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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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럼 부끄럽지만 업무적으로나 회식 자리에서 곤경에 빠트리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그는 ‘일을 처리’한다고 표현했다. 재이는 김 부장의 말을 듣고 조금 멍해졌다. 자신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겪었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회고할 수 있는 일이라니.

재이는 한참을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조용한 정적이 이어졌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재이의 선택이었다.

-나도 선처를 바라진 않아. 하지만 굉장히 힘들었고…… 그러니 제발 유해준 씨에게도 부드럽게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네. 나도 억울한 감이 없진 않아. 하급자로서 입장이 있다고 생각해 주면…….

김 부장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재이는 문득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그렇게 뻔뻔하고 쉽게 말하지 말라고 욕이라도 해줄걸. 금방이라도 토할 거 같은 기분에 황급히 전화를 끊은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감당 못할 사실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재이는 식탁에 갇힌 것처럼 꼼짝을 하지 못한 채 침울하게 고민했다. 조언을 구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

재이는 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지만 재이는 그가 받지 못할 거란 생각이 컸다. 솔직히 말하면 뭐라도 그와 연결되어 있고 싶었다. 전화기 통화 연결음조차 그리웠을 만큼 힘들었다.

-여보세요.

그리고 생각지 못한 해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재이는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벌어진 입술이 벙긋거렸지만 말문이 탁 막혔다. 그녀 대신 해준이 말했다.

-재이야.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언제든 무슨 일이 있어도 다 받아 줄 수 있을 만큼의 포용심. 거대한 애틋함이 둘 사이에는 여전했다. 재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서 할 말이 있어요. 둘이서만 있는 곳이어야 해요.”

-지금 갈게.

해준이 바로 대답했지만 재이는 문득 자신이 있는 곳이 너무나 휑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해준과 자신의 집이 그리웠다. 지금 당장 익숙하고 안전한 곳을 원했다.

“……아니요. 아니야. 내가 갈게요.”

재이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곳에 둘의 추억이 있고 해준이 있는 넓은 집. 남는 방 곳곳은 재이의 크고 사소한 용도에 따라 나누어진 그 집으로.

* * *

재이가 현관문 앞에 섰다. 수백 번 드나들던 곳을 이렇게 자세하게 본 적이 있던가. 누구보다 익숙한 곳이었지만 새삼스레 떨리는 마음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 앞에 섰다.

“어서 와.”

실내복 차림의 해준이 재이에게 다가왔다. 재이는 손님이 된 것 같기도 했고 긴 여행을 마치고 다녀온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봤다. 훤칠하다 못해 편한 차림으로도 빛이 나는 그는 분명 자신과 함께 살던 남자였다. 눈을 마주치자 해준에게 다가가 안기고 싶어 애써 시선을 돌렸다.

“정가윤, 그 사람 이야기하러 왔어요.”

해준은 잠자코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재이는 사뭇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좋은 이야기 아니에요. 듣기 싫으면 돌아갈게요.”

“가기는 어딜 가. 여기가 네 집인데.”

머리 위에서 들리는 해준의 말에 재이는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았다. 해준은 단순히 자신을 애틋한 동생이라고 여겨 한 말이겠지만 자신은 애절한 연인의 표현으로 듣고 싶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뗐다.

“회식 자리에서 부장이 저한테 그런 거.”

“……”

“정가윤이, 정가윤이 시켰다고 했어요.”

해준은 아무 말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걸까. 재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으나 속내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서운하고, 야속하게까지 느껴졌다.

“거짓말 같아요?”

“그럴 리가.”

말수가 적은 해준은 곤란한 사실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특히 재이에겐 그랬다. 둘 사이에 비밀이란 없었으니까. 재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어떤 거.”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예요?”

해준이 재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팔을 뻗어 솜털이 가시지 않은 그녀의 볼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자신의 한쪽 볼을 다 덮을 만큼 큰 손이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온기와 희미한 향수 냄새가 재이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내가 일할 때 언제 네가 말린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해준이 재이를 잘 아는 만큼이나 재이도 그를 잘 알았다.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는 일의 연장이라고 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재이가 원하는 것은 예전처럼 둘밖에 없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혹은 다른 관계로 발전하는 것.

“내가 당신 아님 안 된다고 해도요?”

“…….”

“난 아저씨만 있으면 그 끔찍한 외국 생활도 더 할 수 있어요. 영영 한국 안 들어와도 괜찮아요. 커플이 돼서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할 수 있어요. 나랑…….”

“내가 안 된다.”

해준은 애절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재이의 말을 냉정하게 끊었다. 생각보다 훨씬 냉정한 그의 반응에 재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전과 다르다는 걸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견딜 수 없었다. 남은 말을 쥐어짜듯이 뱉었다.

