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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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윤은 약혼식 전,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다 함께 요즘 각광받고 있는 미술 전시를 보며 식사를 하는 게 목적이었다. 모두 그녀와 비슷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친구들은 거의 정재계 큰손들의 자식이었다.

가윤은 나름대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작아지곤 했다. 혼자 있을 때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들도 친구들과 있을 때면 턱없이 부족했다.

“너 정말 유해준이랑 결혼하는 거야?”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떻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네.”

가윤의 겸손한 대답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가윤의 무리 중에서는 실제로 해준과 선을 본 친구도 있었기에 더욱 목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도 가윤이 모두가 원하는 해준이라는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꼬신 거야? 성격이 대단하다던데.”

“맞어. 내 친구도 선봤다가 통성명만 겨우 하고 나왔다던데.”

감탄과 놀라움이 섞인 질문에 가윤이 우쭐한 심경을 숨기며 대답했다.

“나랑 성격이 잘 맞더라고.”

다들 명목은 친구였지만 가윤은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서열에서 소외당해야 했다. 특히 자신을 은근하게 하대하던 하은이 난감한 반응을 보이자 평생 겪은 묵은 체증이 단번에 내려가는 듯했다.

하은은 전형적인 재벌 3세였다. 넉넉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집에서 귀하게 자란 딸이었고, 무리 안에서도 가장 높은 서열이었다. 자신도 유복하게 자랐지만 사실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할 만큼의 갭이 있었다. 그리고 가윤은 하은 위로 설 이날만을 평생 기다려 왔다.

“잘됐네. 축하해.”

친구들은 웃으며 덕담을 건넸지만 표정에는 떨떠름함이 숨겨지지 않았다. 가윤은 전시를 보는 내내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때 한 친구와 미대 동창인 작가가 가윤의 무리 가까이 와 인사를 나누었다.

“전시는 잘 보셨어요?”

“아 안녕하세요.”

다들 화기애애하게 작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순간 작가를 소개시켜 준 친구가 하은과 가윤을 번갈아 보다 가윤을 가리켰다.

“여기. 정가윤이라고 이번에 대원 그룹 유해준 와이프 될 친구야.”

중요한 순간이었다. 서열이 뒤집히게 되는 순간. 하은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고, 가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 진심이 담뿍 담긴 미소로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정가윤이에요.”

“대원도 갤러리 있잖아. 너 잘 보여야 돼.”

친구의 말에 작가는 그게 뭐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반가운 티를 숨기지 않았다. 치솟는 승리감은 초콜렛보다 달콤했다. 가윤은 뒤에서 하은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오래 기다려 온 이 순간을 충분히 만끽했다.

해준이 등장한 건 다들 자리를 옮겨 식당에 앉았을 때였다. 그는 파인다이닝 코스가 시작되고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가윤의 무리는 그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봬요.”

“반갑습니다.”

해준이 매너 있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온 식당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빛은 조차 남달라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제되어 티 한 점 없는 보석 같았다. 뚜렷하지만 담백한 이목구비는 남자다운 턱 선에서 더욱 빛을 발휘했다. 빈틈이라곤 없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섹슈얼한 상상을 자극했다. 오늘따라 더 말끔하고 잘생긴 인상에 가윤의 기분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켜 올랐다.

“오늘 멋있네요.”

“고마워요.”

진심 어린 가윤의 감탄에 해준이 덤덤히 대꾸했다. 하은과 친구들은 연신 그를 힐끔거렸다. 질투와 아쉬움, 계면쩍음, 떨떠름함, 갖은 감정들이 점철된 눈빛이었다.

“저희 가윤이 어떤 점이 좋으신 거예요?”

식사가 한창 진행되자 짓궂은 질문들이 하나둘씩 날아오기 시작했다. 참석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해준은 싱겁고 성의 없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뭐, 두루두루 나쁘지 않죠.”

고기를 썰던 가윤이 멈칫 그를 쳐다봤다. 성의가 없다 못해 방해밖에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친구들은 말하지 않았으나 눈빛이 술렁였다. 가윤이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지만 해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윤에게는 기다리던 설욕의 자리였으나 해준에겐 바이어 미팅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약속이었다. 가윤은 약속에 나와 달라는 걸 세 번이나 부탁한 바 있다. 심지어 마지막엔 유 회장까지 언급하여 억지로 불러낸 것이었다. 재이를 인턴 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당연히 오고 싶지 않았다.

“오. 표현이 굉장히 정제된 편이시네요.”

하은이 뼈있는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가윤은 이를 악물고 인내심을 발휘했다. 돌이 던져진 그녀의 자존심이 출렁였다.

이미 이 바닥에서는 해준이 국장의 비리에 대해 보도를 터트렸다는 소문이 파다한 상태였다. 일각에선 그가 본격적으로 처가 길들이기에 힘을 쏟고 있다고 떠들었다.

그 상태에서 데면데면한 해준의 모습은 둘이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라는 걸 증명하는 듯 보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윤이 철저하게 ‘아쉬운 입장’인 게 낱낱이 드러났다. 해준이 덤덤히 말했다.

“원래 좀 무뚝뚝해서.”

