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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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재는 자신의 그늘 같은 놈이었다. 돌아보면 자신의 곁에 따라붙어 있는 놈.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놈.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자신의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더 흘깃거리는 놈.

실제로 해준을 좋아했던 여자들과 작게는 교류를, 크게는 관계나 애인 사이가 되는 걸 종종 보았다. 그럴 때마다 오래가거나 유의미한 관계가 되진 못했지만 윤재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다.

“형, 나 전에 형 따라다니던 여자 있잖아. 유정이.”

“유정이?”

“어, 그 숏컷 하고 키 크고.”

“누구지.”

“……아무튼 나 걔랑 만나.”

“축하해.”

물론 해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식이었으며, 나아가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무관했지만 윤재는 그럴 때마다 매번 해준에게 소식을 알렸다.

유윤재가 한국에 들어오고, 재이와 얼굴을 트고,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해준은 이런 장면을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니, 남자로서 좋다고.”

또 시작이었다. 그러나 전과는 달랐던 건 그 상대가 재이였다는 것.

“나 너 좋아한다고. 네가 필요해.”

재이와 윤재는 입을 맞출 정도로 이성적인 교류가 오고 가고 있었고, 최근 자신은 재이에게 의도를 떠나 너무나 막대한 마음고생을 시켜 왔다. 카페 운영과 같은 장사가 적성과 맞지 않음을 알고 있는데 카페를 그만두라고 권유해도 더 해 보겠다던 모습이 퍼즐처럼 연결되는 듯했다.

그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여태 재이가 ‘자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관없냐.’고 물었을 때 보인 무정한 반응이 후회스러웠다. 상상과 현실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

재이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윤재를 쳐다보았다. 저 입술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까.

해준은 재이의 모든 반응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지만 차마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며 겸허히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따 오지.”

“아저씨 잠깐만요, 아저씨!”

결국 결론이 난 후 조금 이따 오자며 돌아서던 참이었다. 재이가 헐레벌떡 자신을 쫓아 나왔다.

“아저씨 그런 게 아니라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해준은 침착을 찾고 재이를 대했다.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어떤 대답을 해도 괜찮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괜찮다는 말이야.”

해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재이의 표정이 돌변하여 싸늘해졌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해준에 비해 얼굴에 혼돈과 배신감이 넘실거렸다.

“……내가 유윤재랑 만나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그럴 리가. 듣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해지는 말에 해준이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이며 대꾸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어떤 대답을 하든 걔에게서 널 떨어트려 놓을 거라고.”

“…….”

해준의 말에는 강인한 의지와 위압감이 느껴졌다. 남들에게는 매사에 이런 모습이라지만 자신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모습에 재이가 놀라 흠칫거렸다. 해준이 단언했다.

“나는 그 새끼를 잘 알아. 절대로 너와 만나게 두지도 집적대게 손 놓고 있지도 않을 거다.”

그때 안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윤재가 이야기가 길어지자 가게 문을 열어 보았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해준이 오다니.

“둘이 뭐 중요한 이야기야?”

해준이 윤재와 눈이 마주쳤다. 해준은 속을 읽을 수 없는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흔들림 없이 분명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려 해도 소용없을 거다. 윤재는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해준이 자세를 바로 하고는 재이에게 가게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여유롭게 말했다.

“이야기 마저 하고 와.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해준이 재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차에 올라탔다.

* * *

해준의 태도는 윤재를 약 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얄밉다 못해 열이 받을 정도였다.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자신은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저럴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조급해졌다.

가윤은 이러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그 전에 쓸 만한 정보를 넘겨야 하는데 저런 우유부단한 반응이라니. 분명 무언가 있는 거 같은데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재이는 다시 윤재를 따라 들어와 두서없이 본인의 짐을 챙기며 말했다.

“저기, 나 갈게.”

“대답은 해 주고 가야지.”

“무슨 대답?”

“그래도. 내가 너 좋다고까지 했는데.”

재이는 윤재의 말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특별한 이성적 긴장감이 유지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날 밤의 실수같던 키스도 엉망진창이었다. 합이 맞지 않고 끝엔 불쾌하기까지 했던 걸 윤재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막무가내로 나올 이유가 없는데, 왜 이러는 걸까.

“……미안해. 그리고 직원도 다른 사람 찾는 게 좋을 거 같아.”

“형 때문에 그래?”

“말했잖아. 난 원래 취업 준비했고 아저씨 때문에 그런 거도 있다고.”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 그러는 걸까. 해준을 언급하는 윤재에게 조금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해 재이야.”

“뭐가?”

