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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자리를 비운 해준 때문에 대원은 발칵 뒤집혔다. 그를 통해 좌지우지되던 대부분의 업무는 갈피를 쉽게 잡지 못했다. 설마 했던 유 회장은 후계자의 자리도 마다하는 손자 덕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놈은 회사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거야!”
“회장님 진정하시고…… 제가 자택으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차마 권 비서를 복직시키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유 회장은 손자가 어련히 양보해 주길 바랐지만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비서 실장이 달라붙어 여러 차례 회유해도 해준의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안 갑니다.”
“본부장님. 그러지 마시고…….”
“안 간다고 했어요. 누가 본부장이야. 퇴사 처리하세요.”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유해준이 없다면 누가 회사를 물려받는다는 말인가. 비서 실장은 그때마다 나라 잃은 얼굴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해준은 대원으로 출근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얻은 휴가였지만 일을 쉴 수 없는 것은 그의 천성이기도 했다. 오히려 시간이 남을 때는 어색한 기분까지 느꼈기에, 그는 출근하지 않는 날도 하루를 일거리로 꽉 채웠다.
하지만 해준은 일을 하면 할수록 권 비서의 부재를 강하게 느꼈다. 자신의 손발이자 본인을 잘 아는 오랜 파트너였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이른 아침, 그는 직접 해남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십니까.”
해준이 해남의 작은 촌 동네에 있는 단독 주택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권 비서가 낯선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어 보였다.
“……본부장님.”
천하의 유해준이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해준에겐 수도권과 외국이 시골보다 더 익숙한 사람인 걸 잘 알았기에 더욱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권 비서가 어안이 벙벙한 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때 해준이 피식 웃었다. 이에 정신을 차린 권 비서가 화들짝 놀라 해준을 안으로 들였다.
해준이 드디어 권 비서와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권 비서는 쩔쩔매면서도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귀농하자더니. 폼이 영 아닌걸. 그래도 얼굴은 폈네.”
“항상 일에 쫓겨 살았는데 여긴 겨울철이라 일이 없으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알지?”
“하하……. 그런데 바쁘신 분이 여기까진 어떻게.”
해준이 곧장 용건을 밝혔다.
“미안하지만 이만 나랑 함께 서울로 가 줘야겠어.”
대원의 후계자가 자신을 찾아 여기까지 와 준 걸로도 감격스러웠지만 권 비서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신 건 너무 고맙고 황송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유 회장님께서…….”
해준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쫓겨나다시피 잘렸다. 비서 실장은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고만 밝혔으나 그 출처는 뻔했다. 유 회장이 드디어 해준에게 경고가 아닌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지만, 마지막에는 그 대상이 안재이일 것이다. 이마저도 유달리 아껴 왔던 손자의 수족이기에 곱게 내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간 대원 그룹에서 유 회장의 잔혹함을 봐 왔던 권 비서는 말끔하게 도망치듯 대원을 떠나야 했다. 보란 듯이 자신을 내쫓았는데, 어떻게 다시 기어 들어간단 말인가.
이러한 권 비서의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준은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야. 노친네는 이제 보내 주자고.”
“……예?”
“내가 보내 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이젠 회장님 말고 진짜 내 밑에서 일해.”
해준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권 비서에게 서류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어 건넸다.
“고용 계약서와 새로운 회사 자료야.”
새로운 업무, 새로운 직책, 혁신적인 연봉. 익숙한 상사. 권 비서는 그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해준이 건네준 것을 짧게 살펴본 권 비서가 물었다.
“혹시 이 모든 게 재이 씨 때문인가요?”
해준은 권 비서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굳이 수긍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행동의 이유는 여전히 재이였으니까. 그렇게 둘의 관계는 다시 시작되었다.
* * *
권 비서는 ‘권승수 팀장’으로 서울에 복귀했다. 하지만 해준이 대원에 복귀하기 전까지 비서의 역할을 도맡아 하는 것도 여전했다. 해준을 모신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그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해준이 새로운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권승수를 불렀다.
“그리고 권 비서, 아니. 권 팀장. 재이랑 윤재에 관해서 좀 알아봐 봐.”
“구체적으로 원하는 자료라도 있을까요?”
“12월 중순쯤의 자료 싹 다. 특히 이날.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해.”
해준이 달력에 가리킨 ‘이날’은 재이가 나쁜 짓을 하고 왔다고 했던 때였다. 해준의 지시에 권승수는 이럴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응수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위험한 일도, 가벼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사 착수 전에 복도 쪽에 CCTV 설치해 놓았습니다. 따로 커튼 같은 거로 가려지지 않았다면 내부 상황이 보일 것 같습니다.”
“바로 진행해.”
