해준에게 대원 외에 다른 회사를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건 해준에게도, 재이에게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 해준은 재이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격려했다.

“너는 여기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 * *

해준은 재이에게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과보호라며 손가락질 당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재이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자체를 꺼려 했다. 정신병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재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영향력을 펼칠 수 있게, 어떤 곳이든 그의 입김이 들어가도록 죽도록 일했다. 무정한 세상에서 아이를 지키는 방법은 자신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노력을 투입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한 일도 있는 법이다. 여전히 유 회장의 밑에서 그 압박을 감내해야 할 사람은 자신 하나면 충분했다. 재이만큼은 자신의 영역에서 편안히 자유로웠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재이는 적잖이 기뻐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결국 자신은 대원으로 돌아갈 것이고, 유 회장은 그가 회사에 집중하고 온전히 자신의 손 아래에 있는 걸 원할 테니 새로운 회사를 싫어할 게 당연했다. 하지만 해준은 그마저도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을 열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권승수 팀장이었다.

“……권 비서님!”

“재이 씨. 잘 지냈죠?”

재이가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거듭 놀랐다. 해준이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일을 같이 도와줄 팀장님이야. 이제 재이 상사가 되겠네.”

“아니 대원은…….”

권 팀장이 성격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너스레 떨었다.

“더 좋은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이직했습니다. 상사가 똑같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기긴 했지만요.”

권 팀장도 해준만큼이나 대원에 뼈를 묻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비서실에서 재직하며 둘의 유학 시절 뒷바라지를 도왔다. 그만큼 해준을 잘 알기에 이직이라는 파격적인 결정을 망설이지 않고 내렸다.

서로를 아주 잘 아는 셋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가족만큼이나 진한 유대감과 결속감으로 묶일 예정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돌아가는 차에서 재이는 권 팀장이 챙겨 준 회사 관련 자료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신을 위해 회사를 차려 주었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회사가 커지면 결국 해준에게 든든한 보험이 될 것이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카페를 어떻게 그만둬야 할지도 생각해야 했지만, 당장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막연한 걱정도 들었다. 재이가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엔 어렵고 나중에 할 만하고. 일이란 게 다 그런 거야.”

재이의 걱정과 별개로 해준은 별거 아니란 듯 재이를 덤덤히 안심시켰다. 재이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 시내 한가운데에 세워진 대형 전광판에서 뉴스 헤드라인과 짤막한 영상이 틀어지는 중이었다. 재이가 눈을 크게 뜨고 숨죽였다.

[대원 그룹 후계자……유해준 결혼설 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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