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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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재를 집으로 들인 건 오기와 미움, 유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재이는 해준이 미웠다. 암묵적으로 둘은 서로에게 유일하게 간섭할 수 있는 사이였다. 허울은 남매였지만 실상은 부부와 다름없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귓등으로 듣던 둘은 서로의 손발이 되어 아주 긴밀하고 직접적인 의견을 내놓고, 그걸 반영했다.

하지만 해준은 일방적으로 관계를 이탈했다. 남의 남편이 되겠다고 하며, 자신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래 놓고서 자신에게는 여전히 전과 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유윤재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재이가 가까워지지 말라는 해준의 말을 보란 듯이 무시하며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너, 나 일부러 초대한 거야?”

“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래서 윤재의 말에 화들짝 놀란 걸지도 모른다. 재이의 놀란 표정을 본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윤재가 능청을 떨며 허전한 집을 구경했다.

“지금 여기 와서 집 빈 거 보라고, 집안 살림을 채워 달라고 일부러 들여보낸 거지?”

재이가 소리 없이 어설프게 웃었다. 유윤재의 장점은 그런 거였다. 부담이 없고 행실에 비해 거부감이 덜한 인간. 특유의 능청맞음은 같은 말이라도 덜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도 그 정도를 지켰다. 그는 잠시라도 있었던 일을 잊게 해 주는 남자였다.

“근데 와인 잔이 없어.”

텅 빈 찬장을 보며 심란하게 말하는 재이의 뒷모습에 유윤재가 말했다.

“넣었을 때 취하면 다 똑같아. 아무거나 줘.”

“종이컵도?”

“괜찮아, 괜찮아.”

분명 생색낼 수 있을 만큼 고가의 와인이었지만 그는 종이컵도 환영했다. 상대를 편하게 하고 의외의 소탈함과 담백한 매력으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게 유윤재의 강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집에서 뭐 하고 지내?”

한참을 놀리던 윤재는 재이의 컵에 와인을 따라 주며 걱정스레 물었다. 집에 있는 거라곤 물밖에 없다시피 해 지금 두 사람 앞의 식탁에 놓인 건 집 앞에서 급하게 사 온 안주뿐이었다. 재이가 단출한 상차림을 보며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휴대폰 하고…… 할 일 하고.”

“너무 심심하겠는데. 내가 자주 놀아 줘야겠다.”

재이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괜찮아. 우리 사이에 낮에 그만큼 봤으면 됐어.”

하지만 분명 위로 아닌 위로가 되는 말이긴 했다. 재이는 한창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는 와중에 단비 같은 말이었다.

취기가 돌고, 재이의 태도가 조금 말랑해질 즈음에 유윤재가 미끼를 던졌다.

“형이 잔소리 엄청 하겠네.”

“왜?”

“나와서 이러고 산다고. 독립한다고 떼 좀 썼을 거 같은데.”

독립을 말리고, 유난스럽게 그녀를 챙길 것이란 유윤재의 예상과 달리 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돌다 어렵게 입을 뗐다.

“오빠가 직접 구해 줬어.”

“형이?”

“응.”

술에 취한 재이의 붉은 얼굴에는 씁쓸함이 숨길 새도 없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해 보였다. 유윤재는 아주 눈치가 빨랐다. 그가 신중하게 두 번째 미끼를 던졌다.

“형 결혼한다고 이제 뒷방 공주님 다 됐네.”

“공주는 무슨.”

재이는 부인하지 않고 설핏 웃으며 푸념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재이는 쫓겨나다시피 나온 듯했다. 술에 만취한 재이와 달리 유윤재는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웬만해서 취하지 않는 그는 말을 하면서 술이 깰 정도로 술에 강했다.

유윤재는 흐트러져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재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회장님 등쌀에 좀 시달렸겠다.”

“나?”

“원체 빡빡하시잖냐. 회장님은 내가 형이랑 노는 것도 싫어했어.”

“으음.”

“조심해. 난 그래서 영국으로 쫓겨났었지. 물론 내 체질엔 그게 맞긴 했지만.”

그의 조언은 사실이었지만 다른 의도를 담고 있었다. 고달픈 상황을 이용해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게 하여 심리적 거리를 좁히려 했다.

“……미안한데, 왜 그랬는지 알 거 같아.”

그때, 목덜미까지 붉어진 재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연한 거 아닌가. 유윤재는 유 회장이 선호할 만한 인간도 아니거니와 모범적이지도 못하다.

“내가 뭘.”

유윤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빠, 아니 아저씨는 멋있잖아…….”

재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윤재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예상보다 재이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삼켜야 했다.

* * *

유윤재는 어느새 식탁 위에 엎어진 재이를 부축해 소파에 눕혔다. 침실로 가기엔 반감을 살 거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유윤재는 재이의 휴대폰에 켜진 해준의 사진을 보았다. 푸른 풀이 무성한 실내는 둘이 식물원을 갔을 때 찍은 것으로 보였다. 둘의 모습으로 보아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사진이었다.

