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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윤재와의 키스는 떨림도 흥분도 없었다. 비탄에 빠진 재이에게는 그조차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눈을 뜬 채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둘은 키스를 나누고 있었지만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윤재는 키스가 상당히 능숙했지만 그뿐이었다. 차가운 마음으로 혀를 섞자 재이는 불쑥 이 모든 행위에 비위가 상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혀와 혀뿌리까지 헤집어 놓는 남의 것. 고개를 돌려도 합이 맞지 않아 치아가 딱딱거리며 부딪쳤다.
재이는 억지로 키스를 이어 가며 순간 도대체 왜 이런 짓들을 하며 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키스를 하면 할수록 머리는 차갑게 식고 이성을 찾았다. 문득 그의 콧바람이 거슬렸고 키스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팔뚝을 잡은 손이 뜨겁고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윤재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는지, 자신의 가슴을 주물렀다. 그때 재이는 문득 인턴 시절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거 달고 뭐 대단한 거 한다고 뻐기고 있냔 말이야. 술이나 따르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던 김 부장의 벌건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간담이 서늘했다. 뒤통수에서부터 소름 같은 게 그녀의 척추를 따라 오스스 돋았다. 이건 아니었다. 뻣뻣하게 굳은 재이의 마음도 모른 채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자 도저히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그, 그만.”
그는 입을 뗐고,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윤재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재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키스를 후회하며 간이 의자에 올려 둔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그는 굳이 재이를 말리거나 붙잡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입가의 타액을 훑어 내며 말했다.
“너, 첫 키스야?”
재이는 은근하게 이 실패를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는 거 같아 불쾌했다. 첫 키스였냐고?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둘 사이엔 설명하기 힘든 냉랭함이 감돌았다. 재이는 도망치듯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당장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이 선택은 오답이란 걸 뼈저리게 실감하자 해준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재이의 첫 키스는 해준이 교수의 술 시중을 들다 밤늦게 들어온 그날. 재이가 질문했지만 피로와 싸우다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 그날이었다.
“……그 언니가 결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안 해.”
“그럼 계속 둘이서만 살면 안 돼요?”
“그래.”
“정말요?”
“……….”
대답 대신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재이가 놀라 그를 바라보자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깊게 심호흡하자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재이는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잘생기고 훤칠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운이 강해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는 남자는 잠들었을 때만큼은 완전히 달라졌다.
짙은 눈매에 매력을 더하는 긴 속눈썹이 잘생긴 얼굴에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눈, 코, 입 그리고 두드러지는 티존과 얄쌍한 얼굴은 누워서도 빛을 발했다.
“자요?”
재이는 그가 곤히 잠든 걸 보면서도 물었다. 다행히 그는 재이의 질문에도 깨지 않았다.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연말을 앞두고 일을 닥치는 대로 하고 있었으니. 잠을 자도 쪽잠을 자고, 끼니는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조용한 집, 밖에서는 멀리서 캐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코앞에선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재이는 잠시라도 근심을 잊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 행복, 이 평안이 좋았다. 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답이 없기를 바라며 물었다. 불쑥 재이는 무모한 욕심이 들었다.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과 긴장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는 여전히 잠든 상태였고 재이는 숨을 참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붙였다 떼어 냈다. 그의 입술은 따뜻했다.
* * *
윤재는 재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 붙잡지 않았다. 끔찍한 키스가 끝난 후에 윤재도 복잡한 심경에 시달렸고 참담한 기분이었다.
재이는 홧김에 키스했을지언정 자신에게 티끌만큼의 이성적인 끌림도 없었다. 윤재는 그 사실을 입술을 맞추자마자 깨달았다.
이런 반응은 아주 옛날 그 여자 이후로 처음이었다. 윤재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키스를 이어 나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재이는 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밀쳐 냈다. 그의 자존심이 와장창 부서지는 듯했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다.
항상 상대가 어떤 짓을 하든 능청맞고 재치 있게 넘길 수 있었던 윤재는 재이에게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과거가 기막힐 따름이었다.
재이는 말도 없이 가게를 훌쩍 떠나 버렸고, 윤재는 뒷정리도 하지 않은 채 허망하게 자리를 지키다 여자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새벽 다섯 시쯤, 오늘도 불이 꺼진 빌라 창문이 보였다. 그는 전화를 걸었다. 오늘만큼은 받을 때까지 할 생각이었다.
Rrrrrr- Rrrrrr-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여자가 자다 깬 건지 전화가 끊겼고 윤재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Rrrrrr- Rrrrrr-
결국 전화 연결음이 한참 이어지더니 여자가 언짢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방금 잠에서 깬 듯 잠긴 목소리였다. 윤재가 아랑곳 않고 뻔뻔하게 요구했다.
