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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는 해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코끝까지 반듯한 콧대와 보기 좋게 시원하게 뻗은 입매. 남자다운 옆 턱과 그려 놓은 듯 섬세하게 난 눈썹까지. 입체적인 두상과 뚜렷하지만 담백한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이 밤 차를 타고 그와 함께 영영 도망치고 싶었다.
괜찮다는 그의 말에 오기와 욕심이 솟아 그를 도발했다.
“제가 밤늦게 방에 찾아가면요?”
해준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재이. 그런 장난 치는 거 아니야.”
“장난 아니에요. 제가 집 안에서 벌거벗고 다니면 어쩌려구요?”
“넌 추위를 많이 타. 그럴 일 없어.”
재이는 단호한 그의 말에 속이 상했다. 자신이 어떤 뜻으로 물어보는 건지 알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지조차 않고 끝끝내 외면하려 한다. 재이가 불퉁하고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제가 섹스하자고 조르면요?”
해준은 재이의 말에 말없이 차량의 속도를 줄였다. 혹시 내리라고 할 생각인가? 그녀가 당황하여 계기판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순식간에 차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해준은 갓길에 차를 정차했고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네 자유야.”
“…….”
“하지만 상처 받으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침묵이 흘렀다. 그의 말은 재이에게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완고했다. 수차례 자신의 마음을 밝혔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재이는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가자. 늦었다.”
재이의 표정을 확인한 해준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둘은 집으로 들어왔다. 집 안의 향기까지 익숙했지만 그동안의 부재 탓인지, 둘의 관계가 변한 탓인지 재이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재이가 외투를 벗으며 제 방으로 들어가려는 때에 해준이 말했다.
“내일 오전 열 시쯤 출발하려 하는데. 어때.”
“……열 시에 왜요?”
뜬금없는 말에 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해준이 재이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내일 재준이랑 어머니 아버지 기일이잖아.”
“…….”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던 재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요즘 안팎으로 정신이 사나웠고 카페 일을 끝내고 오면 다시 취업 준비에 매진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보다 바쁜 해준이 먼저 알고 있었으니까.
둘은 매년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들의 기일에 함께 참석했다. 작년에는 해준이 해외 출장을 갔다가 납골당 방문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재이는 기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당혹감과 함께 죄스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가서 잘 있다고 말씀드려야지.”
해준이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대원 그룹은 유 회장의 피와 땀이자 인생 그 자체였다.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가족에게 무정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밟아 가며 일구어 온 회사였다. 이 귀한 것을 가장 순도 높은 자신의 후계자에게 물려줘도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그룹을 위해 아들을 집안에서 내쳤고 유 회장은 하나뿐인 손자에게 자연스레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손자만큼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해준을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했고, 채찍질하게 만들었다.
유해준. 대한민국 굴지의 대원 그룹 재벌 3세. 부유한 배경과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남자.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해준도 따뜻한 가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그는 성장 과정 내내 외로움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결함을 품고 자라야 했다.
“야. 안녕. 너 더럽게 잘생겼다.”
“뭐라구?”
“너 진짜 무지 잘생겼다고.”
어린 시절, 입학 첫날 장난스럽게 다가온 재준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갔다. 해준에게 진정한 가족과 화목함을 느끼게 해 준 것도 안재준이었다.
둘은 교복을 입고, 다시 벗어 던져 성인이 될 때까지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야. 네가 막판에 잘못 가르쳐 줘서 그 문제 틀렸잖아.”
“글쎄. 잘못 입력한 사람 탓 아닌가.”
“야. 유해준!”
둘은 형제처럼 자라며 자신의 깊은 마음까지 공유하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재이의 부모님까지 해준을 따뜻하게 품어 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재벌가보다는 재준의 화목한 집안에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재준의 가족을 만나고 그는 비로소 내면의 홈을 메꾸게 되었다.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그 자리에 더 큰 홈이 파였다.
재이를 데리고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둘은 무척 큰 상처를 극복해 내야 했다. 특히나 재이는 그의 경영 수업을 위해 마음의 상처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로 넘어가게 되었다.
