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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재는 여자를 시즌 메뉴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누군 와이프를 쌀밥, 애인을 특별식으로 비유했지만 유윤재에게는 꾸준한 관계 자체가 없었다. 모든 인맥이 그런 건 아니었다. 오로지 여자에 한정한 습관이었다.

“지각입니다.”

윤재가 뻔뻔한 목소리로 카페에 들어섰다. 재이는 인부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쩔쩔매다 그를 반갑게 맞았다.

“왜 이제 왔어?”

“아. 누구 만날 일이 있어서.”

“아니,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거 걱정하지 말라니까. 일단 나가자.”

유윤재가 재이를 끌고 가게를 나왔다. 재이가 그를 쫓아가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어디 가는데?”

“커피나 마시러 가.”

“가게 안에 믹스 있잖아.”

“난 융드립이 마시고 싶어.”

유윤재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태연하게 굴 것처럼 보였다. 방송사에서 빡빡한 출퇴근과 빠듯한 업무에 시달리던 재이는 이런 프리한 업무 환경에 혼란스러웠다.

윤재는 재이와 간단히 식후 커피를 마신 후 어김없이 딴 길로 새었다. 해준은 자신이 재이와 함께 있는 것이 적잖이 거슬리는 눈치였지만 그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윤재는 유 회장의 약속대로 재이를 꾀어내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도대체 가게에는 언제 들어가?”

“굳이 들어가야 돼?”

“일은 안 해?”

업무 시간에 밖에 나와서 한가롭게 산책을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이는 재이의 모습에 윤재가 그녀를 달랬다.

“자, 들어 봐. 오늘 일이 뭐야.”

“리모델링 공사?”

“그래. 그 리모델링 공사를 누가 해.”

“인부 아저씨들이.”

“우리가 굳이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할 이유는?”

“…….”

재이는 조금 말문이 막혔다. 한 마디로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일은 안 하고 먹고 놀겠다는 뜻인가? 일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작아도 악착같이 달려드는 모습만 보고 자란 재이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잠깐만, 당연히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지, 아니지.”

눈을 둥그렇게 뜬 재이의 얼굴을 보며 윤재는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준의 공주님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도대체 얘가 어떤 면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형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안재이는 어떤 인간이길래 사람을 저렇게 맹목적으로 만드는 걸까. 윤재의 개인적인 궁금증이 불쑥 솟았다.

“그래도 우리라도 있으면 일이 빠르니까…….”

“공주님, 내 말은.”

윤재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며 말했다.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생각해 봐도 영문 모를 말에 재이는 덩달아 자신의 목소리도 낮추며 물었다.

“왜?”

“그래도 우리 월급은 나올 거니까.”

윤재가 씩 웃으며 재이를 제치고 앞서 나갔다. 재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생각하다 그를 쫓아갔다.

* * *

그때쯤 정재계에서 해준과 가윤의 약혼 소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해준이 방송사를 정조준한 배후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처가 길들이기 정도로 생각하였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혹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유 회장 손주답네. 하는 짓이 똑 닮았어.”

하지만 사실은 그게 보잘것없는 계집애 하나 때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적었다. 정 국장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여러 번 넘기며 결국 자신의 팔다리와 같은 김 부장을 내쳐야 했다. 분노에 휩싸인 정 국장이 결혼을 엎으라며 불같이 화를 냈으나 가윤은 꿋꿋하게 버텼다.

“정신 차려라. 이런 수모를 겪고 어떻게 결혼을 진행하겠다는 거냐!”

“전 할 거예요.”

“정가윤 너!”

“이런 수모까지 겪고도 결혼도 못 하는 게 더 웃기다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는 건 가윤도 마찬가지였으나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모두를 상쇄할 만큼의 이득이 있었으니까.

해준과 시간을 보낼 때는 절로 목이 빳빳해졌다. 그는 성격을 제외하곤 정말로 완벽한 남자였다. 다루기 쉽지 않다는 흠조차 자신에게만 그런 게 아니었기에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염문설이 정재계에서 떠돌자마자 가윤이 받는 대접은 달라졌다. 가윤은 약혼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말 섞기도 어렵다는 이 남자를 가지게 될 여자라는 자신감은 그 어떤 권력보다 달콤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몰랐지, 이런 경험을 하고 나자 자신의 남편으로 유해준보다 못한 남자를 앉히기는 죽어도 싫었다. 애석하게도 그와 견줄 남자는 없었기에 유해준이 아니면 싫었다.

