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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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짐을 챙겨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탔다. 재이가 박차고 나가 버린 집 안을 홀로 지키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젠장.”

시동을 걸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지만 곤두선 신경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현실이 분에 차고 열 받아 이를 박박 갈았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도 결국 재이에게 남길 것은 상처뿐이라니.

그 와중에도 운전하는 내내 재이가 떠올랐다. 가슴팍이 오르내리며 헐떡이던 모습, 상기된 얼굴과 더욱 붉어진 눈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보이는 하얀 목덜미, 자신을 올려 볼 때 보이던 가슴팍. 재이의 곳곳이 그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자신이 짐승인 양 느껴졌다. 그러나 자기혐오마저 덮어 버릴 정도로 재이에 대한 마음이, 욕심이, 욕망이 거대했다. 그는 평정에 집착했지만 재이 앞에선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 개 같은 인생.”

창문을 연 그가 찬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전에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자신의 태도처럼 재이도 눈치껏 과도한 표현을 자제하곤 했다. 하지만 결혼을 기점으로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에게 매달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물러나야 하는 마음이 괴로웠다.

“난 죄다 하고 싶어요.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고요. 해 줘요. 다 해 주잖아요. 빨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벙긋거렸다간 ‘나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를 왜 여태까지 나 자신도 해칠 수 없게 경계해 왔던가. 자신은 너의 뒤에서 한 발짝 떨어진 이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다짐을 그 짧은 시간 수없이 되뇌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힘껏 잡은 재이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재이가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생각하며 이대로 재이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이 뒤섞였다.

“그 여자랑 결혼하는 꿈을 꾸면 자다가도 깨요.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는 거 같다고요. 내가 정말 동생일 뿐이에요?”

재이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에 대한 재이의 마음속 깊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건 해준에게 판도라의 상자였다. 결코 가볍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재이의 마음을 확인했을 땐 둘은 이미 늦어 버렸다.

“나쁘다 못해 파렴치해!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책임지지도 않고 나 몰라라 하잖아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어떻게!”

해준의 가슴마저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핸들을 돌렸다.

* * *

해준과 재이는 함께 둘의 관계를 화초처럼 가꾸어 왔다. 물이 너무 많을까, 시들어 버릴까, 꽃을 틔우는데 영양이 부족하진 않을까, 비록 그 일 때문에 힘들어도 괜찮았다.

마찬가지로 해준은 다른 걸 다 제쳐 놓고 화초를 가꾸는 게 1순위이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이제 꽃이 시들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흐윽…….”

재이는 길바닥을 전전하며 한참을 울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상실감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가꿔 왔던 관계도, 그도 다시는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재이의 인생에 아주 큰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울다 지쳐 세상을 잃은 얼굴로 터덜터덜 걸었다. 목적지를 정해 두지 않고 정처 없이 걸었으나 막상 정신을 차리니 익숙한 거리였다.

멀리서, 빛이 새어 나오는 카페가 보였다. 재이가 자신이 본 것을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유윤재의 가게가 맞음을 확신했다. 누가 있는 걸까.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가게 가까이로 갔다.

“누구지?”

어스름한 무드 등이 켜져 있는 가게에는 윤재가 턱을 괴고 흰 벽에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띄워 보고 있었다. 재이가 고민하다 가게 통창을 노크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윤재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재이가 주위를 둘러보고 입을 뻐끔거리며 물었다.

‘뭐 해?’

그녀의 물음에 유윤재가 반색하며 얼른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재이가 조금 고민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웬일이야. 야간 근무하려고?”

유윤재는 언제나처럼 능청스럽게 굴었다. 재이는 그럴 재주가 없어 멋쩍게 사실을 밝혔다.

“……지나가다 불이 켜진 거 같길래. 너는?”

“잠이 안 와서 영화나 보려고.”

사실 그는 내일 가게로 여자를 데려와 데이트하기 전 빔 프로젝터를 작동시켜 보는 중이었지만 그런 설명은 생략했다. 유윤재는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와 재이에게 앉길 권했다.

재이가 고민하다 함께 영화를 봤다. 클래식으로 분류되는 아주 유명한 영화였기에 언제 보든 타이밍은 무방했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밤늦은 시각, 역세권의 대로변에 위치한 공사가 한창인 휑한 가게에서 사장과 함께 단둘이 영화를 보다니. 여전히 사람들은 드문드문 지나갔고, 밖에는 차와 오토바이 소리가 났지만 재이의 거지 같은 현실을 잊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한참 영화를 보던 재이가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물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내가 그렇게 매력 없나.”

