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밤늦게 찾아온 해준이 더욱 잘생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못 보던 포멀한 외투는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낮에도 무심결에 새 옷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재이는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입 안에 머금으며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가방은…….”
“아니, 용건만 말할게.”
소지품을 내려놓기를 사양한 해준의 대답에 재이는 불쑥 서운함이 치솟았다. 새벽 시간 탓인지 그가 유독 아쉽게 느껴졌다.
“카페 그만둬.”
“…….”
아마 그가 자정 전에 찾아왔다면 단호히 내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새벽이었고, 혼자 외로움에 뒤척이다 예고 없이 그를 맞자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왜요?”
사실 이미 재이에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끌고 싶었다. 이 긴장감과 설렘을 느끼며 단둘이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
“윤재랑 깊게 엮이지 마.”
의외의 말에 재이가 그를 바라봤다. 해준은 재이보다 더 덤덤한 표정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재이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해준이 경고하는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유윤재 같은 놈팡이는 미국 유학 중에서도 숱하게 봐 왔다. 모자랄 게 없는 집안에 커다란 하자나 다름없는 자식들. 미국에 와서 공부는커녕 방탕한 생활과 마약을 배워 가는 인간들 중에 하나겠지.
“알아서 할게요.”
하지만 재이는 해준의 조언을 에둘러 거절했다. 유윤재에게 끌려서 그런 게 아니다. 해준에게 보란 듯이 못되게 굴고 싶었다.
“차라리 쉬는 동안 여행을 다녀와.”
“왜요? 그사이에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려구요?”
“삐딱하게 굴지 마.”
“삐딱. 지금 이게 삐딱하게 구는 거 같아요?”
울컥한 재이가 차오른 설움과 짜증에 해준을 도발하며 되물었다. 해준의 말이라면 매사에 오케이던 재이의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회장님이 저번에 그러시더라구요. 오빠, 오빠 거리지 말라고. 아주 절 죽일 듯이 질색을 하시던데.”
“…….”
마음이 깊은 만큼 골이 깊어졌다. 재이는 이상할 정도로 여전히 그를 선망하고 사랑했다. 숨기느라 급급하고 마음을 욱여넣어도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마저 빼앗길 것 같은 와중에 재이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댓 번 오르내리곤 했다.
“그래요, 그럼 이제 아저씨라 부르지 뭐. 난 아저씨 사랑하고, 아저씨는 그걸 알겠다고 하면서도 지금 결혼하겠다고 그러고 있잖아요. 내가 굉장히 참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철없이 굴지 마.”
둘 사이에서 긴장감이 터질 듯 팽팽했다. 재이가 그를 쏘아보며 경고했다.
“애 취급하지 마요. 나도 더 이상 안 참아요. 애 취급하지 말라구요.”
“안재이.”
해준이 어린아이 어르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재이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키스하려 그를 끌어안았으나 키 차이 때문에 입술이 아쉽게 빗나갔다. 입가에 닿는 것으로 그쳤고 해준은 곧장 재이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 냈다.
“안재이,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
해준이 고함쳤다. 재이가 격양된 감정에 가슴을 들썩이며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나는 안 돼요?”
“가족이니까.”
재이가 이를 꽉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 대해 숱한 말들을 들으며 자라 왔다. 가까이 있고 싶다면 욕심내지 말라는 말에 얌전히 동생으로 남았다. 그에 대한 마음을 억눌러 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데 이젠 외간 여자의 남편의 되어야 하니 떨어지라 한다.
“아니요. 안 할래요. 이제 그냥 남 할래요.”
해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침묵했고 재이가 울먹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해준은 재이가 들어간 방에 따라 들어갈까 하다 멈추고 냉정을 찾았다. 지금 달래 준다고 해도 재이의 요구대로 결혼을 철회할 수도 없었고, 곧이곧대로 입을 맞춰 줄 수도 없었다.
“…….”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거도 없었다. 그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재이에게 베풀기 위해서, 든든한 힘이 되고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살았다. 그게 인생의 몇 없는 낙이었는데 이따위 무력감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해준은 살림살이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아 휑한 내부를 둘러보다 집을 나왔다. 주차장을 지나 차에 다시 탔다. 그는 탁한 한숨을 쉬며 얼굴을 매만졌다.
“……미친놈.”
자조적인 한탄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재이가 키스하려다 실패한 입술의 감촉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살갗임에도 그 부분이 낯설게 느껴졌다. 해준은 자신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는 재이의 눈빛을 회상했다.
