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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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중, 크리스마스이브는 1년 중 단연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들뜬 채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해준에게 그 해의 크리스마스이브는 하루 종일 과외 일정이 몰린 날이었다. 자신의 학생이 해외에서 중요한 경시대회를 앞두고 있었기에 밤늦게까지 붙어 있으며 공부를 봐줘야 했다.

재이는 조금 서운한 눈치였지만 해준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올해 들어 학업에 매진하는 시간이 늘었기에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재이의 생일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재이야.”

“네?”

크리스마스이브, 그가 집을 나서며 신발장에서 재이에게 물었다.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며칠 전부터 몇 번이나 물었던 말이었다. 재이가 고개를 저으며 완고하게 말했다.

“정말 없어요. 가지고 싶은 거도 없고, 필요한 거도 없으니까 차라리 오늘 일찍 와서 쉬면 안 돼요?”

“스케줄 보고.”

해준이 웃으며 말했지만 사실상 거절이었다. 한번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면 흐름이 끊기는 걸 싫어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재이는 그를 말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도 아르바이트를 해 수고를 덜고 싶었으나 절대로 그럴 생각 말라는 해준의 엄포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날 해준은 일을 하던 중간에 백화점에 갔다. 한눈에도 멀끔해 보이는 그가 명품 구두 매장에 들어서자 점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인가요? 선물의 주인이 무척 좋아하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찾으시는 색상은 있나요?]

해준이 매장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검은색 제외하고, 가장 무난하고, 잘 쓸 만한 거로 주세요. 구두가 하나도 없거든요.]

점원은 베이지색 구두를 추천했다. 해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제했다. 재이의 것이라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점원이 구두를 정성스레 포장하며 물었다.

[애인 선물인가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 점원에게 해준이 싱겁게 웃으며 설명했다.

[동생 거예요. 생일 선물이죠. 크리스마스에 태어났거든요.]

재이는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아이였다. 빨간 날에 태어난 아이에게 밑창이 빨간 구두는 퍽 잘 어울릴 듯했다. 피부가 워낙 희니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리긴 했지만.

그는 자정이 넘은 시간 집에 귀가했다. 자신을 기다리던 재이는 까무룩 자신도 모른 채 잠든 듯 이불도 덮지 않은 채였다.

그는 구두를 살며시 재이의 베개 위에 두었다. 매년 재이의 생일마다, 세상 좋은 것은 모두 재이의 머리맡에 올려 두고 싶었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그는 몸과 정신을 갈아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가만히 앳된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재이가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뭐예요? 언제 왔어요……?”

“이제 금방 왔어.”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해준은 외투도 벗지 않은 차림이었다. 그의 옷에는 여전히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재이는 그를 보고 몸을 일으키다 그가 가져온 선물을 보았다. 누구라도 알 법한 유명 브랜드의 쇼핑백을 보고 재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이거 제 선물이에요? 뜯어 봐도 돼요?”

해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재이는 허겁지겁 선물을 뜯었다. 베이지색 하이힐이 선물 박스에 들어 있었다. 재이가 잔뜩 설렌 얼굴을 하고 감격하여 그를 바라봤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해준이 설핏 웃으며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이가 하이힐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함박웃음을 짓는 양 볼에 보조개가 들어갔다.

사실 해준은 재이에게 구두를 선물해 주고 싶지 않았다. 발과 자세에 좋을 것이 없는 구두를 선물해 준 이유는 재이가 자신에게 부쩍 어른 취급을 받고 싶어 하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요……. 고마워요, 오빠.”

“고맙기는.”

재이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물론 당시의 재이는 해준에게 아직 아이나 다름없었고, 실제로 그가 도맡아 키우다시피 하는 처지였기에 더 했다.

하지만 하이힐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둥 어른 취급해 주는 선물과 말을 들으면 무척 좋아할 거 같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내가 싫다 한들 네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냐. 해준은 흐뭇한 마음으로 재이를 보고 따라 웃었다.

* * *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처럼, 올해도 어김없이 재이의 생일이 돌아왔다. 채 일주일이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해준은 재이를 두고 출근하며 가지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 놓으라고 했다.

“없다고 하지 말고, 가지고 싶은 거 생각해 놔.”

“정말 없는데.”

“없으면 만들어 내.”

해준의 말에 재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재이는 물욕이 없는 성격이었다. 물건을 곱게 쓰진 못해도 잘 질리지 않아 오랫동안 쓰곤 했다. 게다가 이미 재이는 간밤의 잠자리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기에 더 바랄 게 없었다.

“진짜 필요 없어요. 아니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면 안 돼요?”

“맛있는 건 매일 먹여 줄 수 있어. 그런 거 말고 좀 특별한 거.”

사실 재이는 수시로 어마어마한 식대를 자랑하는 곳에서 밥을 먹어 왔다. 아무리 예약이 치열한 곳도 대원의 재벌 3세가 방문한다고 하면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해준이 한국으로 넘어오자마자 재이에게 온갖 귀하고 비싼 걸 가져다 바치다시피 했으니 그런 것에 감흥이 없을 만도 했다.