어리고, 여렸던 재이는 잦은 우울함에 시달렸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간신히 버텨 냈다. 그가 재이의 생명줄을 억지로 잡고 사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엄마 아빠가 날 보면 뭐라고 할까요.”
“응원하실 거야.”
“그러려나.”
재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해준이 주어진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사는 것이 이 모든 일이 그에겐 ‘남의 일’이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가족처럼 지냈지만 결국에는 그 한계가 있는 거라고.
일상이 망가지고 앉으나 서나 눈물이 비처럼 흐르는 자신과 달리 그는 너무 태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가족이라 생각했던 건 자신뿐인가 하며 서운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안재이. 오늘 학교 결석했어?”
미국에 도착한 지 반년쯤, 재이의 방황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재이가 결석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준이 수업 중간에 집에 들렀다. 불을 끈 채 방에 누워 있는 재이는 무기력해 보였다. 아주 깜깜한 방 안에서 등지고 누운 재이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네. 가기 싫어서요.”
“이번이 두 번째라며.”
“예.”
“안재이.”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안 돼요?”
재이가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해준은 언제나처럼 덤덤히 그녀를 격려했다.
“일어나. 시험 준비해야 한다며. 같이 나가서 도서관이라도 가자.”
“오빤 남의 일이라 아무렇지 않겠죠. 근데 난 아니란 말이에요.”
“남의 일이라니.”
요즘 기분이 수시로 오르내렸던 재이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멀쩡하게 밥 먹고, 학교 가고, 일하고. 오빤 가능하지만 난 아니라구요!”
“…….”
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이의 성격상 아차 싶었겠지만 오기와 자존심 때문인지 돌아보지 않았다.
해준은 억지로 재이를 다그치거나 화내지 않았다. 유 회장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보고 자랐기에 그는 항상 재이에 대한 감정선을 평이하게 유지하려 했다. 그는 말없이 재이의 방문을 도로 닫고 나섰다.
“하…….”
문이 달칵거리며 닫히자마자 재이는 헛웃음을 쳤다. 죄책감과 자포자기에서 오는 절망감이 소용돌이쳤다.
이미 해준은 피도 섞이지 않은 자신의 학비와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모든 게 맘처럼 되지 않았다. 자신이 모든 걸 망치고 있었다.
재이는 문득 어젯밤 해준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에게 미안해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는 해준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재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오빠!”
그때 재이는 해준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처음 목격했다.
“…….”
해준도 설마 재이가 쫓아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는 금세 침착하게 담배를 껐으나 재이는 못 볼 걸 본 듯 제풀에 놀라 가만히 서 있었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담배 냄새가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술 담배 모두 즐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술은 주량이 적지는 않았으나 할 일이 많고 정신이 흐려지는 게 싫다며 꺼려 했다. 담배는 피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담배를 피우다니.
그가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가 자신 때문임은 명확했다. 재이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보다 그의 손에서 쥐어진 휴대폰에 시선이 갔다. 액정에는 재준의 사진이 떠 있었다.
그녀는 인정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시련 속에서 자신을 끝까지 받아 줄 수 있는 해준에게 화풀이를 한 거라고. 이후로 재이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재이와 해준은 오전 일찍 납골당으로 출발했다. 재이는 하얀 원피스를 입었고 해준은 타이를 뺀 깔끔한 흰 셔츠에 슬랙스를 챙겨 입었다.
둘은 일부러 출발하는 길에 브런치 가게에 들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함께 밥을 먹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었다. 기일을 무겁게 보내지 않는 것은 둘만의 오랜 약속이었다.
해준은 날이 날이니만큼 휴대폰을 꺼 놓은 채 어떤 스케줄도 잡지 않았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자연광을 맞는 해준을 보니 새삼 옛날에 느낀 설렘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재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힘들게 짬을 내어 데이트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둘이 한가로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재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Rrrrrrr- Rrrrrrr-
[사장님]
재이와 해준의 시선이 동시에 발신자에 꽂혔다.
“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재이는 흠칫 놀라 해준의 안색을 살폈다.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는 재이의 휴대폰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니 전화 받아.”
아무렇지 않게 말했으나 그는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이었다. 재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휴대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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