그러나 해준은 일부러 가윤을 곤란하게 할 의도까진 없었다. 그럴 만큼 가윤과 이 자리에 대해 깊게 고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이 자리가 너무 불필요하고 번거롭게 느껴졌으며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만만한 처가’라고 해도 결국 가윤의 이득이었지만 자존심은 상했다. 특히 하은의 앞에서 이런 대접을 받자 가윤도 기분 좋게 식사하기란 불가능했다. 가윤이 그를 불렀다.

“해준 씨.”

가윤이 웃으며 자신이 썬 고기를 그의 접시 위로 가져다주었다. 다정한 행동은 성의 있는 협조를 바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해준은 가윤이 준 고기를 받아먹지 않는 대신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게 자신을 불러낸 여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었다.

“전시는 볼만했고?”

“그럼요.”

가윤은 애교를 듬뿍 담아 살갑게 대꾸했다. 그가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최대한 곱게 자신이라도 본인의 이미지를 챙겨야 했다. 해준은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둘의 모습을 보던 친구들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러면 앞으로 아원은 가윤이가 맡는 건가요?”

‘아원 갤러리’는 대원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사립 미술관이었다. 장난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해준과 가윤의 사이, 그리고 대원에서의 가윤의 입지를 유추할 수 있는 민감한 질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 질문에 가윤의 표정이 굳었다. 해준은 생판 처음 듣는다는 듯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아원 갤러리 말씀입니까?”

“아, 네. 가윤이가 원체 그림을 좋아하니까.”

해준은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고 앞으로도 알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가윤의 기대와 달리 해준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글쎄요. 회장님께서 판단하실 문제 아닐까요.”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그는 자신이 부사장으로 승진하면 재이에게 아원 갤러리를 맡길 생각이었기에 더욱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 이상의 단호한 대답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가윤은 온몸이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에 진땀을 흘리며 순발력을 발휘했다.

“아 참. 회장님이랑 내일 둘이서 필드 나가기로 했어요. 미안 얘들아. 지금 생각이 나서 말이야.”

“뭐, 그래요.”

그러든지 말든지. 해준이 다시 덤덤히 대꾸했다.

* * *

“글쎄요. 회장님께서 판단하실 문제 아닐까요.”

해준의 냉정한 대답에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하은을 본 이후로 가윤은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가윤이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었다. 미술관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친구들 앞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애매한 대답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그조차 하지 않다니. 이건 예비부부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자신의 체면을 깎아 먹은 행동이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 때문에 밥을 먹는 건지 삼키는 건지 실감도 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가윤은 해준의 차에 탔다. 해준은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시동을 걸며 말했다.

“중간에 내려 줄 테니까 택시 타고 가요.”

전에 자신의 집에 들르는 바람에 생긴 불상사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가윤은 기가 막히고 민망한 마음에 쌓아 둔 것이 터졌다. 여전히 잘생기고 완벽한 남자에게 진저리를 치며 따졌다.

“정말 형편없네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떤 게.”

“사람 무시하는 거도 정도가 있지. 아까도 솔직히 어떻게 그런 망신을 줘요?”

“정가윤 씨.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

“내가 아쉬운 처지인 거 아는데, 그래도 친구들 앞에서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요?”

가윤이 기다렸다는 듯 숨도 쉬지 않고 따졌다. 워낙 쌓인 게 많아 할 말을 고민하지 않아도 수도꼭지처럼 터져 나왔지만 해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싫다는 사람 불러낸 게 누구야. 당신이야. 내가 애쓸 생각 없으니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지. 결정은 누가 했지, 당신이야.”

“…….”

“나한테 서운함을 토로할 거면 평범한 애인들이나 가능한 상황이지. 도대체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당신이야말로 지금 나 무시하는 건가?”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이 없었지만 가윤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해준은 잘한 것이 하나 없으면서도 교묘하게 잘잘못을 흐렸다. 그녀가 해준의 말을 씩씩거리며 듣다 따지듯 물었다.

“동생한테도 이래요? 정말 지독하네요.”

“재이는 두 번 말하게 만들지 않지.”

해준은 보란 듯한 대답으로 다툼의 하이라이트를 찍었다. 이 와중에도 재이를 싸고돌다 못해 치켜세우는 그를 보자 황당한 마음에 입이 벌어졌다.

“하. 진짜. 재수가 없어서!”

그러거나 말거나 해준은 차량의 속력을 줄이며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내려요.”

“유해준 씨!”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어. 내려.”

해준은 기어코 가윤의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그의 차에서 내려 차 문을 부서질 듯 닫았다. 해준은 가윤에게 더욱 매정한 편이었지만 그는 불필요한 호의를 베풀어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가 흔쾌히 내어 줄 수 있는 건 ‘허울뿐인 남편’이었다.

“야!”

결국 미련 없이 떠나는 그의 차에 대고 가윤이 꽥 소리쳤다. 몹시 훌륭한 고성능을 자랑하는 그의 차량은 금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윤은 허망하게 대로변에 서 있었다. 그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명품들도, 손에 쥔 가방도 의미를 잃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가치 없는 여자로 취급하는 그의 대접에 몹시 외로웠다.

가윤은 문득 자신이 저런 남자를 몇십 년 동안 감당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욕심을 부린 걸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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