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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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아버지에게 받았던 서울 집을 재이에게 기꺼이 내주었다. 그에게는 아주 의미가 깊은 유산이었지만 재이라면 아깝지 않았다. 그는 권 비서에게 부탁해 집 안을 채웠다. 해준이 익히 알고 있던 재이의 취향을 착실히 반영한 인테리어였다.

재이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의 집 같은 기분은 여전했다. 가구와 가전 외에는 모델 하우스처럼 텅텅 빈 상태였다. 새 가구 냄새가 날아가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짐은 해준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 온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아, 필요한 게 다 그 집에 있네.”

재이는 짐을 정리하다 자신이 필요한 생필품과 옷들이 해준의 집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윤재와 둘이서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가지러 가기가 애매하다.’는 말에 그는 그냥 사라고 태평하게 말했다.

“뭘 그런 거로 고민을 해. 그냥 사면 되지. 쇼핑 안 좋아해?”

“아……. 그런가.”

하지만 재이는 이제 재정적인 도움을 받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무리가 있었다. 재이가 집으로 돌아와 빈 옷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거 다 사면 돈이 얼만데…….”

특히 겨울 외투가 좀 비싼가. 코트 하나로 버티던 재이가 결국 해준의 집에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한 번은 가야 했다고 생각하며 해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집에 들러서 필요한 거 좀 가져갈게요.]

하지만 밤이 될 때까지 해준은 답장이 없었다. 재이가 집을 나서기 전 신발장에 서서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읽음 표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특별히 전화나 연락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섭섭한 마음에 체념하듯 집을 나섰다.

원체 바쁜 사람이라 연락이 느린 편이었다. 한동안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으니 일상용 휴대폰은 더욱 드물게 확인하겠지. 재이는 ‘언젠간 확인하겠지.’ 하는 심경으로 해준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가윤을 마주칠 줄이야.

“어머. 오랜만이네. 여긴 어쩐 일이야?”

화장실에서 나온 가윤이 되레 재이를 손님처럼 맞았다. 재이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지듯 말없이 해준을 바라봤지만 그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재이는 그와 가윤을 번갈아 보다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해준이 노크 후 재이의 방에 들어왔다. 재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옷걸이에서 자신의 외투를 벗겨 내는 중이었다.

“짐 옮겨 줄게. 밑에 차 있어. 그거 타고 가.”

“아니에요. 둘이 바쁜 거 같은데 볼일 보세요.”

“그런 게 아니라 잠깐 들른 거야.”

재이의 입에서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하긴. 결혼한다는데 집까지 드나드는 게 무슨 별일이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복잡했다. 아무렇지 않게 굴어야 하는 걸 알았지만 맘처럼 쉽지 않았다.

둘에게 집이란 공간은 특별한 의미였다. 미국에서 형편없는 집의 비싼 월세를 감당하며 차근차근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 공간은 그간 둘의 결속과 고생의 대가 같은 것이었다.

이 집에 재이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입구의 현관 열쇠 걸이부터 가장 안쪽 드레스룸의 옷걸이까지 재이가 고른 것이었다. 해준이 그렇게 하게 만들었고, 재이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기여했다.

“재이야.”

“잠깐이고 길게고 그냥. 저 혼자 알아서 갈게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해준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와 재이는 집을 특별하게 여기며 외부인을 꺼려 했기에 더했다. 재이가 느낄 불쾌함을 해준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윤을 강하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해준 씨. 안 가요?”

가윤이 노크하며 재이의 방문을 빼꼼 열었다. 재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옷을 한가득 챙겨 방을 나왔다. 뾰로통해 보이는 재이의 모습을 보자 가윤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자신과 해준은 부부가 될 예정이니 재이가 응당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나 잠깐 화장실만 들른 거야. 오늘 약혼식 드레스 피팅 같이 하고 나오는 길이거든.”

가윤은 따가운 재이의 마음에 소금 한 꼬집을 뿌려 보았다. 회사를 곤란하게 만들어 놓고 잘 사는 줄 알았더니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아 그나마 이 정도에 그쳤다. 가윤은 해준이 자신을 말없이 싸늘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같이 나가요. 우리도 나갈 거니까.”

재이는 내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해준과 재이 그리고 가윤이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가윤은 재이를 오랜만에 만난 김에 순순히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주말에 상견례 할 건데. 올 거죠?”

“누가요?”

“재이 씨 말이야. 당연히 와야지, 동생인데.”

상견례. 재이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자신이 집을 나가도 해준은 아무런 타격 없이 결혼을 진행했다. 오히려 둘은 닻을 올린 듯 순항 중으로 보였다.

재이의 심기가 뒤틀렸다. 그래 놓고서 자신에게는 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간섭하는지 화가 났다. 해준에게 들으란 듯 말했다.

“동생 아니라 남인데요. 제가 저 아저씨 상견례 하는 데 왜 가요.”

“재이 씨. 화났어?”

“화난 거 아닌데요. 회장님도 그러세요, 저랑 피도 안 섞였는데 무슨 오빠냐고.”