“열심히 생각해서 필요한 걸 만들어 내길 바라.”

“…….”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하며 재이에게 큰 과제를 남기고 갔다. 그가 나간 뒤 재이도 시간에 맞춰 가게로 출발했다. 간밤에 있던 해준과의 잠자리 덕에 윤재와의 키스가 뒤늦게 생각났지만 그런 일 때문에 결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했을 때 윤재는 자리에 없었다. 오히려 인테리어 사장이 가게에 들러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사장님 안 오셨어요?”

“응. 유 사장 없던데? 근데 가게에서 술 먹었어?”

“예?”

“술병이랑 술잔이 있어 가지고 일단 우리가 창고에 넣어 놨어.”

“아아, 네.”

사장이 둘이 함께 마신 거 아니냐는 뉘앙스로 물었지만 재이는 모르쇠 하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재이는 일을 지켜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윤재가 원래 사장의 권한을 이용해 출퇴근이 자유로운 편이었기에 그러려니 할 법했지만 새벽에 있었던 키스 때문에 신경이 쓰이긴 했다.

[오늘 늦으세요?]

재이가 고민하다 문자를 보냈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 오후 세 시 즈음 윤재가 느지막이 나타났다. 재이와 인테리어 사장이 목장갑을 벗으며 반겼다. 유윤재는 뺀질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능청맞게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어, 유 사장. 오늘 신경 좀 써야 되는 날이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어제 과음을 해 가지고. 재이가 잘 봤죠?”

“그럼. 재이 씨가 다 보고 있긴 했지.”

윤재가 고개를 저으며 너스레 떨었다.

“아 대단하다니까요. 저는 반 죽었는데 출근도 칼같이 하고.”

“…….”

예상 못한 발언에 재이가 깜짝 놀랐다. 인테리어 사장은 고개를 돌려 재이를 힐끔거렸다. 이렇게 쉽게 거짓말이 들통나다니. 재이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윤재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은 왜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후 늦게까지 진행된 공사는 얼추 마무리되어 가게에는 둘만 남았다. 윤재는 스케줄을 짜며 재이에게 물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쉴래 당일에 쉴래?”

벌써 길거리와 가게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왔다. 재이는 고민할 것도 없이 윤재에게 말했다.

“아…… 괜찮으면 나는 당일이 좋아.”

“왜, 데이트해?”

뜨끔.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도 재이의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뜨끔했다. 재이가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매년 그날 쉬어 가지고.”

“그래. 편할 대로 해.”

생각 외로 윤재는 더 물어보지 않고 넘어갔다. 재이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보드 타자를 치던 윤재가 입을 뗐다.

“일찍 나온 거 같더라. 문자 보낸 시간 보니까.”

“일찍은 아니고 그냥 정시 출근했어.”

“그만둘 거 아니지?”

“……응?”

다시 한번 뜨끔. 재이는 출근과 동시에 이제 슬슬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게 오픈을 도와주는 일은 별달리 업무랄 것도 없었고 고용주도 친절했으나 그게 다였다. 준비를 하면 할수록 옆에서 지켜보며 쉬운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오픈을 앞두고 자영업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해준과의 관계가 회복된 거 같으니, 아니 더욱 발전한 거 같으니 해준의 곁에서 일을 배울 생각이었다. 재이의 생각을 읽었는지 윤재가 그녀를 달랬다.

“그만두려고 고민하고 있는 거야? 그냥 둘이 술 먹고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생각해.”

“아, 음.”

“더 할 말 있어?”

재이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냥. 이제 카페도 오픈할 거 같고. 나도 다시 취업 준비 해야 하니까.”

“그래?”

윤재는 별달리 대꾸하지 않고 애매한 반응을 내놓았다. 잠시 미묘한 공기가 흘렀고, 재이가 조심스레 어제 일에 관해 입을 뗐다.

“……저기 근데 어제 일 아저씨한테는 말 안 했으면 좋겠어.”

윤재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왜?”

재이는 사실 그의 그런 반응에 내심 놀랐다. 평소처럼 그냥 그러자고 넘어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윤재도 키스가 나쁜 쪽으로 인상 깊었던 것 같기에 물 흐르듯 없던 일이 될 줄로만 알았다. 재이가 난감해하며 말했다.

“그냥. 사생활이잖아.”

“그럼 조금만 더 일해 줘.”

“응?”

“알겠으니까 조금만 더 일해 달라고.”

윤재가 말하며 고개 돌려 재이를 쳐다봤다. 어쩐지 평소의 능청맞고 유들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서늘했다. 사실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자신을 압박하는 듯한 눈빛에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재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에 조금 놀랐거니와 어젯밤 첫 잠자리를 한 해준에게 절대로 이 사실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윤재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재이는 찜찜함을 남기고 퇴근해야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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