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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이랑 너랑 어떻게 같으냐.
-그건 아니다.
단정을 짓다 못해 쐐기를 박는 말에 윤재는 말문을 잃고 전화를 끊었다. 회장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옅은 경멸까지 깔려 있음을 느꼈다.
“씨이발…….”
그가 욕을 지껄였다. 어린 시절 악몽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듯했다. 그를 비난하던 갖가지 목소리가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거니. 해준이 반만 따라가 봐!”
“누가 해준이처럼 살라고 했어? 엄만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너 때문에 회장님 볼 낯이 없다. 제발 사고라도 치지 말라고 했지. 너 사고 치면 해준이 이야기만 하시는데 나도 미치겠어!
아주 어릴 적부터 비교를 당해 왔다. 바쁘게 살아 얼굴도 제대로 못 본 형이었지만 항상 자신의 등 뒤에 붙어사는 듯했다.
윤재에게도 억울한 면은 있었다. 날고 기는 정재계 인사의 자식들 중에서도 해준은 독보적인 존재였고 객관적으로 흠이 없는 특별한 소년이었다.
회장이 그를 싸고돌며 금지옥엽으로 키우는 것은 수긍할 수 있었으나 그런 ‘재벌가 자제의 교본’과 비교하기엔 자신은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었다.
“장난해? 형은 날 때부터 그냥 특별했잖아.”
“형도 그렇게 되는데 같은 핏줄은 너는 도대체 왜 못 하는데!”
윤재는 여러 차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보았으나 큰 소용은 없었다. 집안 식구들은 날 때부터 그와 해준이 기질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것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윤재의 유년기는 위축되어 인정받지 못한 채 점점 비뚤어져 갔다.
해준보다 나은 게 있다면, 잔소리를 매끄럽게 피할 유들한 대처와 뻔뻔한 성격 정도였다. 물론 오히려 그런 면 때문에 껄렁거린다며 평가 절하 받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또래에겐 달랐다.
“근데 웃기긴 네가 해준이보다 훨씬 웃긴 거 같아.”
“아 그래?”
윤재가 가장 인정받는 곳은 또래 여자아이들 틈에서였다. 모두 처음에는 대원의 후계자인 해준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매사에 까칠하고 내일 없이 싸가지 없는 태도에 혀를 내두르며 멀어지곤 했다.
그에 비해 윤재는 유들하며 사람들과 잘 어우러졌고, 곱상한 외모와 능청스러움으로 퍽 귀여움을 받았다.
“해준이는 좀, 무뚝뚝하고 까칠하잖아.”
“야, 당연하지. 놀 때 윤재 없으면 심심해.”
윤재는 자연히 자신의 인정을 찾기 위해 이성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이성 관계로 잦은 싸움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이라 여기며 살았다. 나이가 들며 점점 더 비교될수록 그 증상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해준을 향한 자격지심과 질투는 여전했다. 오히려 해준을 따르며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여자들에게는 옅은 혐오와 오기가 생길 정도였다. 윤재는 해준을 쫓아다니는 여자들을 꾀어내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형은 담배 안 피워?”
“굳이.”
둘이 어릴 적, 윤재는 해준의 앞에서 껄렁거리며 흡연 여부를 물어보았다. 피우지 않는다는 말에 윤재는 보란 듯이 담배를 꺼내 뻑뻑 피워 보였다.
그때 당시는,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준도 해 보지 않은 걸 자신은 으스대며 하고 있다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해준이 상종하지 않는 ‘비행과 방황’을 그는 자신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해준은 절대로 모르는 세계’라 생각했다. 윤재는 갖은 나쁜 짓을 일삼고 다니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해준은 집으로 돌아가며 재이와 윤재의 말을 곱씹었다.
“뭐 하고 왔어.”
“나쁜 짓이요.”
재이는 처음 자신이 물어봤을 때, ‘나쁜 짓’을 했다고 말했다. 윤재의 말이 거짓일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엊그제 새벽 늦게 들어간 날, 나랑 가게에 있었어.”
“…….”
“걔가 뭐 했는지 말 안 해?”
그는 아주, 몹시 짜증스러웠다. 조금 기막히기까지 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윤재와 키스하고 와서 자신에게 키스하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재이는 왜 그랬던 걸까.
재이의 태도로 보아서 자신에게 변심하거나, 바람을 피웠던 건 아닐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재이와 자신이 했던 것처럼 애달프고 간절하게 키스를 나눈 장면을 상상하자 심기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차를 돌려 윤재의 목을 비틀어도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녀오셨어요.”
집에 들어가자 재이가 그를 마중 나왔다. 해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히 대꾸했다.
“응. 그래.”
되레 재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출근할 때만 해도 평범한 정장이었는데 코트에 니트 차림이라니.
“어, 웬 니트에 코트예요? 집 들렀어요?”
“응. 밥 먹고 그러다가.”
“아. 밖에서 먹었구나. 누구랑요?”
“그냥. 대충 밖에서 간단하게 먹었어.”
