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재이는 잘리다시피 인턴 과정에서 중도 하차했다. 며칠 내내 무기력하게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해준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첫 사회생활의 기대가 컸던 만큼 허무하고 끔찍한 결말에 대한 좌절감이 컸다.
재이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끊임없이 복기했다. 그리고 해준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했다. 뚜렷한 원인을 찾고 싶었다. 그래야 해결법을 찾을 테니까.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낸 결론은 해준에게 의지하는 마음과 대처였다. 어렵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재이는 많은 것을 기대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아직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전히 재이는 해준과 한 몸 같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되고 싶었으니까. 혼자서 속앓이와 씨름하고 있을 즈음 권 비서의 연락이 왔다.
Rrrrrr-
“여보세요. 비서님.”
-재이 씨. 저번에 이야기드렸던 인턴 과정 말입니다.
재이는 또 다른 인턴 과정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그 후보에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대원이 없었을 리가. 해준과 별개로 재이의 스펙에 가장 걸맞은 곳이기도 했다. 전에 해준이 했던 조언에 따라 인턴 지원을 준비하며 권 비서와 연락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아, 네.”
-회장님이 근래에 심기가 많이 안 좋으셔서……. 한동안은 조금 어려울 거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통보에 재이의 말문이 막혔다. 일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유 회장의 보복이 분명했다. 유 회장은 으름장에서 끝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보다 무척 곤란해졌을 뿐이다.
“괜찮아요. 다른데 넣으면 되죠, 뭐.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한테도 따로 말하지 말구요.”
하지만 재이는 실망한 기색을 애써 숨겼다. 어찌 보면 자신이 해준과 인연을 이어 나가며 감수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최대한 겸허히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권 비서는 더욱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저기 그, 재이 씨.
“네?”
-회장님이 이번에 화가 좀 많이 나셨어요.
“…….”
-차라리 한동안 조금 쉬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아니면 공부하러 외국에 가신다고 하면 언제든지 말씀드려 볼 수 있는데요.
유 회장의 의도는 분명했다.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셈이었다. 궁지로 몰고, 또 몰아 해준의 눈길이 닿지 않는 외국으로 영영 보내 버릴 작정이었다. 재이가 이번에는 울컥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다고 사람 손발을 묶으려고 하시나요?”
-죄송합니다.
“권 비서님, 저 이제 집 나왔어요. 오빠한테 받는 카드도 다 퀵으로 보냈어요. 혼자 조용히 안 엮이고 살겠다는데 왜 도움을 자처하게 만드나요?”
재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함께 지내던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게 일주일이나 되었다. 그의 재정적인 도움 없이 살 작정이었다.
유 회장의 권유처럼 외국으로 훌쩍 떠나 버리면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이는 해준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외국 생활에 지쳐 있었다. 그와 함께 고군분투했던 시간인 만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만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해준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차라리 자영업 쪽으로 조금 일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네?”
둘의 사정을 아는 권 비서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 * *
권 비서의 제안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유윤재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회사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아 카페를 차리려고 한다. 오픈 준비를 도우며 여타의 공부나 자영업을 병행하는 게 어떻겠냐는 뜻이었다.
재이는 아르바이트도 한번 해 보지 못했지만 당장의 수입이 필요했기에 일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잘 알지는 못해도 유윤재의 성격상 일에 매진하며 까탈스럽게 굴 것 같진 않았다.
“오, 진짜 왔네?”
유윤재는 재이가 일하러 온다는 소식에 선뜻 환영의 뜻을 보였지만 막상 찾아가자 꽤나 놀란 눈치였다.
유윤재는 목장갑에 작업복 차림이었다. 볼에는 먼지와 페인트 가루가 묻은 채 기존에 있던 인테리어 자재들을 뜯어내는 중이었다. 바닥에 쌓여 있는 집기들과 휑한 건물 안을 둘러보며 재이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어, 오랜만이야. 잘 부탁해.”
재이가 계면쩍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유윤재에게 조금 친절하게 대할 걸 후회가 됐다.
“공주님이 오셨는데 부탁은 내가 해야지.”
“아니야……. 내가 뭐,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되나?”
“사장? 편할 대로 해. 오빠라고 불러도 좋아.”
“그냥 사장님이 낫겠어.”
재이가 진저리 치자 유윤재는 괜스레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해준과는 정반대의 인간이었다. 능청스러운 성격에 뭐든 쉽게 넘어가는 자유로운 영혼.
“권 비서님 이야기 듣고 왔어. 뭐부터 하면 돼?”
“할 거 없는데.”
“뭐?”
“그냥 뭐 아직은 할 게 없어. 리모델링 하고 있으니까 와서 뭐 공사하는 것 좀 보고 그러고 있다가 가면 돼.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그게 다야?”
