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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재는 재이의 전화를 받고 함께 있던 여자를 급히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목표물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여자는 그와 깊은 관계의 상대가 아니었다. 며칠 전 술을 마시러 바에 갔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매번 새로운 사람이 필요한 유윤재는 그런 식으로 시간과 정성을 소비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재이는 특별하고 중요한 여자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밤이라 길이 안 밀리더라구요.”
아무것도 모르는 재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재이가 검은 커튼을 쳐 두고 무드 등을 켜 놓은 가게를 둘러보며 물었다.
“영화 뭐 봤어요?”
“그냥 삼류 코미디. 이제 공주님이 오셨으니까 좀 고급스러운 거로 골라 볼까.”
유윤재는 컴퓨터에 저장된 목록을 훑으며 영화를 골랐다. 재이는 별말 없이 함께 영화를 고르다 넌지시 말했다.
“저도 그냥 웃긴 거 볼래요.”
그런 단서를 놓칠 윤재가 아니었다. 어쩐지 한참 뒤에 갑자기 온다더라. 그 짧은 말로 대충의 스토리를 예상한 그가 재이를 떠보았다.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예?”
“얼굴만 봐도 느낌 와. 와인 마실래?”
“아……. 네.”
재이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기분이 처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전처럼 그냥 술을 마시고 까무룩 잠에 쉽게 들면 해준의 생각에서 벗어날 것 같았다.
둘은 영화를 틀었지만 막상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재이는 생각이 복잡했고, 윤재는 영화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이는 와인이 줄어드는 줄도 모르며 홀짝이다 자신도 모르게 굉장히 취해 버렸다. 윤재는 그때까지 시시껄렁한 가벼운 이야기만 이어 가다 물꼬를 텄다.
“오늘 기분 나쁜 거.”
“예에.”
“전에 말한 그 남자 때문이지?”
웬 남자? 재이가 눈을 흐리게 뜨며 물었다.
“누구요?”
“뭐, 섹스어필 안 되냐고 툴툴거린 날 말이야.”
“아……. 예, 맞아요.”
윤재의 입에서 ‘섹스’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가 흠칫했으나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술기운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맨 정신이었으면 끝까지 잡아뗐겠지만 오늘은 너무나 속상해 누구에게라도 토로하고 싶었다.
“설마 아직 못했어?”
“아직은 무슨. 한 번도 못 했어.”
술에 취한 재이는 존댓말과 반말을 넘나들며 어눌하게 대꾸했다. 윤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가 문제 있는 거 아니고?”
“……그럴 리가 없어요.”
재이가 술김에도 분명히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처음엔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해준은 반년에 한 번 건강 검진을 했다. 성 기능에 문제가 있었다면 후계에 집착하는 유 회장이 가만히 뒀을 리가 없다.
“많이 좋아하나 보네. 아직도 그런 거로 끙끙 앓고. 도대체 누구냐.”
“몰라요…….”
재이가 울적하게 대꾸했다. 윤재는 그 상대가 당연히 해준임을 알았으나 재이의 마음을 열기 위해 모르쇠 했다.
“못 가지는 거 가지고 싶다고 안달복달하면 어떡하냐. 그럴 때 방법은 딱 한 개야.”
“뭔데요?”
“딴 주머니 차는 거.”
시무룩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던 재이가 윤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무드 등이 드리워진 윤재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재이가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바람 안 피워 봤어?”
“피울 일이 뭐가 있어.”
“한번 해 봐.”
“왜 그래야 하는데……?”
뱀이 선악과를 내밀 듯 윤재가 재이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편안해질 거야.”
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젯거릴 돌렸을 것이다. 바람이란 부도덕한 걸 언급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을 정도로 맹목적인 사랑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들렸다. 해준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었고, 그가 못내 미워 속을 썩이고 싶었다. 유유히 결혼을 진행하는 그를 보며 하루라도 덜 애달파하며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재이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입을 뗐다.
“……들키면 어떡해?”
“안 들키면 네 거라도 돼?”
윤재가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둘 사이는 말이 끊기고 드문드문 잔잔한 영화 소리만 울렸다. 재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고 윤재는 그런 재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속상해?”
“그냥…….”
재이가 말을 흐렸다. 유윤재는 이미 만취해 버린 재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예쁘진 않지만 모난 데가 없이 새침한 인상.
해준의 품에서 애지중지 자라 온 재이를 마냥 철없는 깍쟁이일거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깨끗한 백지장 같았다. 해준은 그래서 더욱 집착스럽게 지켜 온 걸지도 모른다. 적당히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예 새것이었으니까.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키스할래?”