깍듯하게 인사하고 제 방을 나서는 권 팀장을 보며 해준은 안도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해준의 기대처럼 이번에도 권 팀장은 자신의 몫을 훌륭히 해내었다. 다만 표정이 심상치 않긴 했지만.
“저, 본, 아니, 대표님.”
아침 일찍부터 나온 권 팀장의 얼굴을 본 해준이 출근 후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죽다 살아온 사람처럼.”
“전에 말씀해 주신 자료인데. 한번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경직된 말투. 서둘러 자료를 주고 나가려는 권 팀장의 모습에서 좋지 않은 예감을 한 해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디가. 거기 서.”
아니나 다를까 권 팀장은 뻣뻣하게 해준의 데스크 앞에 섰다. 해준이 서류와 사진을 뒤지며 살펴보다 물었다.
“……이게 다야?”
“예. 이전으로도, 이후로도 특별한 건 없습니다. usb 파일에 해당 동영상 있으니 필요하시면…….”
권 팀장이 제출한 사진에는 재이와 윤재가 입을 맞추다 떨어지는 장면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해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오케이. 하던 업무 마저 봐.”
“…….”
처음 CCTV영상을 보았을 때, 권 팀장은 해준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그가 재이의 일이라면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기에 예측하기 힘들었다. 생각보다 덤덤해 보이는 모습은 본심을 어느 정도 숨기고 있겠지만 예상보다 차분한 모습에 다소 놀랐다. 사무실이 발칵 뒤집히는 것도 감수하고 있던 권 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미 알고 있었어.”
물론 그게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다.
상상만 해 온 장면을 사진으로라도 목도한다는 건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해준은 권 팀장이 돌아가고도 사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른 업무를 볼 때도, 미팅을 할 때도, 퇴근을 해서도.
그의 속에서 무언가 끓는 듯 아플 정도로 화가 났다. 자신이 재이를 얼마나 싸고도는지 알고도 재이와 그런 짓을 한 윤재를 가만두고 싶지 않았고, 당시 재이를 그렇게까지 괴롭게 만든 스스로도 쉽게 용서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윤재가 보란 듯 자신에게 엿을 먹였다.
“너 혼자 어디 다른 세상 사냐. 형 파혼한 건 아는 거지?”
순간 해준은 윤재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가까스로 참았지만, 재이가 없었다면 충분히 실행에 옮겼을 법했다. 머리가 열감으로 멍해졌다. 그리고 재이는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안됐네요. 잘 어울렸는데.”
하필 그런 사진을 보고 온 해준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이만 집으로 가는 게 좋겠군.”
해준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윤재도, 재이도 압박감에 짓눌리는 듯 숨죽였다. 그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한번 그 모습을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차분하고 단정하던 모습은 착각이었다는 듯 그 휘장을 걷어 내고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의 짙은 동공에서는 안광이 번뜩였다. 유 회장이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 * *
해준은 집으로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지만 오히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 같았다. 그가 안에서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재이는 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난 건지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당황스러웠으나 쉽게 자극하지 않으려 묵묵히 가게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했다.
현관문 앞에서도 해준은 문을 열어 주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이는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며 아무렇지 않은 듯 외투를 소파에 벗어 놓았다. 해준이 자신의 코트를 의자에 걸어 놓는 걸 보며 재이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저랑 이야기 좀 해요.”
“…….”
하지만 해준은 뭔갈 생각하는 듯 선뜻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 분위기를 보아 절대로 좋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큰 실수를 한 걸까. 사실 나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고 해명하고 싶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재이가 다시 입을 뗐다.
“아저씨. 이야기 좀.”
“아니. 그건 나중이야.”
해준이 성큼성큼 다가와 양손으로 재이의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했다. 아주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
고작 잔소리가 다일 줄 알았던 재이는 크게 놀라 그의 팔을 어설프게 잡은 채 뒷걸음질 쳤으나 해준이 그보다 가까이 밀착했다. 이리저리 정처 없이 이동하는 재이의 등이 벽에 붙었다 떨어지고, 다리가 소파에 닿아 엉겁결에 주저앉았다.
“아……! 잠, 깐만.”
평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에 재이가 황급히 그를 불렀으나 해준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파고드는 키스에 재이는 여태까지 했던 키스는 그가 철저히 자신을 배려한 것임을 깨달았다.
거칠게 파헤치는 듯한 키스였다. 아니 그 긴장감과 농밀함은 애무에 가깝게 느껴졌다. 급작스러운 몰아침은 재이의 체온마저 높였다. 몸과 숨이 절로 뜨거워졌다.
무섭도록 단정하고 치밀한 남자가 짐승처럼 자신을 파고들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몰라야 하는 모습이었다. 재이는 굴복하듯 일말의 경계심마저 허물어 버리고 그의 혀를 힘겹게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