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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윤은 가윤대로 이 결혼을 진행하는 데 스트레스가 많았다. 가질 수 있는 만큼 감내해야 하는 영역이라 생각하며 참았을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해준에게 진심이 되어 간다는 점이었다. 그가 누누이 말했던 ‘일’적인 접근이 가윤에겐 어려웠다. 그의 푸대접에 회의감까지 드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가윤은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살면서 얻은 몇 번 오지 않을 기회임을 알기에 포기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비등한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완벽한 외모와 걸맞은 업무능력, 그보다 더 완벽한 집안. 가윤은 그의 겉과 속 모두 가지고 싶었다.

집안에서도 가윤의 결혼에 거는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었다. 해준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길길이 뛰던 아버지는 유 회장의 입김으로 사건이 잠잠해지자마자 결혼을 재촉했다.

“지분 같은 거에 대해서 대충 이야기가 나온 게 있냐?”

그중에서도 대원에서 운영하는 사립 미술관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다. 퇴근 후 본가에 들러 쉬고 있던 가윤에게 부친이 기대하며 물었다. 가윤은 좋지 못한 소식을 전달하는 게 껄끄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미술관을 동생한테 준다던데요.”

“뭐, 누가?”

“유해준 본인이요.”

부친은 가윤의 대답을 듣자마자 얼굴이 굳어 득달같이 물었다.

“동생이라면 전에 걔 말이냐?”

“그렇죠, 뭐.”

가윤은 조금 맥이 빠진 채 덤덤히 말했다. 여전히 그녀는 결혼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자신에게 매정할 정도로 쌀쌀맞은 그가 떠올라 조금 위축된 상태였다.

“넌 도대체 무슨 애가 그렇게 밥그릇을 못 찾아 먹어?”

불쑥 들어온 비난의 말에 가윤도 신경질이 치솟았다. 그녀가 부친에게 쏘아붙였다.

“안 준다는데 어떡해요. 그럼 뺏어요?”

“뺏어야지! 넌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

부친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연히 가윤이 맡아 운영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내가 그러려고 너 뼈 빠지게 키우며 가꿔 놓은 줄 알아? 너 인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빠 돈 써 가며 지원해 주고 있잖아. 돈이 그냥 나오냐!”

“갑자기 왜 돈 이야기가 나와요?”

“네가 꼬장꼬장하게 구니까 누가 마음이 동하겠어! 듣자 하니 미국에서 서로 뒷바라지하면서 정도 돈독한 모양이던데 걔라도 네 편으로 만들어서 꾀든가 해야지!”

“…….”

“이렇게 답답해서야, 으이구!”

부친은 실제로 가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쏟는 중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와 격을 맞추어야 한다며 명품관에 데리고 가 원 없이 쇼핑하게 허락했다. 가윤은 투자를 받는다는 생각 반, 다시 오지 않을 명분 있는 과소비에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꾸며 왔다. 물론 그녀도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 자식이랑 잠자리는 했냐?”

“예? 아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어떻게 된 게 사내새끼 하나 못 휘어잡아서 이런 꼴을 만드는지. 애라도 배서 오면 말을 안 해.”

가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그와의 성적 긴장감에 대해서는 그녀도 고민스럽긴 했다. 사람 맘이 가지 않으면 몸정이라는 것도 있는데 아무리 그에게 추파를 보내어 봐도 통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대시해서 한 번도 이런 목석같은 반응을 보인 적도 없었고, 이런 푸대접을 받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일부러 잠자리 이야길 꺼내도 오히려 ‘시험관’을 권유할 정도였다. 이런 사실마저 안다면 가족은 크게 실망할 것이다. 가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갈며 대들었다.

“아빠가 무슨 포주예요?”

“뭐라고?”

“다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가윤은 부친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서 자신의 방으로 대피했지만 여전히 눈치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늦은 저녁 그녀는 짐을 챙겨 나왔다. 자고 가라는 모친의 만류도 뿌리친 채 해준이 일하고 있을 대원으로 향했다.

“듣자 하니 미국에서 서로 뒷바라지하면서 정도 돈독한 모양이던데.”

아버지가 했던 말 중에서 특정 대목이 가윤을 답답하게 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 여자애에게 사족을 못 쓰는 걸까. 괜스레 그런 말을 들으니 이렇게 있다간 그와 영원히 거리를 좁히지 못할 거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그와 화해할 겸 그를 챙겨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분명히 오늘도 저녁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가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식집에서 특별히 도시락을 주문해 그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해준 씨 없다구요?”

하지만 돌아온 건 본부장님은 부재중이라는 권 비서의 짤막한 말뿐이었다.

“예. 오늘은 일찍 퇴근하셨습니다.”

그럴 리가. 매일매일 회사에 처박혀서 일만 하느라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자신도 만나 주지 않는 남자였다. 자신이 큰맘 먹고 깜짝 방문을 한 날 그런 운명의 장난이 일어났을 리 없었다. 가윤이 웃는 둥 마는 둥 하며 권 비서를 압박했다.

