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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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분명 악에 찬 가윤의 비명을 들었으나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권 비서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권 비서. 메시지 확인했어.”

-네, 본부장님. 며칠 전에 유윤재 씨 관련해서 여쭤보신 내용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뭔데.”

-그때 그 여성분이 한국에 다시 들어오셨더라구요.

“그래?”

-네. 그리고 윤재 씨가 어젯밤에도 다녀가셨습니다.

해준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둘 사이에 다시 교류가 있다니.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웬만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권 비서도 말하면서 조금 당혹스러운 어조였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거주하는 빌라 앞에 자가용을 타고 찾아가서 한참 동안 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으로는 약 30분인데, 휴대폰 통화 기록 같은 걸 좀 볼까요?

“……확실해?”

-예. 저도 의아해서 일단은 사람을 계속 붙여 놓은 상태입니다.

“일단 오케이. 알겠어. 사람만 붙여 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해준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말을 이어 나갔다.

“재이 집, 수도나 전기나 적당히 손봐서 고장 내 놔. 다시 수리하는 데 한참 걸리게.”

-며칠 정도 소요될 수 있게 할까요?

“아니. 한동안 내가 있는 집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처치해.”

해준의 의도는 명확했다. 더 이상 재이를 밖에서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게 집으로 불러야 한다. 통화는 짧게 끝났으나 여운은 길었다. 해준은 자신의 불길한 예상이 들어맞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신 나간 놈.”

해준이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그 난리를 겪고 아직도 그러고 살다니. 그가 고개를 저으며 재이가 일하는 가게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유윤재는 스물두 살이 되자마자 외국으로 쫓겨났다. 대학교 시간 강사와의 염문 때문이었다. 나이 차이도 꽤 났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도대체 자식새끼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애 딸린 유부녀랑 놀아나나요!”

“일단 고정하시고.”

“고정? 고정 같은 소리 하네. 당신 마누라가 서른 살 먹은 새끼랑 놀아나면 당신 고정할 수 있어! 이거 신문사에 제보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여자는 서른다섯에 애까지 딸린 유부녀였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겉으로는 대기업에 재직 중인 남편과의 사이도 돈독했고, 아이도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자라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여자의 남편은 이 사실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겠다고 나섰다. 안 되겠다 싶어 기업 차원에서 윤재의 휴대폰을 까 보았지만 사실상 그의 대시가 확연히 더 많았고, 여성은 시종일관 데면데면했기에 더욱 곤란했다.

“저놈 저거 데려와라! 몽둥이 가져와 몽둥이!”

유 회장과 가족들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사생활에 관한 지저분한 소문이라면 기함을 하는 유 회장은 윤재를 보며 죽일 듯이 화냈다.

“돈 주고 먹여 살려 학교 보내 놨더니 강사나 껄떡거리고 다녀! 몽둥이 가져와!”

윤재의 부모는 유 회장에게 많은 걸 빚졌고, 사실상 돈으로 따지면 윤재도 유 회장이 직접 키운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더욱 화를 피할 수 없었다. 유 회장은 꼴도 보기 싫다며 윤재를 외국으로 보내었다.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여자의 남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당신네 아들 뭐 하는 새끼야? 어? 외국까지 가서 남의 와이프한테 집적거려 왜!”

단순히 마지못해 연락을 이어 가는 것처럼 보이던 여자는 외국에서 윤재와 데이트를 하다 걸리기까지 했다.

집안 식구들조차 어안이 벙벙했다. 일방적으로 보이던 관계는 3년간 어떤 일이 있었기에 외국에서 데이트를 할 정도가 된 걸까.

기사를 막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쓴 돈과 시간은 막대했다. 이 사건은 유 회장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후로 유 회장은 지저분한 사생활과 염문이라면 진저리를 치다 못해 죽이려 달려들곤 했다.

유 회장은 윤재를 죽이겠다고 했으나 그의 부모가 회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것으로 무마되었다. 대신 유 회장은 영영 한국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때부터 윤재는 철저히 경영권에서 배제되었고, 유 회장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 * *

해준과 집안 식구들의 눈에는 윤재는 걸어 다니는 폭탄과 가까운 존재였다. 외국에 정착하기 무섭게 갖은 사고와 지저분한 연애 소식을 뿌리고 다녔다. 이 정도는 모두 예상한 그림이었으나 성병으로 한국에 들어와 병원을 들락거리거나 명색이 ‘대원의 아들’이라며 그룹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짓까지 일삼았다.

