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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파혼했으니 그리 아세요.]
태연하게 날아온 문자에 회장은 목덜미를 잡고 쓰러졌다. 쓰러지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 쓰러져 버렸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동행한 의료진이 빠른 처치를 해서 별 탈은 없었지만 회장님이 쓰러지셨다는 연락에도 해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회장은 유례없이 진노했다.
“이 호래자식! 당장 데려와라! 내가 이거 죽여 버려야 성에 차겠다!”
“회장님, 일단 고정하시고…….”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또다시 화낼 수밖에 없었다. 해준이 정말로 회사로 복귀하지 않았다는 깜짝 소식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이건 회장과 회사에 대한 명백한 도전장이었다.
“고정? 내가 고정하게 생겼나? 어!”
“회장님, 그래도 건강을 생각하셔서…….”
“이 화상 같은 놈! 도대체 누굴 닮아 이러는 거냐!”
그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던 비서 실장은 속으로 두 남자가 무섭도록 똑같다고 생각했다.
서로 봐주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면이 특히 그랬다. 유 회장은 하늘에 있는 며느리를 욕하며 손주를 왜 이렇게 낳아 놨냐고 욕할 때도 있었지만, 모두 본부장과 회장의 성질머리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권 비서 지금 어디 있다고?”
“일단은……. 자택에 거주 중인 걸로 파악됩니다.”
앞뒤 재지 않고 화내던 유 회장은 씩씩거리면서도 이성을 찾았다. 비서 실장은 그 모습에 한시름 놓으며 보고했다.
“김 실장 보기엔 어떻게 해야 좋겠나.”
”지켜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파혼은 두 분 사이에 평소 싸움이 잦았을 수도 있으니 가윤 씨도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약속 잡아라.”
유 회장이 시름에 잠기며 말했다. 어떻게 후딱후딱 결혼이 진행되나 했더니 이렇게 어그러질 줄이야. 게다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올 때마다 징징거림이 심했던 가윤을 달래 줄 생각을 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유 회장은 정 국장을 통해 파혼 소식을 전해 들었고 가윤이 어떤 만남도 거부한다는 연락을 전해 들어야 했다. 유 회장은 또 한 번 자리에서 진노하며 펄쩍 뛰었고, 비서 실장과 그를 보필하는 직원들은 진땀을 빼야 했다.
* * *
해준은 올해 재이의 생일날 다시 없을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특히 올겨울은 재이가 결혼 소식으로 자신과 다투느라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간 재이에게 냉정하게 대할 때마다 쌓였던 부채감을 생일 때 만회할 생각이었다.
많은 선물 리스트가 있었으나 그중에는 ‘파혼 소식’도 있었다. 재이에게 생일날 알려 줄까 했지만 더 이상 하루도 전전긍긍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재이를 제 앞에 앉혀 두고 없던 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와인을 뒤집어쓴 채로 갈 수 없던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재이를 데리러 갔다. 하지만 가게에서 그를 반긴 건 재이가 아닌 윤재였다. 가게에 남아 심드렁하게 영화를 보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웬일이야? 그것도 니트에 코트 차림으로.”
“재이는?”
“아까 좀 피곤해 보여서 내가 일찍 보냈어. 간 지 한 10분 됐나.”
그는 속으로 셔츠를 갈아입지 않았다면 재이와 마주쳤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윤재가 해준을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오늘 회사 안 갔어?”
“응. 오늘 안 갔어.”
“어쩐지. 평일에 웬 사복인가 했네. 코트 예쁘네?”
이대로 나갈 줄 알았던 해준이 간이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말했다.
“커피 한잔 줘.”
윤재는 가만히 멈춘 채 해준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별달리 서두가 준비되지 않아도 그는 해준의 용건을 눈치챘다.
“커피 별로 필요 없잖아. 재이 때문에 그러지?”
두 남자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신경전을 닮은 그 분위기는 누구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해준은 부인하지 않고 간단히 용건을 남겼다.
“그래. 가게 오픈일 나왔다고 들었다. 재이 적당히 정리해 줘.”
해준은 재이를 자신의 밑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여전히 평생 자신의 밑에서 먹고 놀며 굴곡 없는 인생을 지냈으면 했지만 재이의 생각은 뚜렷했다. 사회 활동을 무척 원했고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고 싶어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밖에서 고생하지 말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일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동시에 대원의 본부장으로서 비슷한 수준의 회사 중 단연 최고였으니 엄한 곳에서 고생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윤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해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방황하게 할 수 없어.”
“나더러 일 멀쩡히 잘하는 직원을 자르란 거야?”
“재이는 내 밑에서 일하면 돼.”
“형 매번 이런 식으로 뒤에서 손쓰나 보네.”
해준은 윤재의 말이 무척 거슬렸다. 해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윤재를 바라보며 고압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알겠다고 말겠다고. 그것만 말해.”