그날은 가윤이 약혼식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피팅을 하는 날이었다. 결혼도 전에 뒷말이 많아지는 걸 꺼린 유 회장은 대부분의 중요한 일정을 해준과 가윤이 함께 동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해준은 내키지 않았고, 업무 일정상으로도 무리였으나 새로운 일이 추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 너무 예쁘죠.”

직원의 감탄사와 함께 커튼이 젖혀지며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가윤이 드러났다. 주위에서는 연신 호응하며 그녀와 드레스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칭찬하기 바빴다. 가윤이 덤덤히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해준에게 물었다.

“어때요?”

“좋습니다.”

해준이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꾸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남자답고 과묵하시네요.”

보다 못한 직원들이 해준의 성격에 대해 언급해도 유해준의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다음 드레스도, 그다음 드레스에도 큰 반응 없이 좋다는 말뿐이었다.

“이이가 성격이 좀 그래요. 평소에도 얼마나 무뚝뚝한지 몰라요.”

가윤은 넉살 좋게 웃으며 넘겼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 중이었다. 오기가 생기기까지 했다. 해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윤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 마음까지 헤아려 줄 생각은 없었다.

“일을 원래 그렇게 해요?”

결국 피팅샵을 나온 가윤이 그에게 일부러 팔짱을 끼며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용건만 말해.”

“일하러 나온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기왕 할 거면 프로답게 영혼을 담아서 연기해요.”

“미안한데, 일에도 우선순위가 있어.”

“소홀해도 되는 업무는 아닌 거 같은데요.”

“글쎄. 본인은 그렇다는 말로 받아들일게.”

한마디를 그냥 져 주는 법이 없는 남자가 이젠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와중에 정장 안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그의 팔뚝이 퍽 남자다웠다. 가윤은 일부러 가슴을 밀착하며 그와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떨어져.”

“태워 주세요.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다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해.”

“그거 잘됐네요. 저도 오늘 본가 가서 자려고 했거든요. 같은 방향이잖아요?”

그쯤 되자 해준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눈치채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순전히 에너지 보존을 위한 대책이었다. 유 회장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차에 태우긴 하겠지만 이마저도 결혼하는 순간 끝이었다.

“차 좋네요. 시트도 예쁘고.”

처음으로 그의 세단에 탄 가윤이 차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문득 해준은 재이가 떠올랐다. 차종을 고른 것도, 시트를 고른 것도 재이였기 때문이다.

그의 조수석에 앉는 사람도 재이가 거의 유일했다. 해준은 낯선 사람이 타면 느끼는 이질감 때문에 가급적 다른 사람과 차를 이용해야 할 때는 법인 차량을 탔으니까.

“원래 이렇게 목석같아요?”

가윤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사실은 자신의 가슴을 느껴 놓고도 뻣뻣한 태도가 변하지 않자 나온 말이었다. 해준은 여전히 재이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글쎄.”

“이래서 섹스는 언제 하려구요?”

차량은 충분히 예열이 된 상태였지만 가윤의 말에 해준은 핸들을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재이가 들었으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험관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군.”

“하.”

가윤은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으나 굳이 더 매달리진 않았다. 그녀에겐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남자란 다 벗고 달려들면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오는 종자였으니까.

둘을 태운 세단이 해준의 집 근처를 지나갈 즈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줄어든 가윤이 운전하는 해준의 팔뚝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 화장실 좀 쓰게 해 줘요.”

그는 자신의 팔뚝을 잡고 있는 그녀의 팔을 떼어 놓았다.

“뭐?”

“집이 이 근처라면서요. 나 공중화장실은 못 가요.”

해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라리 그냥 밟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아니요. 아니요. 해준 씨 여기 살잖아요.”

가윤이 어딘지 모르게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말했다. 해준은 가윤이 장난치는 게 아님을 깨닫고 속력을 냈다. 집에 데리고 가는 것도 싫었지만 자신의 차에다 실수하는 건 정말 용납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들어와요. 저 끝에서 오른쪽에 있는 화장실 쓰면 될 거예요.”

“……실례할게요.”

결국 해준은 처음으로 외간 여자를 집 안에 들여야 했다. 가윤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장실로 직행했다. 해준은 가윤이 나오자마자 곧장 차로 돌아갈 작정으로 이 집의 손님처럼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

밖에서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재이였다.

“……집에 있었어요?”

재이가 예상치 못했는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놀란 건 해준도 마찬가지였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가윤이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재이가 해준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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