“안에 있는 거 알아요. 들여보내 줘요.”

권 비서는 그 나름대로 난감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 얼버무렸다.

“오늘 집안 행사 때문에 일찍 들어가셨어요. 아마 자택에서 업무 보고 계실 겁니다.”

“자택이요? 아…… 네, 알겠어요.”

가윤은 더 이상 조르지 않고 돌아갔다. 권 비서는 해준에게 연락할까 하다 오늘이 재준과 그 식구들의 기일인 만큼 그만두었다. 해준이 가윤에게 집 주소를 알려 줬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설마 찾아가는 일은 없겠지. 권 비서가 늦은 퇴근을 위해 짐을 챙겼다.

* * *

그녀는 가서 도시락을 건네주며 미안하다고 할 생각이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싸우다시피 하고 헤어진 이후로 둘은 다시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가윤은 여전히 자신이 잘못을 한 건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바쁜 시간을 내준 그에게 그 정도는 할 용의가 있었다.

가윤은 해준의 집으로 운전하는 내내 평범한 연인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늘 있던 일인 양 사소하게 다투고 화해하러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문득 자신이 찾아가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집에서 어떤 차림으로 있을까, 저녁은 먹긴 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갔을 때 막상 그의 집의 문을 연 건 안재이였다.

가윤과 재이는 서로를 보고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윤은 재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열이 뻗치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집에서 일한다더니 둘이서 노닥거리고 있던 거야?

또 안재이다. 매번 둘 사이에 생기는 불화의 씨앗은 이 볼 것 없는 계집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안재이의 실루엣만 생각해도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가윤은 짜증을 억누르며 물었다.

“오빠 집에 없니?”

하지만 이 발칙한 어린애는 자신만큼이나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가윤은 능숙하게 감정을 감추며 사회적인 태도로 재이를 대했다.

“……있어요. 웬일이세요?”

“회사에 없다길래. 오늘 집에서 일한다고 해서 먹을 것 좀 사 왔는데.”

곧 해준이 나타나 자신과 함께 아파트 밑으로 내려갔지만 마찬가지로 반가운 기색이란 털끝만큼도 없었다.

“왜 왔어요.”

“밥이나 같이 먹으려구요. 저녁 먹었어요?”

“정가윤 씨 앞으로 집에 말도 없이 찾아오지 마세요.”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당황한 건 알겠는데, 나도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라고요. 왜 독립했다는 애가 집에 있어요?”

그녀가 재이를 언급하자 해준의 눈빛이 달라졌다. 차갑게 식어 버린 그에게는 위압적인 기운이 일렁였다.

“못 있을 이유는 뭐지?”

가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큼 기분이 나쁘고 황당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 산다 싶어 한결 안심한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간 둘이서 얼마나 집을 오고 가며 뭔 짓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도 께름칙했다.

“엄연히 말하면 남이잖아요. 당신 사랑한다고 그러는 걸 내 면전에다 대고 말했는데 내가 기분이 안 나쁘게 생겼어요?”

가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터트리고 씩씩거리며 해준을 바라봤다. 이후로도 둘의 다툼은 같은 말이 반복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은 해준이 잔뜩 스트레스 받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통보했다.

“결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뭐라구요?”

“몇 번이나 경고했던 것 같은데. 우린 그냥 비즈니스 사이고, 그런 것에 대해 기분 나쁘면 둘 다 피곤해지겠지.”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뭐든, 간섭하지 마.”

가윤의 자존심이 구겨졌다. 해준이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해준은 오늘도 너무나 완벽한 모습이었고 가윤은 그를 앞에 두고 도저히 돌아설 수 없었다.

“선을 긋는 것도 내가 하는 거야. 우리가 비즈니스 사이라는 걸 암묵적으로 합의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그게 아닌 거 같군. 사적인 마음을 바란다면 다른 놈 찾아가는 게 좋을 거야.”

“참 쉽네요. 그런 말 하는 게.”

“더한 말도 할 수 있어. 마지막 경고야.”

가윤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은 결혼을 접자며 달려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재이가 여전히 그의 집에 드나드는 걸 알아냈으니 새로운 대처 방안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응어리진 신경질은 쉽게 풀어질 거 같지 않았다. 가윤은 도로 도시락을 가져가 차에 타며 말했다.

“나도 경고할게요. 비즈니스를 할 거면 성의껏 해요. 자꾸 선 못 지키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해준은 속으로 가당찮은 소리라고 생각하며 대꾸도 하지 않고 집으로 올라갔다. 가윤은 성격상 본인의 말마따나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똑똑하고 말이 잘 통할 거라 생각해서 추진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가윤은 자꾸만 선을 넘으려 한다. 그 선은 재이에게 화살이 될 것이다. 이미 그녀는 인턴 과정을 방해한 전적이 있다. 해준은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해야 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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