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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는 여자를 처음 본 그 순간이 또렷했다. 육아에 지치고, 시간 강사 생활에 쫓겨 핼쑥하고 건조한 느낌의 여자. 강의 시간보다 일찍 들어오고도 분주하게 수업을 준비하던 모습은 자신에게 내어 줄 빈틈 따윈 없어 보였다.

오후에 있는 강의였지만 여전히 전날 숙취에 시달리던 윤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단상 앞을 쳐다봤다.

“야. 네 와이프 저기 있네.”

“어디?”

“미쳤냐. 줘도 안 먹게 생겼다.”

옆에서 동기들이 낄낄거렸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그 여자에게 향했다. 여자는 마른 입술에 질끈 묶은 머리가 삐져나온 채였다. 그게 매력적이라기보다는 거슬려서 눈길이 갔다.

“야. 저런 여자들이 바람은 또 엄청 피워요.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왜 안 좋아?”

“너 같음 저 얼굴 보고 좋겠냐? 집에 가면 무슨 해골바가지가 화장 지우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 바람 못 피우게 생겼어. 그냥 목석처럼 생김.”

동기들의 짓궂고 질 떨어지는 대화는 내기로 이어졌다.

“내기할래?”

“그걸 뭘 어떻게 내기해.”

동기 중 하나가 팔꿈치로 윤재의 옆구리를 치며 눈짓했다.

“윤재가 여자 꼬시는 데는 도가 텄잖아.”

모두의 시선이 유윤재에게 쏠렸다. 그를 툭툭 건드린 동기가 윤재에게 넌지시 물었다.

“윤재. 데이트하는 데 100만 원 빵?”

윤재는 턱을 괴고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300만 원 빵.”

남는 건 돈과 시간과 에너지밖에 없는 무리였다. 다 어딜 가도 떨어지지 않는 집안의 한량 자제들이었으니 돈으로 유희거리를 사는 데 아낌이 없었을 뿐.

“좋아.”

마침 술집에서 결제한 금액으로 유 회장에게 카드를 회수당한 윤재는 용돈을 번다는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그게 둘의 시작이었다.

“저기 교수님.”

“응?”

“중간고사 성적 관련해서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요.”

“성적 정정 기간은 끝나지 않았니?”

여자는 윤재의 예상처럼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했으며,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의 오기를 부추겼다.

시간이 지나 유윤재는 ‘300만 원’이란 목적을 잊고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집착하게 되었다.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있다는 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신에게 아주 관심이 없어 보이진 않으면서도 끝끝내 넘어오지 않는 여자를 보며 그는 오히려 더욱 마음이 갔다. 자신과 친구들에게 없는 면모가 특별하게 느껴졌으니까.

“……너 정말 사람 곤란하게 왜 이러니.”

“사랑한다고요, 교수님.”

그리고 어느새 그녀에게 스며들어 버린 자신을 느꼈을 때는 ‘비정상’으로 살아온 자신의 이상형답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이 있어도, 애가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삶에 몹시 지쳐 있었고 윤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면 훨씬 행복할 거라 믿었다. 자신이 도와줄 거라고. 이 뻣뻣한 여자는 본인이 원하는 것마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윤재의 존재를 알게 된 남편이 분개하며 여자와 아이를 미국으로 보내 버렸고, 헤어지겠노라 거리를 두기까지 했다. 평소에도 남편과 크고 작은 불화가 끊이지 않던 여자가 자신에게 흔들린 몇 안 되는 시기였다. 윤재와 여자는 다시 미국에서 만나 몇 번의 데이트 같은 만남을 이어 나갔다.

“남편이랑 헤어져요. 맞고 살면서 뭐가 좋다고 있어요.”

여자는 상처를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나와서도 헤어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들은 어쩌고. 안 된다고 했어. 너도 얼른 정신 차려.”

“애들이 인생 살아 주나. 내가 잘 키울 수 있어요.”

“가족을 책임지기엔 넌 너무 어려서 안 돼.”

그때 윤재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윤재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납득하려 노력했다. 그러면 이렇게만 가까이 있자며 거리를 좁히는 방법밖엔 없었다. 윤재에게는 자신 있는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남편에게 발각되었고 둘은 또다시 외국으로 헤어져야 했다.

몸이 떨어지고, 정착하지 못해 방탕한 생활을 이어 가면서도 여자와 재회할 날을 기다리던 나날이었다. 윤재는 대학은 졸업하지 못했으나 그만한 나이가 되자 여자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나랑 살자고요.”

“……이러지 마. 얼른 돌아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예상과 달리 여자는 다시 한번 자신을 밀어냈다. 전보다 훨씬 차가운 태도였다.

“그런 새끼랑 그만 살아요. 나보고 엉망이라더니. 남편은 왜 데리고 사는 거예요.”

“가라고……!”

윤재는 도대체 문제 덩어리인 남편과는 잘만 살면서 자신은 왜 안 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의 의견이니 납득할 수밖에.

잊을 만하면 그녀를 찾아가 ‘남편은 되는데 자신은 왜 안 되는 거냐’고 따져 물었지만 여자는 특별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도대체 어쩌려고 자꾸 찾아오는 거야. 너 심지어 아무거도 준비된 게 없잖아.”