당장 뛰어가 보듬어 주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이런 감정은 순간적인 흔들림이고 모든 것은 자신만 참으면 되는 일이라고. 재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냉정을 찾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 * *
해준은 다음 날 식당에서 윤재를 만났다. 약속 시간은 오전이었으나 늦게 일어났다며 연락이 온 시간은 오후 세 시가 넘어갈 때였다. 예상대로 유윤재에게서는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났다. 해준이 여상스럽게 물었다.
“약도 했어?”
“아니. 아. 안 그래도 주말에 잠깐 갔다 올까 싶어서. 한국에서 구하려니 귀찮네.”
“되도록 자제해라. 작은어머니가 한 번 더 걸리면 뒤주에 가둬 버린다고 이를 갈고 계시더라.”
“아이, 나도 그냥 하는 말이지.”
그게 거짓말임을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해준은 누가 잘 되어도, 누가 못 되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인물이었다. 그가 신경 쓰는 범위는 아주 폐쇄적이며 좁았고 유윤재 같은 인간은 들어올 수 없었다.
“한국엔 언제까지 있으려고.”
“그냥 뭐…… 이번에는 좀 있다 가려고. 멘탈 디톡스도 할 겸.”
“카페는.”
해준의 말에 윤재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오늘 뭐 불심 검문이야? 하다가 싫증 나면 그만두는 거고 뭐. 거기 어차피 자리가 좋아서 들어올 사람 많아.”
“차라리 가기 전에 나한테 넘겨.”
“왜. 그 공주님 주게?”
“내가 쓸 수도 있고.”
“형은 커피 집 하면 마네킹처럼 그냥 서 있어야 해. 서비스 마인드가 없어.”
윤재는 능청스레 대화를 이어 갔지만 그도 마찬가지로 해준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유해준이 카페에 관심이 있을 리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공주님 살길은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겠지.
“큰 생각 없으면 일찍이 나한테 넘겨.”
“가게? 형, 나도 돈은 벌어야 먹고살지.”
“돈이 달려서 그러는 거면 도와줄 수 있어.”
해준이 협상 카드를 내밀었다. 명확한 용건을 밝히지 않고 빙빙 둘러 가는 모습에 윤재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형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냥 보자고 한 건 아닌 거 같고.”
“재이 쓰지 마. 잘라 줘.”
해준은 굳이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가 윤재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둘이 더 이상 엮이지 않는 것. 그러나 그의 예상 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건 좀 그런데.”
해준은 가만히 윤재를 바라보다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애가 성실하고 성격도 괜찮아 보여서 말이야.”
해준의 머릿속에 윤재가 재이를 자르지 않는 이유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이 빠르게 세워졌다. 첫 번째. 재이를 이성으로서 마음에 들어 한다. 두 번째, 돌발 행동을 즐기고 남의 지시를 기피하는 성격 탓이다. 세 번째, 의도를 가지고 재이에게 접근했다. 해준은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말했다.
“썩 마음에 드는 답변은 아니군.”
“형도 언제까지 품고 있으려고 그래. 자기가 하겠다는데 내버려 둬.”
윤재의 말에 해준은 문득 어젯밤 재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그냥 남 할래요.”
그 말을 들은 해준은 순간 머리가 새하얘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재이의 뜻은 자신과 더욱 깊게 엮이고 싶어 하며 나온 말이었지만, ‘남’이라는 단어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이었다.
재이와 자신이 남이 된다.
지금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였지만 그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재이는 해준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 탓에 재이는 자신의 마음을 가늠하지 못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의 인생에 재이는 ‘이유’였다. 이렇게까지 고되게 일해야 할 이유. 미국에 가야 할 이유. 대원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 계속해서 죽지 않고 살 이유. 인생의 중요한 판단에는 재이가 근거가 되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일하는 거 보고 가지 그래.”
“일?”
“왜 새삼스러운 표정이야. 일을 하루 종일 하는 양반이. 당연히 먼저 출근해서 일하고 있겠지. 별거 없어. 그냥 인부들 도와주고 그러면 끝.”
“먼저 가 볼게. 생각 바뀌면 말해라.”
윤재가 밥술을 뜨며 태연하게 말했지만 해준은 이미 재이가 일하고 있다는 말에 꽂힌 상태였다. 그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유난은.”
윤재는 정말로 계산 후 식당을 나가 버리는 해준을 보며 중얼거렸다. 해준은 등 뒤에서 들리는 말을 간단히 무시했다.
식당과 카페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해준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다 멀찍이 보이는 재이의 모습에 잠시 멈추어 섰다.
건장한 인부들 사이에서 튀는 작은 몸집이었다. 편한 차림에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갈피를 못 잡고 긴장한 게 느껴졌다. 노동에 몸을 담그면 응당 겪어야 할 어려움이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결혼해야 할 이유가 되어 버린 재이를 멀리서 지켜보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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