재이의 돌발 발언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재이는 꼭 해준의 일이 아니더라도 가윤이 자신을 국장실로 데리고 가 합의서를 쓰게 유인했던 것을 잊지 않았다.

“저 아저씨 사랑해요.”

가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이가 해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게 단순한 가족 같은 마음과 정이 아님을 눈치챈 지는 오래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숨기기 급급할 것이라고 여겼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가윤 씨, 먼저 들어가요. 재이는 내가 보낼 테니까.”

해준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으나 가윤은 더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상황은 종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도 재이를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재이 씨. 아끼는 오빠가 결혼하는 건 싫을 수 있지만 장난이 지나치네.”

“장난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거로 저한테 으스대지 마세요.”

“뭐라구요?”

“약혼했다가도 파혼하고, 결혼했다가도 이혼할 수 있잖아요?”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재이가 보란 듯이 올라탔다. 해준은 반사적으로 재이를 따라 타려고 했으나 가윤이 그를 붙잡고 말했다.

“회장님은 이 정도인지 모르시죠?”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혼이 거래이고 일이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푸대접을 받을 이유도 없었다. 가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여자였고 어느 누구를 만나도 이렇게까지 참아 본 전력이 전무했다.

해준은 가윤의 말이 협박이자 으름장임을 알았지만 가윤의 손을 뿌리쳤다. 동시에 재이를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가 보겠습니다.”

가윤의 패배였다. 가윤은 허공에 손을 띄운 채 굴욕감에 입술을 앙다물었고 해준은 다급하게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 * *

재이는 살면서 가장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쳐 버렸다.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상견례 이야기를 꺼내는 가윤에게 바락바락 대들며 악담을 한 것이다. 재이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저 아저씨 사랑해요.”

우습게도 재이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회했다. 돌변한 가윤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감당 못할 말을 해 버린 건지 실감했다. 당연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그 뒤로 가윤과 나눈 대화는 실수를 돌이킬 수 없어 마구잡이로 떼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재이 씨. 아끼는 오빠가 결혼하는 건 싫을 수 있지만 장난이 지나치네.”

“장난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거로 저한테 으스대지 마세요.”

“뭐라구요?”

“약혼했다가도 파혼하고, 결혼했다가도 이혼할 수 있잖아요?”

재이가 도망치듯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녀를 태운 차량이 달리는 내내 재이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무리 복기해도 자신이 해 놓은 짓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무책임하고 평소 본인답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는지 몸서리치게 후회스러웠다.

해준은 자신의 돌발 행동으로 무척이나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재이 본인도 예외는 없겠지만 해준에게 갈 영향을 생각하면 끔찍한 걱정이 들었다. 가윤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보아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Rrrrrrr-

Rrrrrrr-

휴대폰에 벨소리가 울렸으나 재이는 받지 않았다. 발신자는 유해준이었다. 재이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도저히 전화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준의 성격상 왜 그랬냐고 다그치진 않겠지만 그래서 더욱 뭐라고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막막했다.

결국 재이는 전화를 회피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었다. 얼마 가지 않아 택시는 재이의 집 앞에 도착했다.

재이는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도망쳐 숨을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재이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귀신이라도 쫓아오듯 혼비백산하며 아파트 입구로 들어갈 때였다.

“안재이.”

앞에서 익숙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놀란 재이가 걸음을 멈췄다. 유윤재였다.

“……네가 왜 여기 와 있어?”

재이가 너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움직이지 못하자 윤재가 가까이 왔다. 그는 리본이 묶인 채 포장된 술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휴대폰 못 봤어? 적적해서 같이 술 한잔하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 어어……. 언제 온 거야?”

“얼마 안 됐어. 요새 고민이 많아 보이길래. 아까 와인 좋아한다며.”

“아까? 아.”

재이는 문득 가게에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뭘 그런 거로 고민을 해. 그냥 사면 되지. 쇼핑 안 좋아해?”

“아……. 그런가.”

“난 술 쇼핑이 제일 재미있더라. 너는?”

“예. 뭐 나두.”

“와인?”

“예예.”

별 의미 없이 대답만 하며 지나간 대화였는데. 그걸 기억해서 집 앞까지 오다니. 무심결에 한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던 재이가 당황했다. 유윤재가 그녀의 난감한 기색을 눈치채고 물었다.

“좀 그러면 돌아갈까?”

재이는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누군가와 썩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있고 싶었지. 하지만 낮에 유윤재의 말에 그렇게나 건성으로 대답한 게 뒤늦게 미안했고, 그런 사소한 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마음이 쓰였다.

“일단은…….”

“아니, 왜냐면 아까부터 계속 전화 오는 거 같더라고.”

윤재가 그녀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그 빛은 어두운 밤거리에서 특히나 더 눈에 띄었다. 이미 택시에서부터 계속 전화가 오는 중이었다. 재이는 휴대폰 액정에 떠 있는 유일하게 특별한 저장명을 보고 도리어 미운 마음이 솟았다.

“아. 아냐. 일단 들어가자.”

재이는 애써 웃어 보이며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나의 의미]. 해준의 저장명이 휴대폰 액정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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