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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가 집으로 귀가한 시간은 새벽 다섯 시였다. 당연히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자고 있으리라 생각한 해준은 거실 소파에서 업무를 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이는 그를 보고 흠칫 놀랐으나 발걸음을 조용히 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 해준은 언제 들어온 건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뭐예요?”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준이 자신의 침대에 있다니.

“술을 마셨구나.”

해준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아마 어눌한 자신의 발음을 듣고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들어오자마자 풍기는 술 냄새에 의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재이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 그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듯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일조차 드물었다. 기껏해야 의자에 앉거나 입구에 서 있는 게 다였다. 물론 재이는 해준의 방을 제 방 드나들 듯 편히 왕래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해준은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시선 구도조차 재이에겐 낯설었다. 키가 겨우 160cm인 재이에 비해 그는 188cm의 장신이었으니까. 항상 그를 올려다보는 데 익숙했는데 자신의 방을 포함한 모든 게 낯설고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어딜 갔다 온 거야.”

“……가게요.”

재이가 입을 달싹이며 말했다. 그냥 제풀에 긴장한 것일 뿐인데, 해준까지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그가 자신의 말에 침묵을 지키며 생각하는 듯한 표정도, 얇고 편안한 검은 티셔츠로 감춰지지 않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도, 내려다봐도 감탄이 나오는 날렵한 콧대도 더욱 남다르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재이는 그가 더 궁금해하기를 바랐다. 꾸짖든, 캐묻든 자신을 붙잡고 뭐라도 해 주길 바랐다. 그런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닿은 건지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뭐 하고 왔어.”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방 안은 어느새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재이는 해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를 너무나 가지고 싶고, 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기일에 그가 보여 준 행동은 그동안 위태롭게 흔들리던 재이에게는 너무 큰 타격이었다. 못내 쌓인 원망이 비뚠 마음을 만들었다. 그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었다. 재이가 말했다.

“나쁜 짓이요.”

그녀의 말이 무섭게 해준의 눈빛에 날이 섰다. 둘은 신경전을 벌이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을 그가 깨며 말했다.

“안재이 이리 와서 앉아 봐.”

“싫어요.”

평소라면 상상도 하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와인의 술기운이 미처 깨지 않은 재이에겐 가능했다. 신경이 곤두선 해준을 보자 가게에서 겪은 짙은 성적 텐션의 여운이 되살아났다.

“이리 와.”

“싫다고 했어요.”

재이는 그의 말을 받아치면서도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헷갈렸다. 끝없이 치솟는 공기의 기운은 단순히 적대의 기운이 아닌 이성 간의 복잡한 감정과 이해관계가 얽힌 것이었다. 재이는 그 긴장감의 순도가 궁금했다.

그 안에 사랑은 얼마나 있는지, 미움은 그에 비해 얼마인지, 단순한 정과 걱정이 더 큰지, 남자로서의 질투가 더 큰지.

재이는 생각 외로 불편한 심기를 낱낱이 드러내는 그를 보며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에게 매번 울며 매달리기 바빴는데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내가 전에, 아저씨를…… 불편하게 만들면 어떡하냐고 물었죠.”

재이가 셔츠 원피스의 단추를 풀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술기운에 발음은 뭉개지고 똑바로 서지 못하며 휘청거렸다. 그는 그 모습을 꿰뚫어 볼 듯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응시했으나 재이는 아랑곳 않고 혼잣말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아저씨가 나는 괜찮다고 했죠.”

한 개, 두 개 단추는 그녀의 허리께까지 내려갔다. 재이의 원피스가 후루룩 내려가 발밑으로 무너졌다. 재이는 홀가분한 몸으로 그의 앞에 섰다. 찬 공기가 몸에 닿아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재이를 바라보았다. 재이가 그를 도발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자, 확인해 보세요.”

재이가 보란 듯 팔을 벌려 보였다. 팽팽한 긴장감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해준은 자신의 이성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하며 일어섰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재이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앞을 막았다.

“나랑 자요.”

참다못한 그가 입을 열었다.

“후회할 짓 하지 마.”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오랫동안 마주쳤다.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눈치채기 무섭게 재이가 그의 얼굴을 붙잡은 채 입술을 맞추었다.

* * *

그는 재이가 집을 비운 몇 시간 동안 겪은 슬픔과 회의감에 다짐의 균열이 생긴 상태였다. 재준과 나머지 가족들의 기일에 멀쩡한 게 아니었다. 멀쩡한 척했을 뿐. 신경이 곤두서고, 평소보다 감정 변화의 폭이 큰 건 해준도 마찬가지였다.