하지만 윤재도 지지 않았다.
“말겠다고. 나는 남의 말 안 들어. 알잖아.”
해준의 눈에는 그저 웃길 뿐이었다. 재이에 관해 자신의 의견에 맞서는 게 같잖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지. 회장님 말은 듣잖아?”
“뭐?”
비꼬는 뉘앙스가 명백했다. 성격이 유들할 뿐이지 자존심은 강했던 윤재의 입매가 굳었다. 해준의 말은 ‘회장님 돈을 받아먹고 살며 어디서 감히 큰소리치냐.’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해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 내가 돌아가면 곧장 비서 실장한테 네가 새벽에 여자랑 대화하고 시시덕거리는 사진 발송할 거야.”
“…….”
“알겠다고 말겠다고. 다시 대답해.”
해준이 다시 똑같은 말로 물었지만, 어조는 완전히 달랐다. 윤재를 위에서 찍어 누르며 압도시키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아쉬울 게 없고 언제든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윤재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재이가 좋아할까?”
“걔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래? 우리 둘이 키스한 것도 알아?”
그의 말에 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승기를 잡은 윤재가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엊그제 새벽 늦게 들어간 날, 나랑 가게에 있었어.”
“…….”
“걔가 뭐 했는지 말 안 해?”
순간 해준의 머릿속에 그날 새벽 재이가 심상찮은 얼굴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뭐 하고 왔어.”
“나쁜 짓이요.”
해준은 그날 이후 더 이상 캐묻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당연히, 자신의 속을 썩이려 한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을 비웃듯 윤재가 말했다.
“아. 맞아, 당연히 말 못 하겠지.”
윤재는 금방이라도 실소를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 * *
“지금 내가 돌아가면 곧장 비서 실장한테 네가 새벽에 여자랑 대화하고 시시덕거리는 사진 발송할 거야.”
해준이 떠난 카페에서 윤재는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어느 날을 말하는 걸까. 그녀의 남편이 온 날? 자신이 전화를 해서 불러낸 날?
앞이라면 다행이고, 뒤라면 큰일이었다. 윤재는 뒷조사라면 신물이 나는 사람이었다. 흥신소든 탐정이든 그놈들이 사진만 찍고 돌아갔을 리가 없었다. 멀리서라도 녹취를 감행했을 테고 그게 아니라도 대화의 내용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애는 잘 있어요? 주은이요. 안 본 지 오래됐는데.”
그럼 자신의 숨겨진 딸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건 그냥 으름장과 유난스러운 혼냄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상상을 거듭한 윤재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가게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혼란스럽게 갈등해야 했다.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그는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회장이 자신과 그 여자의 거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라도 알아내야 불안이 가실 것 같았다. 그가 고민하다 유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전화는 오래가지 않아 연결되었고 유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마침 잘 전화했다. 비행기 티켓 끊어 줄 테니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도 좋아.
“예?”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윤재가 놀란 눈치이자 유 회장이 설명했다.
-해준이 그놈의 자식 파혼했어. 더 이상 가게 차리며 그 짓거리 안 해도 된다는 말이야. 이 개잡놈의 자식.
그는 이미 골머리를 앓고 있던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입에 담기도 싫은 눈치였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란 말은 윤재의 예상에 없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윤재가 말을 조금 더듬으며 물었다.
“회장님 그, 그럼 말씀하셨던 건.”
-그게 무슨 말이냐?
“전에 말씀하신 금액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벼락같은 고함이 내리쳤다.
-하나는 대를 안 이으려고 지랄이고 하나는 집안 살림 퍼 가는데 환장해서 달려드는 거냐!
“회장님. 그게 아니라.”
-어떻게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어 내가 그냥 죽을 때가 다 됐다.
회장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유윤재는 본능적으로 일이 크게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큰돈이. 대가를 보고 한국까지 냉큼 쫓아온 것인데 이제 와서 돌아가라니. 유 회장이 이대로 전화를 끊을 것 같은 분위기에 그의 맘이 조급해졌다.
“아니면 대원에 자리 하나만 만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몇 년 하다 정리하겠습니다. 저 그동안 반성 많이 했어요. 이제 열심히 일할 준비됐어요.”
-윤재야.
“예?”
-지연, 혈연. 대한민국에서 다 타파해야 할 것들이다. 아직도 그런 것에 목을 매고 있어.
유 회장이 그에게 훈계했다. 듣던 윤재가 황당한 심정으로 항의했다.
“회장님, 이런 말 유치하다는 것 압니다. 하지만 형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장이 말을 끊었다.
-해준이랑 너랑 어떻게 같으냐.
“…….”
-그건 아니다.
아주 단호한 말과 함께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윤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말문을 잃은 채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다 전화를 끊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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