그는 전형적인 내놓은 자식이었고, 부담과 책임은 지지 않으며 윤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그 포지션을 선호했다.

해준은 윤재가 어떤 인생을 살던 본인의 자유며 큰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각자의 노선이 달랐다. 하지만 곱게 키운 재이가 그런 놈과 밀착해 일하는 것에 대해 용인할 수 없었다.

“형 웬일이야?”

해준이 가게를 찾았을 때는 윤재와 재이가 간이 책상에 마주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메뉴 연구를 하던 둘의 책상에는 종이와 먹다 남은 음료가 여러 개 있었다. 해준은 연락 없이 찾아온 자신을 보고 토끼 눈이 된 재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커피 좀 얻어 마시려고.”

“재이 때문에 왔구나?”

윤재는 능청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짐이 쌓인 곳에서 커피 메이커를 꺼냈다. 그나마 커피 믹스에서 발전했군. 해준이 그 모습을 보며 형식적으로 물었다.

“커피 머신은 언제 와.”

“머신은 천천히 시키려고. 인테리어 가구 짜 맞춘 거 오면 맞춰서 주문해야지.”

“그래. 그러면 되겠네.”

남자 둘이서 대화가 오고 갈 동안 해준은 말없이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재이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커피는 핑계이고, 해준은 어떤 이유든 자신 때문에 왔음이 분명했다. 재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테이크 아웃 해 드려요?”

옛날 같으면 재이는 분명 마시다 가라며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집에서도 보기 힘들지만 회사 밖에서 만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으니까. 이런 짧은 시간도 데이트하는 것 같다며 볼을 붉히곤 했다.

하지만 먼저 포장을 권유하는 걸 보아 이번에는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이에게 예정된 소식을 조금 일찍 알렸다.

“그래. 그리고 집에 같이 들어가자.”

함께 귀가하자니. 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제가 왜요?”

“아파트 수도가 고장 났다고 연락 왔어.”

“예? 정말요?”

재이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해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한 라인 전체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네. 오늘은 늦었고 내일이나 기사 오면 고칠 수 있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더라.”

수도가 고장 나다니? 씻을 수도 없고 화장실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청천벽력 같은 말에 재이가 난색을 표했다.

“아아. 어떡하지.”

“일단 집에 같이 들어가고. 관리실에서 연락 오면 권 비서가 알려 준다고 했어.”

재이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파트는 그의 명의였기 때문에 해준 혹은 권 비서가 먼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해준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을 거란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집에 다시 들어가야겠네. 나 방금 안 씻고 나올까 봐 긴장했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재가 우스갯소리로 해준의 말을 거들었다. 윤재는 처음부터 의아함을 느꼈지만 굳이 꼬집어 묻지 않았다.

단지 해준이 의도한 사고라면 재이에 대한 마음은 절대로 일반적일 수 없을 거라 추측했다. 자신은 그런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유윤재는 속으로 조금 골치 아프겠다고 생각하며 뜨거운 커피를 해준에게 건넸다.

* * *

조금 더 일할 의향이 있던 재이를 해준이 데리고 나갔다. 유윤재는 굳이 뭐라 입을 대진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둘을 배웅했다.

가장 기분이 싱숭생숭한 건 재이였다. 익숙한 차에 탄 그녀가 조금 망설이다 입을 뗐다.

“저기, 저 호텔이라도 가 있으면 돼요.”

“언제 공사 끝날지 모른다는데 언제까지 있으려고.”

“그건 그런데.”

“그리고 밖에서 자는 거 싫어하잖아.”

“…….”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재이는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가도 혼자서 밤에 KTX를 타고 돌아올 정도로 밖에서 자는 걸 꺼려 했다. 재이를 잘 아는 해준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요즘 계열사 새로 연다고 정신없이 바빠. 집에 들어가는 일 적을 거니까, 걱정 말고 편하게 쉬어.”

재이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창밖을 보았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난리 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누가 꼭 일부러 고장 낸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옛날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재이는 그와 정말 운명이라며 혼자 확신을 가지곤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나 컸다. 하지만 이제 남의 남편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가 아저씨를 불편하게 만들면 어떡해요?”

재이가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해준은 고개를 돌려 재이를 바라봤으나 재이는 여전히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였다.

자신은 해준에게 전처럼 동생을 자처하며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명백하게 가지고 싶은 남자가 되어 버렸으니까.

“너는 괜찮아.”

해준은 재이의 우려에 덤덤히 말했다. 재이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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