정말 자리 잡고 싶어 하는 거 맞아? 남 일처럼 말하는 듯한 태도와 너무나 허술해 보이는 계획에 재이가 떨떠름하게 물었을 때였다. 유윤재는 재이의 뒤로 시선을 옮기더니 반갑게 팔을 흔들었다.
“어, 형!”
해준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고급 맞춤 정장을 갖춰 입은 채였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언제 어디서나 빛이 났다. 그새 살이 조금 빠진 거 같았지만 오히려 겨울의 센치함과 어울려 모델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런 곳에서 해준을 마주칠 줄 몰랐던 재이는 당황하여 입술을 깨문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해준은 재이를 훑어보고는 윤재와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이네.”
“형이야 원래 바쁘니까 그렇지. 커피 한잔 줘?”
“그래.”
해준이 서류 가방을 벽에 세워 놓으며 간이 의자에 앉았다. 유윤재는 특유의 능글맞은 말투로 해준을 상대했다.
“참고로 믹스밖에 없어. 근데 이거도 기술인 거 알지. 차가운 거로 드릴까?”
“자신 있는 거로 줘.”
“역시 유해준. 말 한마디 호락호락하지 않다니까.”
재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둘을 바라보며 기분이 묘했다. 건물 안에는 많은 집기들과 기구들이 철거된 상태라 커피포트밖에 없었다. 유윤재가 끓일 물을 사 온다며 1층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단둘이 남겨진 재이와 해준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해준이 휴대폰을 확인하다 먼저 입을 뗐다.
“갑자기 무슨 카페야.”
재이에게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분명 이 소식을 권 비서에게 전해 들었을 테고 해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뜬금없었을 것이다.
“회장님이 손발 다 묶어 놓았는데 그럼 뭐 먹고 살아요.”
“카드는 왜 보냈어.”
“이제 제가 돈 벌어서 쓸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적당한 자리 알아볼 테니까 이 일은 그만둬. 정 하고 싶으면 가게 자리를 알아봐 줄게.”
둘의 대화는 창과 방패처럼 팽팽하게 맞섰다. 하지만 재이의 마음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보다는 해준에 대한 서운함과 앙금이 더욱 컸다.
약혼도, 결혼도, 죄다 마음대로 하면서 왜 자신은 안 된다는 건지. 기존에 견고하던 둘 사이에서 먼저 이탈한 건 본인이면서 왜 자신에게는 이마저도 허락할 수 없다는 건지. 심통이 난 마음은 쉽게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요. 그냥 제가 알아서 한다구요.”
“안재이, 고집부리지 마.”
“고집이 아니라 제 선택이에요.”
“하지 말라고 했어.”
신경질이 난 재이가 더욱 강하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둘이 뭐 해? 분위기가 왜 이렇게 흉흉해.”
“…….”
돌아온 유윤재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물었다. 재이는 말과 함께 한숨을 삼키고 괜스레 딴청을 했다. 해준이 덤덤히 할 말을 전하며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던졌다.
“흉흉할 게 있나. 회장님이 열심히 해 보라고 전해 달라시더라.”
유윤재가 공중에서 봉투를 낚아챘다.
“와. 이거 영광이네. 나중에 집에 가서 봐야겠는데.”
지폐 다발이 들어 있는 눈치였다. 해준이 별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리고 재이는 나랑 같이 집에 가자. 일자리도 알아봐야 하고.”
바닥 즈음 시선을 애매하게 두고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 있던 재이가 해준을 쳐다봤다. 유윤재가 조금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오늘부터 카페 도와준다던데?”
해준이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재이에게 선택권이 넘어갔다. 그녀는 별달리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오빠가 아직 못 들었나 봐. 카페 오픈할 때까지 같이 준비 도와주기로 했어.”
그가 몰랐던 사실인 양 말했다. 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그날 밤, 퇴근한 해준은 재이에게 마련해 준 집으로 갔다. 별다른 연락도 없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재이는 자신을 기다리던 게 습관이 되어 밤늦게 잠들기 일쑤였으니까.
“누구세요.”
초인종 소리에 문 너머로 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내 재이가 문을 열었다.
“누구…… 아.”
“내가 누군지 알고 그냥 문을 열어.”
재이는 굳은 채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너인 줄 알았으면 열지 않았을 거란 표정이었다. 해준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이야기 좀 하지. 여기서 말할까?”
“……들어와요.”
당신이 뭔데 여길 찾아왔냐며 밀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재이는 선뜻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벌써 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꼭두새벽에 남자에게 피로를 더해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집에 들르기 위해 퇴근을 서둘렀을 게 뻔했기에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
“내일도 나가는 거 아닌가?”
“그래야죠.”
해준이 현관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재이는 습관적으로 외투를 받으려다 멈칫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얼마 전만 해도 함께 살던 때가 떠올라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유해준. 익숙한 모습과 새로운 집의 낯선 풍경. 익숙함과 낯섦이 적절히 뒤섞인 상황에 문득 재이는 입이 마르며 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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