“나와요. 지금 집 앞이니까.”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나오라구요. 이야기 좀 해요. 내가 뭐 대단한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나올 때까지 안 갈 거예요.”
-너 미쳤니? 그리고 지금 애들 자.
“잘 것 같으니까 내려오라고 하는 거예요.”
-끊을게.
“내가 올라가요?”
윤재의 말에 심상찮음을 느낀 건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여자는 마지 못해 입을 뗐다.
-조금만 기다려.
* * *
여자는 윤재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자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녀와 관련한 요란한 사건들이 많아 집안 사람들 모두 쉬쉬했지만 여전히 윤재는 잊지 못했다.
한국에 온 결정적 이유도 그 여자 때문이었다. 윤재는 기다리라는 여자의 말에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웠다. 여자는 저번처럼 모자를 눌러쓴 채 낡은 외투를 입고 그에게 다가왔다. 곧 그의 앞에 선 여자가 딱딱하고 야멸차게 말했다.
“얼른 말해.”
윤재가 담뱃재를 털며 물었다.
“애는 자요?”
“용건만 말하라고.”
“못 본 사이에 많이 늙었네요.”
“…….”
“농담이에요.“
여자는 그의 짓궂고 실없는 농담을 받아 줄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 윤재는 주위를 둘러보며 남편의 차를 찾았지만 없었다.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 물었다.
“남편이랑은 별일 없었어요?”
“알 바 없잖아. 왜 왔어?”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뭔데.”
용건을 재촉하는 그녀를 내려 보며 윤재가 물었다.
“아직도 나는 안 돼요?”
“…….”
“왜 나는 아니에요? 아직도 말 안 해 줘요?”
윤재는 질문하며 재이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구역질할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밀어 냈을 때, 반대로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여자가 떠올랐다. 윤재는 재이에게 묻고 싶은 걸 여자에게라도 대신 알아내고 싶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코웃음 쳤다. 상당히 공격적인 태도였지만 윤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눈을 끔뻑였다. 여자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몹시 화가 나 보였다.
“고작 그거 물으려 꼭두새벽에 사람을 불러낸 거니?”
“예.”
“이러니까 안 되는 거야.”
“그런 보복성 멘트 하지 말고요. 나한테 이유를 말해 달라고요.”
“갈게.”
여자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돌아섰다. 윤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걸 눈치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몹시 고된 듯했다. 다시 빌라로 들어갈 즈음 그가 넌지시 말했다.
“집에서 이미 알더라고요. 당신 한국 들어온 거.”
여자는 우뚝 선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윤재는 무표정하게 담배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여자는 멀리서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다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는 여자가 집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차라리 화내면서 다가오는 게 좋았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지, 의미심장한 말 때문인지 여자는 그런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의 생각을 알면 더욱 화를 낼지도 몰랐다.
“야. 유윤재. 너 지금 장난하니?”
“…….”
“사람 안 괴롭히겠다고 했잖아. 나 너 때문에 일본 영국 미국 안 다닌 데가 없어. 아무거도 모르는 애들은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귄다며 울어……!”
여자의 말은 말 그대로 사실이었다. 윤재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한국이었고, 그다음은 미국, 그리고 영국, 그리고 일본을 찍고 겨우 들어온 한국. 각국을 도망쳐 다니며 윤재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생이었다.
“이렇게 지저분하게 엮일 줄 알았다면 너 같은 새끼랑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자는 주먹 쥔 채 분노에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윤재는 그런 말을 수십 번이나 들어 왔기에 면역이 생길 정도였다. 여전히 여자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윤재는 그게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호락호락하지 않기는 윤재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소득 없이 돌아갈 바에 여자의 속을 한 번이라도 긁어 놓고 싶었다.
올라가서도 자신을 곱씹으며 화내길, 자다가도 자신의 꿈을 꿔서 잠에서 깨길 바라는 지독한 마음이었다.
“우리 애는 잘 있어요?”
여자는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듯 하얗게 질렸다.
“주은이요. 안 본 지 오래됐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뺨을 내리쳤다. 여자가 진저리치며 말했다.
“징그러운 새끼……! 이 미친 새끼!”
”나 이제 곧 돈 많아져요. 같이 가요.“
“헛소리 하지 마. 너 언제 정신 차릴 거니?”
여자는 자녀가 두 명이었다. 그중 둘째 주은은 윤재의 딸이었다. 그게 두 사람의 지독한 연결 고리였다. 끊어져야 했지만 도저히 끊어질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다. 물론 그녀의 남편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윤재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상해. 내가 맘에 들어만 하면 기어코 난 안 된다고 하더라고. 이런 말 해도 되죠? 왜요, 기분 나빠요?”
“…….”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당신은 남편도 있잖아.”
여자는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묵비권을 고수하는 건 여자의 특기였다. 오늘도 끝끝내 답을 얻을 수 없던 윤재는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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