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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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남의 일이라면 매사에 무관심하다 못해 무정했다. 경주마처럼 시야를 가리고 앞만 보며 최선을 향해 뛰어왔다. 남이 잘되든 못되든 그의 관심 밖이었다. 당장 본인조차 밥도 잠도 잊고 사는 인생이니 주위에서도 그의 관심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유일한 예외는 재이뿐이었다.

그는 재이를 태우고 집에 도착할 즈음 물었다.

“아까 통 못 먹더라. 집에 가서 뭐 좀 더 먹자.”

식당에서부터 재이가 불편해하는 걸 눈치챈 지 오래였다. 처음에 몇 숟갈 크게 뜨고는 그 뒤로 먹는 둥 마는 둥. 아마 여전히 배가 고플 것이다. 그는 그게 내내 신경 쓰였다. 재이가 조금 고민하다 느리게 입을 뗐다.

“피자 먹을래요?”

“피자?”

뜬금없는 메뉴 선정이었지만 그는 재이가 뭘 먹는다고 해도 함께 먹을 의향이 있었다. 피자는 사실 둘이 미국에서 지지리 고생할 적 겪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때문에 귀국하고는 찾지 않게 된 메뉴였다. 재이가 잠시 뜸 들이다 작게 말했다.

“네. 오빠가 좋아했잖아요. 괜히 생각이 나네요.”

“그래. 피자 먹자.”

재이가 피자를 찾은 이유는 문득 오빠가 너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준이 살아 있다면 분명 자신의 편을 들어 주며 크고 작은 일에 함께 화냈을 것이다.

재준의 자리를 대신해 주던 해준이 이제 사뭇 남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그 빈자리가 더욱 컸다.

둘은 피자를 주문한 뒤 배달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재이는 익숙하게 식탁에 수저와 그릇을 놓으며 제대로 된 끼니를 해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식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재이가 의아하게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윤재가 보낸 것이었다.

[가게에 영화 보러 올래?]

“…….”

누가 보면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오해할 법한 소지가 다분했다. 재이가 당황하여 제풀에 메시지를 삭제해 버렸다. 해준이 씻으러 들어간 욕실을 살폈으나 계속 물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준이 윤재와 일하고 가까워지는 걸 못마땅해해서 나온 행동이었고, 자신이 다른 남자와 관련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재이는 해준이 씻고 나온 후에도 설명할 수 없는 죄스러움에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보였다. 해준은 머리를 간단히 말린 다음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재이는 잠시 고민하다 그에게 물었다.

“…게임 해도 돼요?”

그와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는 자연스럽게 나왔던 말이 이렇게 껄끄러울 수가 없었다. 재이는 게임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가 베푸는 특별 대우가 좋아 그의 휴대폰을 빌려 가곤 했다.

“그럼.”

혹시 거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조마조마했던 맘과 다르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재이는 자신에게 조금 유해진 그의 반응을 실감했다. 어떤 마음의 변화 때문일까.

여자와 싸운 걸까? 해준은 독단적인 면이 있어 가윤처럼 성격이 강한 스타일과는 종종 마찰을 빚고는 했다. 재이의 머릿속을 스치는 몇몇 생각들은 다시 한번 울리는 문자 수신음에 모두 증발했다.

♬♪

[벌써 자?]

재이는 액정 위에 뜬 윤재의 문자를 보고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지만 재빠르게 지우는 데 성공했다. 해준은 태블릿 피시로 메일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저 뭐 물어봐도 돼요?”

“뭐든.”

“그 언니 어디가 좋아요?”

재이는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에겐 상처일 걸 알면서도, 미약한 죄책감을 덮기 위해 ‘당신은 여전히 내게 미안할 짓을 하고 있잖아.’라고 되짚을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준이 심드렁한 얼굴로 태블릿 피시를 터치하며 대답했다.

“좋아서 하는 게 아니야. 안재이, 이건 일이야.”

“그 언니는 아닌 거 같던데요.”

“결과 외의 부가적인 걸 바라는 마음이 생기니까 그런 거야.”

“무슨 뜻이에요?”

“글쎄. 내가 잘해 준다면 본인의 체면도 서고, 여러모로 득 될 게 많으니까. 원래 인간의 욕심을 끝이 없다고 하잖아.”

“으음.”

그의 말에 재이는 싱거운 호응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이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가윤은 명백하게 그를 좋아했다. 가윤이 해준을 쳐다볼 때 눈빛은 반짝이며 생기가 돌았다. 재이는 그 사실에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해준이 어떤 푸대접을 해 주어도 그와 발전하고 싶은 여자들은 늘 있었기에 그리 놀랍진 않았다.

“이 바닥이 다들 그렇지.”

해준이 덤덤하게 말했으나 재이의 맘에 썩 차는 말은 아니었다. 한쪽은 진심인 결혼.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서로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걸 알면서 아닌 길을 가는 해준이 답답했다.