“나 이제 돈 벌 나이도 됐어요. 정착할 수 있다고요.”

“정착 준비를 왜 내가 너와 함께 해야 하니. 모아 둔 돈은 있어?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은 해?”

누군가보다 항상 못했던 인생. 그게 유윤재의 오기에 불을 지폈고, 해준과 비교당해 온 그의 해묵은 자격지심을 자극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 버렸고, 윤재는 이제 본인이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 것인지, 습관처럼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호해져 버렸지만 놓칠 수 없었다.

“나이 충분히 찼고. 이제 돈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아니…… 하. 일단 벌고 말해. 네 힘으로 번 돈.”

여자는 쌀쌀맞게 말했다. 평생 할아버지의 돈만 받아 써 온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잠시 침묵에 잠긴 윤재가 입을 뗐다.

“둘째 내 딸이죠? 나랑 판박이잖아. 남편이 안 물어봐요?”

“…….”

“성격상 가만히 안 있을 텐데. 개 패듯이 패고 그러겠죠.”

“유윤재. 돌아가.”

“돈 벌어 올게요. 기다려요.”

그의 유일한 목표는 그 여자였고, 냉정한 그녀의 인정은 자신의 회생 가능성을 말하는 것일 테니. 물론 자신을 정착시키고, 바르게 인도해 줄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모두가 정신 차리라고 손가락질해도 윤재는 그렇게 믿었다.

[간단한 일 하나 해 보지 않겠어?]

그때쯤, 유 회장에게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건너올 수 있겠냐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재이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해준과 간신히 이어진 지금, 조금의 실수도 하기 싫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전이나 지금이나 특별했기에 홧김에 한 입맞춤으로 곡해되지 않길 바랐다. 결국 카페를 자연스럽게 그만둘 만한 적당한 타이밍을 보기로 했다.

해준과 입맞춤 후 곧장 달뜬 밤을 지새고 다음 날 카페로 출근했지만 지루하고 긴장된 시간이 이어졌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윤재가 그녀에게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남자의 태도로 느껴지진 않았다.

“너 진짜 이럴 거야. 맨날 도망칠 생각만 하고. 서운하다?”

윤재는 종종 서운한 듯 말했으나 거기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이의 의구심은 커졌다. 왜 나를 잡아 두려 하는 걸까.

“도망치긴 뭘 도망쳐.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

“아이, 담배나 피우고 와야지.”

토라진 척 가게를 나가는 윤재를 보며 재이가 고개를 저었다. 퇴근 시간이 임박했다. 커피나 마실까 하며 간이 서랍장에서 커피포트를 꺼내던 참이었다. 서랍장을 여는 동시에 드르륵거리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뭐야.”

재이가 구석에 던져진 낯선 휴대폰을 발견했다. 문자가 온 듯 화면에는 미리 보기 창으로 짧은 내용이 보였다.

[정가윤

그런 거로는 터무니없고요, 전에 말했던 것처럼 둘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결정적인…….]

“정가윤……?”

정가윤이라니. 게다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유윤재가 정가윤과 연락할 만한 이유가 있었나. 저번에 잠깐 회장님이 계시던 식사 자리에서 얼굴을 튼 게 다였을 텐데. 아직 파혼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재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둘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결정적인…….

둘의 관계라니. 누구의 관계를 말하는 걸까, 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과 해준을 말하는 것이라는 추측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이라면 왜 자신과 해준의 사이를 캐려고 하는 걸까? 그의 흠을 잡으려고?

그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재이가 제풀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윤재가 재이를 데리러 온 해준과 대화하며 함께 들어왔다. 재이가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인사했다.

“오, 오셨어요.”

해준은 재이에게 눈짓으로 인사했고, 윤재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 나갔다.

“형, 그래서 언제까지 쉬게?”

“쉴 만큼 쉴 거야.”

“회장님 속 뒤집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쉰다니? 재이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해준은 자신에게 업무를 줄여 한동안 일찍 퇴근할 거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대부분의 시간을 여전히 집 밖에서 보내는 중이었다. 재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휴가 내게요?”

재이의 질문에 유윤재가 되레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휴가. 형 설마 얘 아무거도 몰라?”

재이는 얼굴에서 황당함이 숨겨지지 않았다. 자신을 속이고 여태 하루 종일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던 걸까. 혼란스러운 재이의 마음을 모른 채 해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중에 설명할게.”

“너 혼자 어디 다른 세상 사냐. 형 파혼한 건 아는 거지?”

“예?”

재이가 퍼뜩 고개를 돌려 해준을 바라봤다. 해준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재이가 처음 느낀 건 강한 배신감이었다. 여태 숨긴 건가? 도대체 언제? 왜 나만 모르고 있던 거였어?

재이의 얼굴이 붉어지며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해준에게 왜 말하지 않았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순간 아까 봤던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둘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결정적인…….

유윤재와 정가윤은 해준과 자신을 데리고 뭘 하고 싶은 걸까? 재이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와중에도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윤재의 시선이 느껴졌다.

“……안됐네요. 잘 어울렸는데.”

재이가 입술을 떨며 간신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해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해준이 말했다.

“이만 집으로 가는 게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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