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재이를 여자로 보냐고.
해준은 그런 질문을 스스로 수천 번을 던져 왔다. 재이의 애티가 사라지기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이 재이 앞에서 달라지는 자신을 보며 놀랄 때마다, 재이의 흠도 두둔하게 될 때마다 그랬다.
그리고 그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수천 번을 검열하여 왔다. 재이에 대한 마음에 불순물이 낄 때마다 매섭게 채찍질했다. 네가 제정신인 거냐고. 정신 차리라고.
안 될 이유는 많았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작 길어 봤자 3년짜리 세로토닌에 둘의 사이가 변질되는 것이 싫었다. 현재가 너무 애틋해 재이를 향한 정성이 흐려질 수 있다는 미래의 가능성조차 꺼려졌다.
자신의 마음을 수없이 부정해 가며 지켜 온 명제였다. 유해준은 안재이를 가족으로서 사랑한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며 자신의 옆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재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마저도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외면하는 중이었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유 회장이 물었다. 해준은 젓가락을 든 채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 네.”
다음 날 해준은 유 회장이 부르는 식사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예상대로 테이블엔 유 회장과 가윤이 앉아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가윤의 깜짝 등장에 놀라지 않았다.
식사는 표면적으로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가윤이 이 자리를 만든 의도는 어제의 굴욕에 대한 최소의 압박 그리고 최대의 협박이었다.
해준은 가윤이 꺼내 든 패를 괘씸하게 여기진 않았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비즈니스였으니까. 각자 나름대로의 칼을 빼 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해준이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다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결혼 준비를 조금 미루었으면 해서요.”
해준의 말에 가윤의 얼굴로 놀란 기색이 스쳐 갔다. 유 회장은 해준의 의도를 가늠하듯 가만히 생각하다 가윤에게 물었다.
“가윤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 너무 멀지 않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이 지루하고 굴욕적인 냉전을 얼마나 더 하란 뜻인가. 여차하면 결혼을 엎어 버릴 기세였다. 가윤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그를 압박했음을 깨달았다.
“이유는 뭐냐.”
“업무 스케줄상으로도 너무 빠듯하구요. 저도 개인적으로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있던 유 회장이 물었다.
“그 계집애 때문이냐?”
“재이도 적응할 시간은 있어야죠.”
유 회장은 해준의 마음에 재이가 너무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감춘다고 감추어도 차고 넘치자 티가 날 수밖에. 손자의 효율을 방해하고, 평정을 방해하는 재이는 득이 아니라 실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저더러 결혼하라고 했나? 네가 결혼한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유 회장의 짜증스러운 말에 해준은 덤덤히 대답했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하나뿐인 오빠가 결혼하니까요.”
해준은 일부러 가윤 앞에서 보란 듯이 형제처럼 재이를 묘사했다. 유 회장은 심기 불편한 티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말 잘 나왔다. 너도 결혼 앞두고 말 조심해라. 오빠는 무슨, 넌 외동이야!”
유 회장의 고함이 식당 룸 밖까지 들릴 정도였다. 해준은 수저를 놓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건 수긍이나 인정이 아니라 그저 말이 최대한 빨리 끝나길 기다리는 태도였다.
전보다 뻣뻣한 태도에 가윤이 강수를 둘지, 아니면 한 발짝 물러날지 고민하던 때였다. 룸 밖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유윤재 씨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그래라.”
회장은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는 듯 분을 삭이며 덤덤히 대꾸했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유윤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의 옆엔 재이가 서 있었다.
가윤과 해준은 놀라 떨떠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유 회장이 느긋하게 윤재를 가윤에게 소개했다.
“우리 해준이랑 사촌일세. 지나가면서 인사한다길래 들르라고 했어.”
“안녕하세요. 유윤재입니다.”
해준의 신경은 유윤재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재이에게 쏠렸다.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진 게 마지막인 만큼 재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너는 여기 왜.”
유 회장도 재이에게 신경이 쏠리긴 마찬가지였다. 유윤재가 매끄럽게 재이를 설명했다.
“저 요즘 가게 준비하는 거 이 친구가 도와주고 있어요.”
“그래?”
유윤재의 대답에 유 회장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기껏 미국에서 데리고 와 딴짓만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벌써부터 붙어 다닐 정도의 사이로 발전했다니.
마음에 쏙 드는 진행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엉덩이가 가벼운 계집애가 해준의 옆에 붙어 있었다니 괘씸하기도 했다. 진작에 이런 방법을 썼어야 했다. 그랬다면 결혼도 일찌감치 시켜서 손주를 봤을 수도 있는데.