해준은 생각이 복잡하고 재이에 대한 몇 가지 의구심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자신이 가윤의 이야기를 했다가는 파혼에 대해 말할 게 뻔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마음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일단 재이의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평소와 조금 다른 대답에 재이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다녔지만 해준은 잠시 모르쇠 했다.
“저기, 아저씨.”
“응.”
재이는 그의 작은 변화도 감지할 만큼 해준을 잘 알았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재이의 레이더가 곤두섰다. 해준은 재이를 지나쳐 코트를 벗으며 현관 복도를 걸어갔다. 재이는 원래처럼 외투를 받으려 했으나 그것도 생략하는 시원찮은 모습에 걱정스레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아냐. 씻을 테니 들어가서 할 일 해.”
“……네.”
아니란 말도 진짜가 아닌 것 같았다. 거짓말까진 아니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듯 느껴졌다. 재이가 일단 대답을 하자 해준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마음에 무언가 얹힌 듯 갑갑해졌다.
곧이어 욕실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부엌을 서성이던 재이가 그의 방으로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리며 들어갔다.
재이는 뒷조사를 하듯 그의 휴대폰을 찾아 잠금을 풀었다. 그가 혹시나 나오지는 않을까 연신 욕실을 힐끗거렸다. 도대체 아까 누구랑 만나고 왔길래 사람이 저렇게 되어 온 거야? 그녀가 빠르게 연락처를 뒤졌다.
통화 기록 정가윤 (1)
정가윤의 이름 석 자를 보자마자 재이의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둘이서 먹었으면 먹은 거지 왜 자신을 속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이는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원 상태로 올려놓았다.
“…….”
계속해서 자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곱씹어 보던 재이는 뭔가 머리에 꽂히는 느낌에 홀린 듯이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세탁물을 놔두는 곳이었다. 다용도실 문을 열자마자 재이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헉……!”
흰 셔츠가 새빨간 피, 아니 어떤 붉은 것으로 요란히 뒤덮여 있었다. 재이가 조심스럽게 셔츠 가까이로 얼굴을 대서 냄새를 맡았다. 이건 발효주에서 나는 냄새였다. 색이나 향이나 와인이 확실했다.
“와인?”
다시 한번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대충 밖에서 간단하게 먹었어.”
그는 별일 아닌 듯 말했지만 이미 거짓말을 한 게 드러난 이상 신뢰가 가지 않았다. 비즈니스 사이라는 그녀와 와인까지 마셨고, 그걸 자신에게 숨겼으며 옷이 이렇게 될 지경이었는데 별일 없었던 척 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재이는 억측은 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머릿속에선 몇 가지 나쁜 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도로 셔츠를 내려놓았다.
* * *
가윤은 해준이 괘씸하여 견딜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파혼 통보를 받고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하루를 꼬박 앓아누웠다.
평소에도 원체 싸가지가 없음을 실감했지만 이런 빅엿을 먹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 회장이고 부친이고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가윤은 하루 종일 울다 자길 반복하며 분한 마음을 억지로 삭여야 했다.
“죽여 버릴 거야.”
하지만 분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좀 괜찮나 싶다가도 돌아서면 열이 뻗쳐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그에게 정말로 사심 없이 비즈니스로 대했다면 이렇게까지 감정 소모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해준은 물론이고 재이를 더 손쓰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될 거 같았다.
그래서 가윤은 윤재의 연락처를 물어물어 구했다. 원체 아는 사람이 많고 사교성이 좋다는 그와 연락이 닿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윤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누구세요.
“저 정가윤이라고 해준 씨 약혼녀였던 사람이에요. 접때 회장님이랑 식사하는데 들르셨잖아요. 기억나시죠?”
가윤은 전화 건너편에서 들리는 요란한 음악 소리와 환호성에 목소리를 높여 말해야 했다. 윤재는 졸린 건지 취한 건지 모를 목소리로 어눌하게 대꾸했다.
-아. 예. 왜 그러시죠.
“죄송한데 안재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세요?”
-예? 뭐 좀 알 만큼 아는데요.
“할 말이 있어요. 만나서 이야기해요.”
-그럼 여기로 와요. 나 지금 있는 데 주소 찍어 보낼 테니까.
가윤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오후 여덟 시. 벌써부터 이 시간에 정상이 아닌 윤재가 탐탁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아쉬운 처지에 뭔들 못하랴.
결국 가윤은 윤재를 찾아갔다. 허름하고 미심쩍은 건물 안에서 한참 뒤에 나온 윤재는 술에 만취한 상태였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가윤은 조금 꺼림칙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제대로 된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녀는 근방의 카페에 그를 앉혀 두고 설득했다.
“도와주세요. 대가는 뭐든지 해 드릴 수 있어요.”
가윤의 부탁을 졸린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윤재가 물었다.
“나보고 사촌 형을 엿 먹이란 말이에요?”
“원하는 대로 드릴게요.”
가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윤재가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다.
“엿 먹이는데, 돈까지 준다니……. 이거 너무 나이스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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