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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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재이가 윤재와 키스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배신감보다는 여전히 윤재를 재이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생각이 더 컸다. 윤재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여전히 너무나 많이 저지르며 살았다. 게다가 이미 그 여자와 꾸준히 접촉하면서 재이에게 키스했다는 건 절대로 좋은 의도일 거라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 매번 이런 식으로 뒤에서 손쓰나 보네.”

“그래서 알겠다고 말겠다고. 그것만 말해.”

“말겠다고. 나는 남의 말 안 들어. 알잖아.”

재이를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여겼다면, 자신이 엄포를 놓았을 때 맞서지 않았을 것이다. 윤재는 꾸준한 관계를 기피했으니 굳이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재이에게 흥미가 떨어졌을 거지만…. 해준의 머릿속에 자꾸만 각종 나쁜 가능성들이 맴돌았다.

그는 서재에서 골똘히 고민하다 재이가 방 밖으로 나오는 소리에 그녀를 불렀다.

“재이야. 이리 와.”

“왜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재이가 그에게 다가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이제 카페 정리하고, 다시 인턴 준비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공채를 바로 지원해도 좋고.”

“아.”

“인사부에 따로 뭐 방해될 거 없는지 확인해 놨으니까. 이제 다시 넣어도 돼.”

해준이 재이에게 유 회장이 걸어 놓은 블랙리스트에서 제외된 것을 알렸다. 하지만 그의 예상을 깨고 재이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언제부터요?”

해준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무척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는 일부러 재이의 반응을 보기 위해 가장 빠른 시간을 말했다.

“최대한 빨리. 바로 내게 전해 줘도 돼.”

“…….”

재이는 두려웠다. 함부로 그만둔다고 말했다가 윤재가 그에게 자신과 키스한 사실을 이야기할까 봐.

“원하는 부서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고. 우리 둘이 잘 맞으니 비서실로 들어와도 좋을 거야.”

해준의 말에도 재이는 선뜻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준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카페 일을 좀 더 해 보고 싶어서요.”

해준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언제까지?”

“어. 일단 오픈해 보고. 당분간은 일하려고요.”

“기약 없이?”

“아, 한번 경험해 보구요. 그래야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그는 확실히 재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재이는 미국 유학 중 해준이 자신을 도맡아 책임지고 학교에 보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무척 컸다. 그만큼 부채감도 컸기에 학비 값을 하겠다며 전공을 살리고 자신의 밑에서 일하며 도움이 되고 싶어 해 왔다.

문득 윤재의 말이 떠올랐다.

“걔가 뭐 했는지 말 안 해?”

어느새 둘의 관계가 그토록 깊어진 걸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조금 안심한 채 서재에서 나가는 중이었다.

“윤재 때문에?”

그가 넌지시 물었고, 재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의 나쁜 가설에 불을 지폈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재이야. 솔직히 말해도 돼. 윤재가 혼자 일할 게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정말 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재이는 얼굴까지 붉히며 펄쩍 뛰었지만 해준은 속지 않았다. 그러나 재이의 정확한 마음은 그에게도 의문이었다. 께름칙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일에 제격인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는 권 비서의 부재를 강하게 느끼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래 알겠다.”

간결한 대답에 재이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재를 나섰다.

* * *

[오늘부터 카페 안 나와도 돼.]

윤재는 재이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도로 지웠다. 그냥 이제 새로운 일거리를 물었으니 안녕이라고 하려다 최대한 곁에 오래 잡아 두는 게 이득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윤은 자신에게 해준과 재이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에 대한 제보나 증거를 요구했다. 이걸 재벌 가십으로 보도해 스포츠 잡지에 게재하겠다고. 대원에 직접적인 피해는 가지 않고, 해준은 타격을 입더라도 대체되지 않으니 금방 회복할지라도 재이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염문이나 지저분한 사생활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유 회장이 재이를 절대로 지금처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오빠 뭐 해?”

“어, 일해.”

자신처럼 만취한 여성이 윤재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윤재는 익숙하게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그에게 한두 마디씩 건넸다.

“카페 한다는 거? 그거 언제 오픈하는데? 내가 매상 올려 줄게.”

“그래. 다 같이 가서 많이 팔아 줄게.”

윤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훨씬 더 편하고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아니, 그거 말고 다른 일.”

“무슨 일?”

윤재가 가윤이 제시한 3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있어, 돈 되는 일.”

