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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데이트 같은 시간을 나눌 때는 둘만이 교류하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기에 괜스레 눈치 보이는 상황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바쁜 해준은 일부러 휴대폰을 꺼내지도 않고 있었으니.

“여보세요?”

-어, 직원. 어디야.

“아. 지금 밖에서 볼일 보고 있어요. 서울은 아니고 파주요.”

-언제 와. 나 심심해.

스피커폰도 아니었지만 재이와 해준의 거리가 가까워 말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재이는 그냥 볼일이 있어 오후 중에 복귀하겠다고 이야기한 상태였다.

-달랑 있는 직원 없으니까 너무 쓸쓸하다. 나 안 보고 싶어?

“아. 아저씨들도 많으니까요.”

보고 싶다니. 가끔 친근하게 대할 때는 있어도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재이는 당황하여 얼렁뚱땅 웃으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윤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저녁 같이 먹지 그래. 연장 근무 때워 줄게.

“예? 왜요?”

-나 혼자서 밥 먹는 거 싫어하잖아.

재이가 당황하여 연신 쩔쩔매고 있자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해준이 손을 내밀어 휴대폰을 달라는 듯 까딱였다. 재이는 망설이다 휴대폰을 건넸다. 해준의 말은 거절할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가 전화를 건네받고서 통보했다.

“그럼 내가 같이 가지.”

-아, 형 옆에 있어?

옆에 있냐니, 이 여우 같은 새끼. 해준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태평하게 대꾸했다.

“당연히 같이 있지.”

전날 저녁에 해준이 재이를 데리고 갔고, 다음 날 반차를 썼으니 당연히 둘이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재이가 뭘 하나 싶어서 오전부터 부랴부랴 전화를 했겠지. 해준은 윤재를 잘 알았다.

전화는 어영부영 끝났다. 해준이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재이는 음식을 먹느라 입을 오물거리면서도 연신 눈치를 살피며 힐끔거렸다.

“……이러니까 꼭 옛날 같네요.”

어렵게 뗀 말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재이의 애틋함이 깔려 있었다. 해준은 담장의 무성한 초록 풀과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남자답고 깨끗한 얼굴에 말끔한 차림으로 차분히 머리를 내리자 더욱 그랬다. 바르고 정제된 느낌의 남자는 타고난 만만치 않은 기운과 어우러져 아우라를 뽐내곤 했다.

재이의 말에 해준이 빵을 썰어 그녀 앞으로 밀어 주었다.

“글쎄.”

“…….”

“지금은 현재 진행이잖아.”

커피를 마시던 재이는 그의 말에 잠시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가슴을 관통하는 담백한 말에 잠시 벙해졌다가 다시 제 자신을 수습했다. 상황을 얼버무리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사실인데 뭘.”

재이가 열이 오른 제 얼굴을 들킬까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이미 귀 끝이 붉어져 숨길 수 없는 상태였다. 입이 마르며 침 넘기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걸 숨기려 커피를 마셨지만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재이는 이젠 옛날 일이라며 암묵적인 선을 그으려 노력했지만 그는 말없이 선을 이어 나갔다. 그의 이런 알쏭달쏭한 태도가 재이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 * *

둘은 납골당에서 편안히 잠든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서울로 복귀했다. 재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음에 오겠다고 약속했고, 해준은 재이의 안녕을 빌어 달라며 기도했다.

유윤재는 식당에서 둘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해준은 여전히 마땅찮은 마음이었으나 재이이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오, 왔네.”

해준이 반가운 인사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먼저 먹고 있지 그랬어.”

“무슨 말이야. 나 혼자 먹는 거 싫어서 둘이 불렀잖아.”

윤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찜찜하고 께름칙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아 말을 줄였다. 유윤재가 둘을 보며 낭창하게 물었다.

“파주 갔다 왔다고? 데이트했어 둘이?”

“바람 좀 쐬고 왔어요.”

재이가 작게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이 가족들의 기일이며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비화까지 밝혀야 했으니 그냥 얼버무렸다. 사실을 모르는 윤재가 짓궂은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이다 해준에게 물었다.

“아하. 와이프는 바쁘대?”

예상한 공격이었다. 악의 없이 물어봤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보이는 윤재에게 해준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무슨 와이프.”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도장을 찍어야 와이프지.”

남자 둘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재이는 이미 차에서부터 해준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체할 거 같았다. 게다가 가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속이 편치는 않았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수저를 놓은 채 물만 마셔 댔다.

그냥 적당히 식사만 하고 끝났으면 좋겠는데 남의 속도 모르는 윤재는 계속해서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형 축의금 얼마 해 줄까?”

“안 받을 거야.”

해준이 딱 잘라 대답했다. 윤재는 한탄하다 재이에게 물었다.

“어허. 너는 얼마 할 거야?”

“나?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축의금. 축하하는 의미로 주는 그런 거 아닌가. 돈이라면 얼마라도 줄 수 있지만 그의 결혼을 축하해야 한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재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결혼을 축하해야 한다니. 의례적인 것일 뿐이라도 자꾸만 그 의미에 집착하게 되었다. 옆에서 재이를 보고 있던 해준이 차분히 안심시켰다.