“……회장님이 무서운 소리 하셔도, 다 견딜 수 있어요.”

재이는 몹시 긴장하고, 떨리고, 불안해 보였다. 해준은 비집고 나오는 감정적인 반응을 동여매고 미리 입력한 걸 읊듯이 딱딱하게 말했다.

“다시는 널 데리고 그런 걸 겪지 않게 하는 게 내 일이야.”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온 듯 재이가 원망스레 물었다.

“이런 건 괜찮구요?”

해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재이는 답답한 마음을 담아 이어 말했다.

“아저씨가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거 저뿐이잖아요. 왜 자꾸만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아닌 건 아니니까.”

뭐가 아니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이는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부인했지만 여전히 재이는 마음 한편에 자신만큼이나 해준의 마음도 작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요. 제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괜찮아요?”

“네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전 그게 아저씨라구요.”

“난 안 돼. 이런 건 사랑이 아니야.”

서로를 위해 슬픔, 아픔은 삼키고 기쁨을 나누며 살았다. 미래를 떠올려도 둘은 여전히 서로의 곁에 있는데 여기서 더 얼마나 특별해야 사랑이란 걸까. 이유는 몰라도 해준은 일부러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중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조차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으니까. 재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저씨가 다른 여자랑 키스하는 거 싫어요. 노닥거리는 거도 싫구요, 영영 나랑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뭐예요?”

“그런 마음은 잠깐이야. 내가 결혼하고 네가 짝을 찾으면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고, 추억으로 지나갈 거다.”

“그럼 또 반대로 물어볼게요. 제가 다른 남자랑 섹스하면 아무렇지 않을 거 같아요?”

“…….”

순간 해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연히 재이가 자신 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만 여겼지 그런 구체적인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덜컥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당했다.’고 아차 싶었다. 자신을 이렇게 당황하게 만드는 것도 재이가 유일했다. 아니나 다를까 재이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승기를 잡은 듯 소리쳤다.

“말해 보세요. 진짜 아무렇지 않냐구요!”

“그래.”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재이는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해 봐요.”

없는 말을 할 바에 차라리 대답을 하지 않는 해준은 이번만큼은 거짓말을 해야 했다. 입 안에 가시가 돋친 듯 껄끄러웠다.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재이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딱 잘라 말했다.

“거짓말.”

“…….”

“아저씨 거짓말할 때 눈을 안 깜빡이는 거 모르죠?”

해준은 자신이 한 방 먹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재이는 작은 끄나풀 같은 가능성을 엿보았다.

“오빠, 아저씨.”

재이는 그에게 확인받으려는 듯 다가가 해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을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해준은 당황해 재이를 떼어 놓지도 못한 채 팔을 들고 엉거주춤 뒷걸음질했다. 재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키스해 주세요.”

“안재이.”

“해 주세요. 안아 주세요. 만져 주세요.”

재이가 울먹였다. 해준은 재이의 어깨를 잡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재이가 그의 숨겨 둔 마음을 들춰내듯 물었다.

“나 사랑하잖아요. 정말 내가 이렇게 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정말?”

“재이야. 그만해.”

“난 죄다 하고 싶어요.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고요. 해 줘요. 다 해 주잖아요. 빨리……!”

재이가 흐느끼며 자신의 애달픔을 감당하지 못한 채 발을 굴렀다. 그를 끌어안은 손의 결박이 약해지자, 해준은 재이를 밀어 내는 대신 자신이 물러났다.

또 이런 식이다. 그는 기어코 거리를 두고 만다. 재이가 울었고, 그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 여자랑 결혼하는 꿈을 꾸면 자다가도 깨요.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는 거 같다고요. 내가 정말 동생일 뿐이에요?”

“그래.”

‘그래.’ 단 두 글자였지만 빠르고 쉽게 튀어나온 대답에 재이의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재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려 눈물을 참았으나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 줬어요.”

흐느끼는 소리와 비난하는 말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재이의 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도 왜 밀어내지 않았어요. 당신은 나쁜 보호자야.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게 할 수 있어요?”

“…….”

“나쁘다 못해 파렴치해!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책임지지도 않고 나 몰라라 하잖아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어떻게!”

고함에 가까운 비난이었다. 재이는 한 번도 해준에게 이렇게 화내 본 적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재이가 가쁜 숨을 헐떡였다. 해준은 덤덤히 입을 뗐다.

“네가 날 사랑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계속 미워하고 원망해.”

“…….”

“나는 그래도 괜찮다.”

재이가 이를 앙다물었다. 지독한 해준의 반응에 그녀가 진저리 치며 집을 뛰쳐나갔다. 현관문이 닫히고,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해준이 손에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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