“형은 나 싫어해. 맨날 사고만 치고 다니니까 그건 나도 알아. 근데 넌 아저씨가 우리 키스하고 그런 거 알아도 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이가 짐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시선만 올려 윤재를 올려다보았다. 윤재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길 계속했다.

“내가 뭐 나랑 결혼을 하자고 그랬냐. 조금만 같이 있어 달라는 거잖아.”

절대로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재이가 가게 밖을 힐끔거리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너 지금 협박하는 거야?”

“근데 뭐 형이 알면 안 될 거라도 있어? 우리 성인이잖아.”

“나 아저씨 좋아해.”

“형은? 형은 누가 본인 좋아하는 거 신경 안 써.”

“내가 신경 쓰인다고.”

그냥 누구나 다른 사람과 스킨십 한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도는 걸 싫어하지 않나. 남들이라면 그러려니 넘어갈 법한 것도 윤재는 자꾸 발목을 잡는다. 재이는 이야기가 자꾸 이상한 데로 튄다고 느낄 즘이었다. 윤재가 은근하게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인데?”

* * *

해준은 차에서 비서 실장이 보내 놓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본부장님 일단 연차 모두 소진해 놓을 예정입니다. 휴식이 필요하시다면 앞서 말씀드린 날까지 복귀하시면 됩니다.]

[회장님이 아주 많이 걱정하십니다. 다시 재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이 화가 나신 것 압니다. 회장님도 권 비서의 복직을 고려해 보신다고 하니 최대한 이른 복귀 부탁드립니다.]

메시지엔 하나같이 갖은 회유와 걱정이 담겼다.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권 비서를 마음대로 해고시킨 일로 유 회장의 별장에 간 날, 대원의 배지가 달린 재킷을 벗어던지고 나온 이후 한 번도 회사에 복귀하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하고도 강한 결의를 보인 지 3일째가 되어 가는 중이다.

어떤 직원보다 중요한 일을 많이 떠안고 살던 해준의 부재는 회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회사의 굵직한 일을 모두 멱살 잡고 끌고 가던 그의 능력이 부재로서 재조명되었다.

[본부장님 시간 나실 때 언제든지 전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맘대로 하라던 유 회장도 그의 결근일이 길어지니 무척 초조한 듯했다. 차마 돌아오라는 말을 직접 할 수는 없었는지 비서 실장을 시켜 복귀를 종용하라고 한 듯했다.

“어림도 없지.”

하지만 해준은 영업용 휴대폰을 뒷좌석으로 던져 버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사람 손발을 자르면 그렇게 시키고 싶어 하는 일을 못 한다는 걸 아셔야지. 무엇이든 조심해야 할 노령에 기함하게 될 유 회장이 안쓰럽긴 했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아쉬운 쪽이 누구인지’ 정할 생각이었다.

“저 왔어요.”

그 와중에 재이가 가게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고생했어. 집에 가자.”

해준은 눈짓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고,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 안심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는 내내 재이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에 비친 재이의 표정을 살폈다. 고민에 빠진 듯한 작은 얼굴 위로 건물의 색색 야경이 지나갔다.

재이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입을 뗐다. 결연한 듯한 말투와 뾰로통한 표정으로 보아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저 물어볼 거 있어요.”

“뭔데.”

“우리 무슨 사이예요?”

해준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조금 의아했으나 이내 윤재가 재이의 마음을 송곳으로 쑤셔 놓은 것임을 눈치챘다. 그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들며 기분이 싱숭생숭했겠지.

하지만 일찍이 확신을 주지 않은 자신의 탓도 제쳐 둘 수는 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재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면 대답이 되려나.”

재이의 태도와 표정이 퍽 귀엽다는 걸 굳이 티 내지 않았다. 해준은 쉽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아져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행동했고, 재이는 더욱 흐려진 얼굴로 되물었다.

“……이게 무슨 뜻인데요?”

해준이 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상처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한결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재이에게 문득 미안함과 애틋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더 놀려 볼까 하던 마음은 쉽게도 꺾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무도 집적거리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그런 해준의 말에도 재이의 안색은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중요한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내키지 않거나 진심이 충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채 고개를 내리고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해준은 재이를 달래듯이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아주 예쁘고 기특한 것을 사랑하듯이 손길에는 다정이 넘쳤다. 그가 말했다.

“아무한테도 내어 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말에 재이의 귀 끝이 붉어졌다. 이제 재이는 일부러 그를 더 보채었다.

“……저는 잘.”

그 순간 해준이 몸을 뻗어 재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재이의 도톰한 입술은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그를 성심껏 받아들였다. 해준은 백 마디 말 대신 도장을 찍듯 집요하게 재이의 입술을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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