“너는 할 필요 없어. 괜찮아.”

윤재는 두 사람의 속을 흉흉하게 뒤집어 놓고 나 몰라라 식사를 이어 갔다. 이게 그의 의도였다.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온 두 사람에게 외부인을 상기시켜 정서적인 거리를 벌려 놓는 것.

해준은 그런 의도를 고스란히 간파했다. 이대로 넘어가기엔 그의 성격은 그리 유순하지 않았다. 해준이 고기를 썰며 유윤재를 향해 입을 뗐다.

“아. 접때 청담에서 그 사람 봤어.”

“누구?”

“그때. 그 여성분. 다시 한국 들어온 거 같더라.”

순간 유윤재는 칼질을 멈췄다. 해준은 태연하게 맞은편 사촌 동생을 보며 고기를 씹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란 표정이었다. 내용을 자세히 모르는 재이는 대수롭지 않게 샐러드를 덜어 내는 중이었다. 유윤재는 일단 표정 관리를 하며 발뺌했다.

“……누구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해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반응이 당연했다. 알은체를 했다간 무슨 사이냐고 했을 때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닐 테니. 해준도 귀한 식사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이쯤에서 물러났다.

“이 녀석이 원체 여자가 많아서 말이야. 혹시 친구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해 주지 마.”

농담으로 마무리했지만 유윤재의 안색은 그때를 기점으로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농담이 줄어들고 억지웃음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을 속여도 해준을 속일 순 없었다. 재이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식사를 조금 하다가 그만뒀다.

셋이 식당을 나올 무렵, 해준이 먼저 재이를 차에 태웠다. 그가 잠시 밖에서 권 비서와 밀린 일에 대한 통화를 하는 중 유윤재가 담배를 뒤적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해준이 전화를 끊었다. 담배를 문 유윤재가 앞을 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형. 난 몰랐는데.”

“…….”

“형은 회장님이랑 정말 닮았어.”

그건 명백한 비난이었다. 유윤재는 해준이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해준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히 경고했다. 어떤 이유와 의도이든 재이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고작 이런 놈이 껄떡거릴 만큼 금지옥엽 귀하게 키운 게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도, 자신이 미남계를 쓰는 한이 있어도 윤재는 허락할 수 없었다.

과거와 실체를 감춘 윤재를 해준이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당연한 소리 하지 마. 시간 아까우니까.”

해준이 차갑게 대꾸했다.

* * *

유윤재가 받아치기도 전에 해준은 차에 올라타 재이를 태우고 떠났다. 윤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지긋지긋한 새끼들.”

그는 뒷조사라면 이제 신물이 나는 인간이었다. 세상에 흥신소가 없었다면 윤재는 훨씬 더 삶이 매끄러웠을지 모른다. 그가 해 온 나쁜 짓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을 테니까.

유윤재는 신경질적으로 차 키를 챙겨 움켜쥐고 가게 앞을 떠났다. 오늘도 그의 도착지는 그리 좋지 않은 동네의 빌라 앞이었다.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전화를 걸까 하다 해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그 여성분. 다시 한국 들어온 거 같더라.”

청담에서 마주쳤다는 말은 분명히 거짓일 것이다. 여자는 그런 곳을 오갈 만큼의 여유와 취향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여자의 생활 반경은 기껏해야 이 썩은 동네 근방일 것이다.

윤재는 고민해야 했다. 뒤를 밟혔다면, 이 사실을 여자에게 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여자도 이 사실을 알고 나름의 판단을 할 테니까. 하지만 윤재는 선뜻 연락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리면 금세 자신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닐 게 분명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 그의 차창을 노크했다. 의자를 한껏 젖혀 뒤로 눕듯이 있던 유윤재가 창문을 내렸다. 차 옆에는 무척 화가 난 듯한 그 여자가 모자를 쓴 채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윤재가 말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여자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다 토해 내듯 물었다.

“너 도대체 여기서 뭐 하니?”

윤재는 비실비실 웃으며 약 올리듯 말했다.

“당신 보러 왔어요.”

장난 같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여자는 유윤재를 잘 알았기에 주위를 둘러보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미쳤니? 기어코 여기까지…….”

“이야기 좀 해요.”

“당장 가……!”

그가 한국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그는 이야기를 좀 더 하길 제안했으나 여자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돌아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편의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소주로 추정되는 유리병이 몇 개.

윤재는 허리를 들어 주위에 주차된 차를 살폈다. 매번 익숙한 차량이 보였지만 오늘은 주차장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낡은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아마 오늘은 여자의 남편이 방문한 듯했다.

“……병신 새끼.”

유윤재가 고개를 저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자기가 처먹을 거면 본인이 사 와야지. 조금 더 있다가도 무방했으나 여자가 술 심부름을 하는 꼴을 보니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유윤재는 자신의 요란한 외제차를 끌고 한강대로 위를 달렸다. 대교를 몇 개나 건너며 속이 뻥 뚫리는 청량감 짙은 노래를 들어도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해야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항상 밤을 사랑하던 그는 이대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고심하던 그의 머릿속에서 문득 재이가 떠올랐다. 그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게에 영화 보러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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