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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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과 주요 간부들만 이용하는 임원 회의실에는 시종일관 진중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두 시간가량 이어지는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에도 지치는 사람은 없었다. 간부들은 책임 실무자의 말을 들으며 신중하게 서류를 검토했고 가장 상석에 앉은 유 회장은 꼿꼿하게 턱을 매만졌다.

비전은 좋다. 하지만 사업에는 항상 암초와 다름없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것이 허다했다.

“그래서 이건 누가 가져가겠나.”

대원 그룹의 사업 확장에 대한 논의였다. 여태까지 제조에 특화되어 있던 사업은 4차 산업혁명에 발맞춰 변화를 꾀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오히려 그룹의 크기와 명성에 비해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선뜻 비메모리 분야에 본격적으로 총대를 메겠다고 나서는 임원은 없었다. 감내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높았고, 이미 시장을 선점한 기업들이 자리를 공고히 해 놓은 상태였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지만 모두 꺼려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모이는 거로 하지.”

유 회장이 중얼거리며 회의를 갈무리했다. 분위기를 보아 나설 놈은 없으니 시간을 주고 너희끼리 정해 보라는 의미였다.

유 회장의 말에 임원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를 정리했다. 다들 폭탄이 누구에게 갈지 바쁘게 생각 중이었다. 해준도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나는 와중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본부장 약혼 소식 들었네. 축하해. 회장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어.”

해준을 어릴 적부터 봐 왔던 박 상무가 어깨를 도닥이며 격려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해준은 무심코 ‘결혼이요?’라고 되물으려다 정신을 차렸다.

“감사합니다.”

“걸음마 막 떼고 봤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장가가서 애도 낳고 그래야지.”

“네. 그래야겠죠.”

최근 해준은 결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를 만큼 숨 가쁘게 살았다. 유일한 그의 관심사는 집을 나가 있는 재이였다. 그렇게 나가고 싶다면 차라리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라고 아파트 키를 쥐여 줬지만 그것도 마땅찮긴 마찬가지였다.

뭘 제대로 먹긴 하는지,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면서 왜 굳이 나가야 했는지, 혼자서 살 만한지. 궁금하고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곤 재이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유 회장이 자취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잠잠하다는 정도. 하지만 해준은 여차하면 재이를 집 안으로 다시 들일 생각뿐이었다.

“아 그런데, 동생은 회사 안 들어오나?”

박 상무가 인자하게 물었다. ‘동생’이란 재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해준과 박 상무의 대화를 듣던 유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기회가 되면 데려오고 싶습니다만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매사에 짤막한 대답만 고수하던 해준도 재이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이 길어졌다. 박 상무가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유 회장의 안색을 보고 그를 뒤따랐다.

유 회장은 회장실에 들어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준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방송사 김 부장 사건 검찰에서 소식 들었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힘 많이 쓰셨더라구요.”

“그만하면 됐다. 적당히 해.”

유 회장이 단번에 말문을 막았다. 검찰로 넘어간 사건은 압수 수색을 진행하며 본격적으로 방송사와 여러 정치인을 곤란케 할 스케일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유 회장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란 없었다.

이번 사건 또한 유 회장이 돈과 힘을 쓴 덕에 시간을 끌며 유야무야 넘어갈 예정이었다. 해준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 계집애가 합의까지 한 마당에 뭘 더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아직 한참 모자란 것 같습니다.”

합의. 그게 해준을 열 받게 했다. 가윤은 해준의 분노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찍이 합의했다던 문서를 내밀었으나 누가 봐도 일방적이고 불리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만하라고 했다.”

“재이도 봐주시면 저도 이쯤 하겠습니다.”

“걔가 왜. 무슨 이야길 하는 거냐.”

“굵직한 기업이라면 죄다 채용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으셨지 않습니까. 죄도 없는 애로 그만하십시오.”

해준과 유 회장의 옥신각신이 이어졌다. 그는 재이를 더 이상 유윤재 옆에 두고 싶지 않았다.

“죄가 없기는.”

유 회장이 빈정거렸다. 뭔갈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에 해준은 온몸이 차가워지는 싸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오갈 데 없는 천애고아 거둬 주고 먹여 줬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감히 누굴 욕심내. 아까 내가 일 벌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아마 유 회장은 가윤에게 대충의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그는 기죽지 않고 덤덤히 말대꾸했다.

“재이와 관련해서 한 번도 회장님 손 빌린 적 없습니다.”

참다못한 유 회장이 버럭 소리쳤다.

“그게 더 괘씸한 거야! 네가 어디 평범한 사내새끼냐! 넌 그룹을 이어받을 후계자야.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는 것 자체가 그룹의 손실이라고!”