“둘이 잘 맞나 봐요. 다행이네.”
가윤이 의미심장한 칭찬을 던졌다. 유 회장이 거들었다.
“……열심히 해 봐라.”
해준의 뒤가 아닌 윤재의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재이. 그 광경이 몹시 마음에 든 유 회장이 재이와 윤재에게 호의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자신을 콕 집어 던지는 격려는 아니었지만 그런 뉘앙스조차 생전 처음이었다. 재이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해준의 입매가 굳었다. 그 광경 자체가 명쾌한 부분 없이 찜찜했다. 해준의 직감이 나쁜 예감을 확신했다.
“설마 걔 여자로 봐?”
“마지막 경고야. 네가 네 맘대로 인생 말아먹고 사는 건 관심 없어.”
“오 이게 형 진심이야?”
“그런데 내 바운더리에선 불가해. 다시 한번 말한다. 마지막 경고야.”
“…….”
“꺼져.”
해준은 아무 말 없이 유윤재를 뚫어질 듯 쳐다봤다. 아무래도 새벽녘 던졌던 경고가 와닿지 않은 듯했다. 말뿐이었던 자신이 너무 신사적으로 보였던 걸까.
해준은 사업가였고, 모두를 아우르는 리더보다 보스에 가까운 독단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보다 분명히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뛰어난 사업적 판단으로 항상 옳았다. 그의 부하도, 해준 자신도 명령에 어긋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해준은 자신의 차량으로 돌아와 권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 비서.”
-예. 본부장님.
“유윤재 한국 왜 온 거라고 그랬지?”
-한국에서 좀 쉬고 싶다고 했답니다.
“좆같은 소리 하네. 거짓말도 성의가 있어야지.”
해준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싸늘한 빈정거림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권 비서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따로 알아볼까요.
해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회장님은 알아보기 힘들 거고. 윤재 옛날에 난리 났던 그 여자 수소문해 봐.”
해준의 말에 권 비서가 흠칫 놀라 물었다. 권 비서는 집안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괜찮을까요……?
윤재가 쫓겨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한때 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유 회장은 목덜미를 잡고 넘어갔다. 일이 갈무리되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여태 쉬쉬했던 대형 사건이었다. 아무도 언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서 잊혔던 그 사건의 그 여자. 그러나 해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책임질 테니 최대한 빨리 알아봐.”
* * *
재이는 윤재와 함께 가게로 돌아와 공사를 도우며 잡일을 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 커피를 마시며 빨대를 입에 문 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야한 생각해?”
“응?”
그녀의 시야로 윤재의 손이 들어와 휘휘 젓듯 흔들렸다. 재이가 놀라 퍼뜩 고개를 들어 어느새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윤재가 재이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땡땡이야?”
“아니, 그냥.”
“그냥?”
“이제 열심히 하려구.”
재이의 대답에 윤재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뜬금없이?”
“아니, 진지하게.”
“뭐, 맘대로 해. 나는 땡잡았네.”
윤재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재이는 순전히 진심이었다.
“……열심히 해 봐라.”
유 회장의 미묘한 표정이 재이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았다.
매사 본인에게 얼음장 같던 분이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는커녕 눈총이 쏟아지지 않으면 다행인 분이었다. 자신을 무척이나 못마땅해하는 것도 잘 알았다.
화도 내지 않고 욕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재이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기억 속 그 장면이 귀하게까지 느껴졌다. 바다 앞보다 가물어 있는 땅에 물 한 모금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 심리 같은 건가.
회장이 아직도 여전히 자신을 못마땅해한다는 걸 알지만 새삼 달라진 반응을 보자 생각이 많아졌다. 표면적으로나마 해준과 멀어지니 이렇게까지 변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무리하게 욕심내어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했던 건 아닐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한다면서 왜 움직이지 않지, 안 사원?”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는 모습에 윤재가 재이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의 농담에 재이가 싱겁게 웃다 넌지시 부러운 속내를 내비쳤다.
“회장님이 너 되게 좋게 보는 거 같아.”
처음에는 저런 껄렁한 인간을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게 자신의 착각인 듯했다. 해준보단 낫지만 마찬가지로 아부가 어렵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성격은 재이의 맹점이었다.
반면 윤재는 공사장 인부와도 몇 분 만에 형님 아우 할 만큼 유들유들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관계를 매끄럽게 이어 나가는 건 즐겁고 쉬운 일이었다. 재이는 그런 성격을 보며 내심 부러웠다.
“……회장님이?”
재이의 말에 유윤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지만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다. 유윤재는 재이의 추측은 사실과 정반대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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