유윤재는 진심으로 그녀를 해치고 싶었다.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인 유 회장과의 얄팍한 약속은 잊힌 지 오래였다.
재이가 백지장이라면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마구잡이로 낙서를 휘갈겨 놓고 싶었다. 맹목적으로 유해준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그의 기저에 깔린 해준에 대한 박탈감과 자격지심이 꿈틀거리며 괜스레 재이도 못마땅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내가 뺏어서 넘어오면, 형을 이기게 된다. 자신을 항상 벌레 취급하는 그 잘나고 고고한 인간에게 엿을 다발로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딴 주머니를 차라고.
재이는 유윤재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으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를 내버려 두었다. 술에 취해 몸은 축축 늘어지고, 머릿속과 시야가 팽팽 돌았다. 그 와중에도 원망스러운 얼굴이 산발적으로 떠올랐으나 그게 더욱 오기를 부추겼다.
유윤재의 입술이 재이의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재이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윤재가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였다.
“괜찮지?”
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거절도 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의를 느낀 윤재가 그녀의 얼굴을 돌려 입술에 키스했다.
* * *
해준과 재이가 미국에 있을 시절, 윤재도 근방의 지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말이 유학이지 당시 윤재는 이미 다른 학교에서 쫓겨나 가까운 친척 집을 빌려 머물고 있었다.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밤마다 파티를 열며 아침에는 처음 보는 여자와 잠을 깨는 일상이었다.
해준은 윤재와 이따금 연락을 나눴지만 데면데면한 가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작은 아버지 내외는 늘 반듯하고 성실한 해준이 윤재를 챙겨 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해준아. 가끔 윤재 찾아가서 시간 좀 보내고 좋은 말도 해 주면 안 될까? 애가 영 갈피를 못 잡네…….
“죄송해요. 그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래도 네가 형으로서 좀.
“작은 어머니, 정 그러면 작은 아버지랑 같이 미국으로 건너오셔야죠. 저는 못 합니다.”
그는 재이를 건사하고 학업과 경제 활동을 병행하는 데 매진하는 중이었기에 그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너무한 거 아니니? 회장님한테 듣자 하니 너 데리고 사는 애한테는 지극정성이라던데. 윤재가 널 어릴 때부터 얼마나 따랐어?
“재이는 더 잘 따라요.”
집안 식구들에게조차 매정했던 해준은 피도 섞이지 않은 재이에게 헌신하는 것으로도 말이 많았다. 집안에서 재이가 눈엣가시가 되고, 평판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 건 그쯤부터였다.
그러나 해준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에 연연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하는 게 맞았다. 식구들이 재이를 탐탁찮아 해 봤자 직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없었고, 얼른 자신이 자리를 잡아 재이를 지켜 주면 그만이었다.
-정 그러면 이제 크리스마스니 그 애 데리고 밥이라도 먹으려무나. 밥값이나 비용 같은 건 회장님한테 말해 놓을 테니…….
해준이 냉정하게 말했다.
“안 되죠.”
어차피 크리스마스에 윤재는 제 친구들과 마약 파티를 벌이며 오늘이 이브인지, 크리스마스 당일인지 분간하지도 못할 것이다. 굳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기 건너편에서는 자신의 반응이 예상보다 더 냉정하여 조금 놀란 듯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니.
“애 교육에 안 좋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끊을게요.”
그가 곧장 전화를 끊었다. 해준이 말하는 ‘애’는 당연히 재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작은 어머니가 역정을 내는 게 들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해준은 재이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윤재를 경계해 왔다. 자신은 성가시고 말 문제이지만 재이가 엮이면 곤란했다. 윤재를 포함한 모든 유해한 것들은 근처에도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재이는 그렇게 신경 써 온 존재였다.
재이가 집을 박차고 나가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울며 매달리던 재이의 눈빛이 힘을 잃고 말끝을 흐렸다. 점점 한계에 다다르는 게 느껴졌다. 사실 그는 이만큼 버틸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재이가 자신을 스쳐 지나갔을 때 붙잡고 싶었으나 그는 주먹을 말아 쥐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금 잡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한계를 넘어 실망으로 가서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그 단계까지 기다려야 했다. 재이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을 때까지. 어떤 기대도 없이 자신이 베푸는 것을 받기만 할 때까지.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여전히 원하는 건 오빠 하나뿐인데.”
자신이 원하는 것도 변하지 않는 단 하나였다. 재이가 고난을 모르고 편안하게 자라는 것. 하지만 그렇게 귀하게 키워 온 아이를 방치하고, 슬프게 만들고,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해야 하는 짓일까. 회의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소파에 앉은 그는 이내 심한 서글픔에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