이후로 재이가 가게에서 돌아왔다고 했을 때 그는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기분 나쁜 상상과 분노가 뒤섞여 신경질이 치솟는 상태였다.

일체의 연락도 받지 않던 재이가 보란 듯이 새벽 다섯 시에 귀가했다. 그것도 술 냄새를 풀풀 풍긴 채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거기까진 해준도 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게 그의 한계치였다.

“어딜 갔다 온 거야.”

“……가게요.”

대가 없이 헌신하며 아껴 온 재이였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고, 그렇게 될 거라 믿었건만 결과는 처참했다. 재이는 상처를 받고 방황하고 유윤재의 손에 닿았다. 순간 그는 자신이 병신짓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할 짓 하지 마.”

그는 이미 이 말을 할 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재이가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해준은 덤덤한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초조했다. 자신의 속내를, 욕망을 재이가 알아챌까 봐. 그리고 재이는 자신을 비웃듯 정확하게 말했다.

“이대로 가면 아저씨가 더 후회스러울걸요. 영영 궁금하고 시도 때도 없이 별별 생각이 들면서 화나겠지. 안 그래요?”

해준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러했으니까. 여기서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 봤자 재이는 사실을 알 것이다. 가끔 재이는 본인보다 유해준이란 인간을 잘 알았으니까.

그 뒤로 곧장 재이가 한 짓은 도저히 키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굳이 묘사하자면 입술 박치기에 가까워 보였다. 서툰 게 당연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너무나 떨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에 해준의 인내심이 동났다. 천하의 유해준이 안재이에게 넘어갔다. 그가 재이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 * *

해준이 자신의 허리를 잡고 가까이 당겼을 때도 재이는 실감 나지 않았다. 자신이 술을 먹은 건지 그가 술을 먹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해준은 재이를 붙잡고 키스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진짜 키스였나. 무작정 입술을 갖다 댄 행동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윤재와 어설픈 키스를 나눌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어설프게 입술을 뻐끔대다 말았던 건 애 장난처럼 느껴졌다. 재이는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 매달리다시피 붙잡은 채 그를 받아 냈다.

그는 재이의 안을 파고들었다. 둘의 혀가 농밀하게 얽혔다. 재이는 허겁지겁 그를 받아들이면서도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해준과 입을 맞추고 있다니. 드디어 동등한 남녀로서 선 것 같았다. 재이는 이 뒤를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서투르게 그의 키스를 받아 내면서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벅참이 차고 넘쳐 정수리에서 찰랑이는 듯했다.

재이는 그의 허벅다리 위에 올라가 앉았다. 엉거주춤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와의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뭉근하고 녹진한 그 느낌은 불꽃처럼 강렬하지 않았지만 재이를 완전히 잠식했다.

재이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몸을 밀착했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심장이 터지거나, 이대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절대로, 절대로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둘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재이는 팔을 내려 그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해준은 그녀의 욕심을 허락하듯 귀 뒤를 따라 목덜미를 탐했다. 재이는 앓으며 고개를 젖혔고 해준은 재이를 마음껏 예뻐했다.

상상만 해 오던 발칙한 장면이었지만 그보다 현실이 훨씬 자극적이었다. 그에게서 나는 희미한 향수 냄새와 살내음,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근육과 살갗,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는 그의 완력까지.

재이는 애타는 기분을 숨기지 못하며 끙끙 앓아야 했다. 자신의 가슴이 그의 몸에 짓눌릴 듯 끌어안고 있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해준은 자신의 심장 박동을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그와 몸을 섞고, 이어진 채 흔들리고 싶은지 해준은 모두 다 알 것이다.

방 안에선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고, 신음을 삼키고,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주체할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재이가 입술을 떼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안아 주세요.”

욕망이 잔뜩 깔린 탁하디탁한 목소리였다.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은 듯한 서늘한 눈빛과 기운은 다시 없을 만큼 야했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얼굴로 은근하게 말했다. 이 와중에도 자신보다 여유 있는 모습은 얄밉기까지 했다.

“안고 있잖아.”

“그런 거 말고.”

“…….”

“밑에 이거, 안에 넣어 주세요.”

재이가 애타게 부탁했다. 어느새 자신의 허벅다리에 단단하고 두터운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도 자신의 마음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확인하자 더욱 조급해졌다. 한시라도 그와 빨리 이어지고 싶었다. 그의 것이 자신을 헤치고 들어오길 바랐다.

“빨리, 빨리…….”

울 것처럼 매달리는 재이를 보며 그는 키스로 입을 막은 뒤 침대에 뉘었다. 해준이 재이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재이가 그에게 모든 걸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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