“둘이 진짜 무슨 사이냐.”

유윤재가 중얼거렸다. 사촌 형인 유해준은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일한다고 들었다. 그런 인간이 데이트로 추정되는 나들이를 갈 정도의 정성을 보인다니. 재이가 정말 친동생이었다면 더더욱 어림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재이를 꾀어내어 결혼을 매끄럽게 진행시키면 된다고 들었던 유윤재는 둘의 사이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깊다는 걸 직감했다. 여자를 다루는 건 자신 있는 만큼 쉽게 대답했지만 조금 더 정성을 쏟아야 할 듯했다.

유윤재가 술자리를 정리하고 아파트에서 나왔을 때는 꼭두새벽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올 즈음 익숙한 세단이 그의 앞에 섰다.

“타.”

운전석 창문이 열리며 유해준이 짧게 명령했다. 놀란 유윤재가 입을 벌린 채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 여태 기다린 거야?”

해준은 말없이 윤재를 쳐다보는 것으로 재촉을 대신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분란 후에 해준은 간발의 차로 택시를 탄 재이를 놓쳐 버렸다. 그는 이대로 재이를 보낼 수 없어 자신의 차를 끌고 재이의 집에 도착했다.

“아니, 왜냐면 아까부터 계속 전화 오는 거 같더라고.”

거기서 재이를 기다리고 있던 윤재를 보게 될 줄이야. 서로 얼마나 사이가 진전된 건지는 몰라도 윤재의 손에는 와인 병이 들려 있었다. 재이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그런 애가 함께 술 약속을 잡을 정도라니.

해준은 복잡한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린 채 둘을 바라보았다. 해준은 더 이상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재이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재이의 전화벨이 울리는 대신 번쩍이며 빛났다. 윤재의 말에 재이는 휴대폰을 잠시 쳐다보더니 전원을 껐다. 해준의 전화기에 여자 목소리의 기계음이 그를 비웃듯 태연하게 말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아. 아냐. 일단 들어가자.”

그 모습을 본 해준은 도저히 그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둘 사이가 마땅찮은 건 둘째였다. 유윤재가 어떤 인간인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막상 찾아가기에는 재이의 미움도 더이상 사기 싫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복잡한 생각에 매몰된 채 기다린 게 몇 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해준의 등장에 놀란 윤재가 뭐라 말하려다 일단 차에 올라탔다.

“내가 자고 나왔으면 아침까지 기다리려 했어? 한국 오더니 완전히 미친놈이 다 됐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해준이 아주 딱딱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신나게 떠들던 윤재가 싸늘하고 위압적인 뉘앙스에 멈칫하며 해준을 쳐다봤다.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일은 없으니 꿈에도 꾸지 말아라. 그 말은 유윤재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유윤재는 사람을 좋아하고 매사에 능청맞을 뿐이지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고, 그것은 집안 내력이기도 했다. 윤재는 운전대를 잡은 해준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공주한테는 왕자밖에 없다 이건가.”

“쓸데없는 소리 마.”

해준이 선을 그었으나 차에 탄 남자 둘 모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형 괜히 흥분하지 말라고. 아니, 나는 느낀 대로 말한 거야.”

“앞으로 재이랑 일을 할 거면 일만 해.”

“왜?”

“뭐?”

차 안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해준의 소관인 재이에 대한 말을 듣지 않는 윤재. 윤재에게 간섭하는 해준. 두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민감한 문제였다. 여태 해준의 요구에 유야무야 넘어가던 유윤재가 이번에는 단호하게 맞섰다.

“형. 자꾸 저번부터 이상한 말 하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해. 나는 유재이 아니야. 난 유윤재라고.”

“몰라서 하는 소리 아니야.”

“형. 결혼한다며. 예비 와이프나 신경 쓰는 게 유익하지 않을까.”

빵-----------!

해준이 한산한 도로 위에 클랙슨을 인정사정없이 눌렀다. 그게 윤재의 주제넘는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유윤재는 해준의 별난 반응에 내심 놀라는 한편 자신에게 명령하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누굴 꼬시든, 누구와 자든, 누구와 술을 마시든, 모두 자신의 의지였으니까. 물론 안재이에게 자신이 병균이라도 된다는 듯 취급하는 것도 불쾌했다.

“나는 걔 보호자야.”

“안재이 성인이야. 갓 스물이 아니라 대학 졸업까지 했다고.”

“넌 서른이 넘었는데도 작은 아버지가 물심양면으로 케어해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둘 사이에서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발끈한 유윤재가 해준을 딱딱하게 불렀다.

“형.”

“왜.”

유윤재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설마 걔 여자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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