“블랙리스트, 지워 주십시오.”

“약혼식 일정대로 진행해. 그리고 걔도 상견례 오라고 해라. 혼담이 오가는 걸 눈앞에서 똑똑히 보라고 해.”

“네 오빠 아니라고 역정 내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오라고 하면 제가 부르겠습니까.”

어릴 적엔 유 회장이 화를 낼 때 아주 무서웠다. 날 때부터 시큰둥한 얼굴을 했을 것 같은 해준도 유 회장을 두려워했다. 심기가 불편한 티만 나도 온 가족이 벌벌 기었다. 아버지를 정말로 내쫓았을 때가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해준은 이제 학업을 무사히 마치고 사내에서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더 많은 힘과 권력이 필요한 건 여전했으나 할 말도 못 하며 떨던 꼬마가 아니었다.

“이 고얀 놈. 처신 똑바로 해라.”

“그러려고 결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회장님. 부탁드립니다.”

표현은 부탁이었으나 실상은 합의나 협상에 가까웠다. 어느새 부쩍 커서 자신의 말에 토를 달고 물러서지 않는 해준의 모습을 보자 유 회장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고작 그런 계집애 하나 때문에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다니,

“결혼할 때까지 처박혀 살라고 해! 공연히 불륜이니 뭐니 지저분한 염문 돌기 전에 외국으로 나가라고 해라. 네 얼굴 봐서 이쯤 한 줄 알아라. 다음엔 쥐도 새도 모르게 외국으로 보내 버리기 전에 조용히 살라고 그래!”

벼락같은 고함이 회장실에 울려 퍼졌다. 잠시 둘 사이에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해준은 가만히 있다 조금도 타격 받지 않은 목소리로 태평하게 통보했다.

“정 그러시면 카페 건물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윤재야 한 반년 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뜰 테니까요.”

“뭐?”

“제가 자주 들여다보고, 살필 예정입니다. 그런 걸 원하시는 게 아니라면 풀어 주십시오.”

명백한 협박이었다.

철썩!

듣다못한 유 회장이 분을 조절하지 못하고 해준의 따귀를 내리쳤다. 해준의 턱이 돌아갈 만큼의 강한 세기였다. 유 회장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네 아비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내가 만만한 게지. 그래, 내가 늙었긴 늙었나 보다.”

유 회장의 분노에도 해준은 자세를 바로 하고 흐트러짐 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깽값 대신 재이 풀어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가 회장실을 나섰다.

* * *

재이가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리모델링 공사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유윤재는 무리하지 말라며 농땡이를 권유했지만 재이는 성격상 그게 힘들었다. 결국 출근 내내 몸을 쓰고 있으니 퇴근할 때가 되면 부쩍 피로했다.

♪♬

재이는 휴대폰 알림에 소식을 확인했다.

[안재이 씨.]

[나 김 부장일세. 자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염치없지만 꼭 만나 줬으면 해요.]

재이의 발길이 절로 멈추었다. 문자를 보고 맨 처음 든 감정은 괘씸함을 넘어 극렬한 분노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곧장 답장을 보냈다.

[아니요. 볼 일 없습니다.]

김 부장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재이는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울리지 않는 휴대폰이 신경 쓰여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다.

기대와 달리 처참하게 얼룩져 버린 첫 사회생활. 문제의 그 사건 때문에 유 회장은 자신을 주저앉히기까지 했다. 황당하기도 했고 고생하여 공부를 시킨 해준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재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와중에 다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

“이 뻔뻔한 새끼!”

도대체 뭐라고 주절거리나 보자. 재이가 이를 갈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가윤 과장 관련한 이야기야. 제발 한 번만 들어 보고 판단하게.]

재이가 얼음이 되어 굳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렸다는 직감이 들었다. 정가윤? 정가윤이 왜 자신이 겪은 일과 관련 있다는 걸까. 재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김 부장이 연락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가윤 과장이 나에게 안재이 씨에 대해서 여러 번 귀띔한 적이 있어.

재이는 그때까지도 차라리 듣지 말까 하는 갈등과 싸워야 했다. 분명히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차분히 녹취 버튼을 눌렀다.

“제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구요?”

-유 회장님 관련하여 이야기하거나 그러진 않았고. 거슬리는 인턴이 하나 있다고 했어.

“거슬리는 인턴이요.”

-뭐. 알다시피 그게 어떤 뉘앙스였는지 예상이 되겠지.

재이는 일부러 구체적인 이야기를 캐물었다.

“무슨 말인지……”

-보통 정가윤이 사내에서 곤란하거나 마찰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그렇게 이야기해.

“…….”

-나는 그럼 부끄럽지만 업무적으로나 회식 자리에서 곤경에 빠트리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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