여전히 재이의 목소리는 목 놓아 울었던 탓에 조금 잠겨 있었다. 유윤재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과자 봉지에 있는 팝콘을 씹으며 되물었다.

“갑자기?”

재이도 여전히 시선은 정면으로 향한 채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누구 좋다고 했을 때. 이런 푸대접을 받을 만큼. 너무 애 같나?”

유윤재에게 하는 질문이었지만 자조적인 뉘앙스였다. 유윤재가 눈살을 찌푸리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술 먹었어?”

“남자들 짐승이라고 그러던데. 내가 섹스하자고 해도 단번에 거절당할 만큼. 그 정도로 형편없나?”

“……아냐.”

이번에도 시시껄렁한 대답으로 때울 줄 알았던 유윤재는 사뭇 진지하게 대꾸했다. 의외의 대답에 재이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푸른 무드 등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꽤. 괜찮아.”

그는 여전히 앞만 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은근한 뉘앙스는 숨기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진지한 모습에 재이가 조금 당황하여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둘 사이에 묘한 성적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게에는 말없이 영화 소리만 들렸다. 외국어가 이리저리 오갔지만 재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해 줄까?”

윤재가 고개를 돌려 재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제야 재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실감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유윤재는 손부채질을 하는 재이를 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웃어넘겼다.

* * *

유윤재는 재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누가 그녀에게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 정말 그럴 만한 대답을 받을 상태인지 무심결에 그녀의 얼굴을 훑지도 않았다.

재이는 유윤재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 듯했다. 영화는 곧 끝났고 그는 재이를 태워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재이가 조수석에서 내리자 유윤재가 창문을 내려 신신당부했다.

“딴 길로 새지 말고. 똑바로 들어가.”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사장님.”

묘한 대화가 흐른 후 일부러 재이는 ‘님’자까지 붙여 가며 그와의 거리를 의식했다. 하지만 그런 서툰 대처에도 유윤재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능청맞은 인간이었다.

“사장은 무슨. 얼른 들어가. 추워.”

재이가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려다 다시 윤재를 불렀다.

“아 저기.”

“왜. 또 왜.”

“아까 한 말은…….”

쭈뼛거리는 모습에 윤재가 먼저 재이를 안심시켰다.

“술주정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나도 잊을 거야. 난 맨정신으로 4층도 뛰어내려 봤어.”

“예? 정말요?”

“근데 비 와서 안 죽었어. 아무튼 별거도 아닌 거로 신경 쓰지 말고 내일 지각하지 마.”

“예, 감사합니다.”

평소엔 반말밖에 나오지 않더니, 오늘은 왠지 그가 달라 보였다. 재이가 얼떨떨하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남기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윤재는 문득 재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섹스하자고 해도 단번에 거절당할 만큼. 그 정도로 형편없나?”

재이의 말에 자신의 옛날 모습이 떠올랐다. 끄떡없는 상대를 향해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시절. 순정과 집착이 뒤섞였던 서툰 모습. 한때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기도 했었다.

그의 기분이 천천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윤재는 차량을 출발시키며 중얼거렸다.

“시대가 변해도. 레퍼토리는 똑같네.”

유윤재는 복잡한 생각 속 결단을 내린 채 차를 돌렸다. 많이 가 본 듯 익숙하게 구축 빌라와 원룸촌이 뒤섞인 동네로 들어갔다. 포장이 엉망으로 되어 있어 값비싼 외제차의 서스펜션이 위험했지만 아랑곳 않고 거칠게 차를 몰았다.

유윤재는 구석진 빌라 앞에 도착했다. 꼭대기 층 창문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한밤중, 몇 번이나 와 본 곳이지만 매번 고민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갔었다. 유윤재는 잠시 고민하다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오랫동안 가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에 반가운 구석이라곤 없었다. 유윤재는 덤덤히 말했다.

“나 집 앞에 있어요. 하얀 차. 보이죠?”

어두운 창문 앞에서 사람의 인영이 힐긋 보였다. 여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급하게 말했다.

-밤에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낮에도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상대는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고 싶어 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유윤재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시트를 뒤로 젖혀 눕듯이 등을 기대곤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재이의 모습을 회상하며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오늘 재미있는 걸 봤어요.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 얼른 끊어.

“옛날에 날 보면 어떤 기분이었어요?”

-뭐라구?

“내가 좋아 뒈지려 했잖아요. 사족을 못 쓰면서.”

-끊을게.

특별한 용건이 없다고 판단한 여자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은 빛을 내다 꺼졌지만 유윤재는 여전히 생각하듯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재이가 한 말과,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기분이 진흙탕에 처박힌 듯 몹시 더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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