다음 날, 재이는 평소처럼 가게에 출근했고 윤재도 그녀를 평소처럼 맞았다. 조금 다른 점이라곤 하루 종일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는 것. 오늘은 공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데 윤재는 내내 뭐가 바쁜지 노트북을 붙잡고 살았고, 덕분에 자신도 자격증 공부를 하며 보내긴 했지만 좀이 쑤신 건 어쩔 수 없었다.

해가 진 저녁, 어둑어둑한 가게를 정리하며 재이가 물었다.

“내일도 공사 없어?”

“오픈을 미루려고.”

뜬금없는 말에 재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오픈을 미룬다니. 따로 귀띔해 주거나 상의한 일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사장은 윤재이니 별말은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재이의 표정이 밝아진 건 명분을 가지고 그만둘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아, 그럼 나 언제까지 일하면 돼?

“당분간 지금처럼 나랑 출퇴근해야지. 건물주랑 계약 조율 중이니까 임대 계약 갱신되면 그때 오픈하는 거로 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건물은 다른 사람의 명의였지만 사실상 유 회장의 것이었다. 조율을 하니 마니 할 필요도 없었지만 단순히 시간을 끌어 재이를 오랫동안 앉혀 두기 위한 핑계였다. 아니나 다를까 재이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그게 언젠데?“

“뭐, 봐야 알지. 소송 갈 거란 말도 있고.”

“소송을 한다고?”

“걱정 마. 월급은 계속 챙겨 줄 테니까.”

재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유윤재가 부잣집 놈만 아니었다면 매상도 없는 가게에 월급 챙겨 줄 엄두도 내지 않아 내보냈을 텐데. 재이가 막막한 심정으로 입을 뗐다.

“아니,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왜. 형 신경 쓰여서?”

순간 재이는 그의 질문에 해준이 자신에게 넌지시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윤재 때문에?”

그 질문에는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뜻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윤재와 본인 사이의 어떤 것을 가늠하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재이는 몹시 억울하여 펄쩍 뛰고 싶었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섣불리 해명하지 못했다.

재이는 죽어도 그에게 ‘내가 사실 윤재랑 술 먹고 홧김에 키스를 했는데 집에 와서 아저씨랑은 키스에 섹스까지 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유이든 해준이 자신에게 몹시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재이에게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윤재의 질문에도 비슷한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너 형한테 그렇게 절절매는 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냐고. 재이는 보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도 원래 하려던 일이 있으니까.”

“음. 너 그건 형 때문에 하려는 거잖아.”

“굳이 아저씨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도 공부해 놓은 게 있고.”

“그러니까. 네 성격에 거둬 먹이고 뒷바라지한 게 미안해서 그런 거 아니냐구.”

재이는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럼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잘못된 거냐고. 윤재는 대단한 트집을 잡은 것처럼 집요하게 추궁하듯 말했다. 욱하는 마음에 재이도 조금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아니라고는 못 하지. 아저씨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고, 보답하고 싶은 게 잘못된 거야?”

카페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재이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던 건지 윤재가 내심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나듯 다시 능청맞게 말했다.

“으음. 근데 나는 언제 오픈할지 모르니까 네가 필요하거든?”

그러나 재이는 이미 화가 났는지 짐을 챙기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굳이? 사람이 필요한 거면 나 말고 다른 알바생을 소개시켜 줄게 그럼.”

“아니. 나는 네가 편하고 좋아 재이야.”

“저기 근데 나는 경력자도 아니고.”

윤재가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니, 남자로서 좋다고.”

놀란 재이가 흠칫 굳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재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유 모를 거부감이 훅 끼쳤다.

“뭐?”

윤재는 다소 뻔뻔한 얼굴로 그녀에게 도장 찍듯 말했다.

“나 너 좋아한다고. 네가 필요해.”

전혀 고맙지도 설레지도 않는 고백이었다. 재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직 하나였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어떻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까.

그때 문득 재이는 유리 통창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퍼뜩 돌렸다.

“……아저씨.”

놀란 재이가 중얼거렸다. 유리문 너머에는 해준이 문고리를 잡은 채 서 있었다. 자신을 데리러 오려다 윤재의 말을 들은 듯 보였다.

순간 재이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그가 둘 사이를 오해했다는 걸 눈치챘다. 해준은 표정만은 덤덤하게 유지한 채 말하며 돌아섰다.

“이따 오지.”

“아저씨 잠깐만요, 아저씨!”

재이가 다급하게 그를 쫓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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