분명 자신의 직감은, 그의 행동은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 매번 후계자라는 무거운 짐을 감내해야 했던 그를 그 진창에 순순히 축하하며 보내 줄 수 없었다.

“아저씨.”

“그리고 전부터 내가 왜 아저씨야.”

재이는 일부러 아주 짓궂은 말을 내뱉었다. 그의 반응으로 속내를 유추하고 싶었다.

“키스하고 싶으니까요. 오빠 동생은 안 되잖아요.”

그녀의 말에 업무를 검토하던 해준이 시선을 들자 눈이 마주쳤다. 아주 깊어 속내를 읽기 힘든 눈빛이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를 떠나 자신을 가장 강렬하게 바라본다는 건 확실했다. 그가 뭔가 할 말을 삼킨 듯 뜸 들이다 재이를 불렀다.

“안재이.”

“가족은 안 된다면서요. 나 이제 남 할래요.”

“그럴 수 없어.”

“그럼 나랑 한 번만 해 봐요. 키스. 그러고 나서.”

그때 재이의 말이 초인종 소리에 끊겼다.

♪♬

기막힌 타이밍에 재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의자에서 내려가 현관으로 갔다.

“누구세요?”

습관적으로 물었지만 속으로 ‘피자겠지.’라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재이가 한순간에 가족을 잃었을 때도 그랬고, 무성의하게 선을 보러 다니던 남자가 결혼을 하겠다며 알렸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그랬다. 자신이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가윤을 봤을 때 재이는 뭔가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 * *

“오빠 집에 없니?”

가윤이 일식집 종이봉투를 든 채 재이 뒤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재이의 머릿속에 아주 많은 생각이 스쳤다. 둘이 집까지 자주 드나드는 사이인가.

“……있어요. 웬일이세요?”

“회사에 없다길래. 오늘 집에서 일한다고 해서 먹을 것 좀 사 왔는데.”

당황한 건 자신뿐만이 아닌 듯했다. 가윤도 적잖이 난감한 얼굴로 설명했으나 눈빛에는 마땅찮음이 가득했다. 자신이 당연히 독립했다고 알고 있어서 이 시간에 여기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여자 둘 사이에서 애매한 침묵이 감돌았다. 가윤은 돌아가지 않았고 재이는 그녀를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가윤이 재이 뒤를 보며 반색했다.

“아, 해준 씨.”

재이가 뒤돌아보았다. 현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찾아온 해준도 가윤이 올 거라곤 생각지 못한 듯했다.

재이는 설명 좀 해 보라는 듯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해준은 신발을 신고 가윤과 함께 나갔다.

“나가서 이야기 좀 하다 올게.”

“…….”

해준조차 영문을 모르는 듯하여 재이는 차마 나가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문이 닫히고, 그와 가윤이 대화를 하러 떠났다.

재이는 식탁으로 돌아왔지만 가윤이 찾아온 게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아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게 상황 파악을 했다. 그제야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싶었지만 그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도대체 이 시간에 여긴 불쑥 왜 찾아온 걸까. 그간 둘이 어떤 사이로 발전하게 된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시시각각 감정 변화에 시달려야 했다.

♪♬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나간 지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재이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쫓아갔다.

“피자 왔습니다.”

하지만 재이를 맞은 건 막 도착한 뜨거운 피자였다. 재이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배달원의 인사에 대꾸도 하지 못했다. 식탁에 올려놨지만 뜯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피자는 점점 식어 갔고, 혼자 남은 재이는 하늘에 있을 가족들의 생각이 났다. 하필 기일에 그녀를 따라 나가야 했을까. 나가서 이렇게 오래 있다 올 일인가. 설움과 짜증으로 재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하다.”

그때 해준이 돌아왔다. 그가 재이의 얼굴을 살피며 사과했다. 재이는 이미 뭘 먹을 생각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가 돌아보지 않고 피자 박스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옛날에 기억나요?”

“뭐 어떤 거.”

해준은 재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고, 재이는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피자를 시킨 걸 후회했다.

“우리 미국에서 생활비 계산 잘못하고 차까지 고장 나서 식은 피자 한 조각 둘이서 나눠 먹었잖아요.”

“…….”

둘 다 난생처음 겪는 재정난과 빠듯한 생활에 몹시 지쳐 있을 때였다. 그런 유례없는 날들을 둘은 함께 보내고 극복해 왔다. 한때는 그런 사이였는데.

“……근데 지금은 멀쩡한 한 판이 와도 그만큼 행복하질 않네요. 그때 힘들었지만 앞으로 더 행복할 거라고 믿으면 배도 고프지 않았는데.”

“재이야.”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여전히 원하는 건 오빠 하나뿐인데.”

재이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짐을 챙기고 집에서 나왔다. 돌아온 그의 설명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만큼 재이는 지쳐 있었다.

홧김에 휴대폰을 들어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도 돼요?”

-지금?

“예. 혹시 영화 끝났으면.”

-영화는 또 틀면 된다고.

윤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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