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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부 직원이 재이를 데리고 간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낡고 선팅이 짙은 차 앞에 서게 된 재이는 꺼림칙했지만 안 움직이고 뭐 하냐는 직원의 눈짓에 뒷좌석에 탔다. 문을 닫자마자 뾰족한 질문이 날아왔다.

“좋아요? 속 시원해?”

굳이 묻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가윤이었다. 내려오는 동안 평정을 찾은 재이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이세요?”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뭐가 좀 달라져요? 그새 쪼르르 달려가서 이를 만큼 어릴 줄은 몰랐네.”

“제가 누구한테 이르는데요.”

가윤은 보기 드물게 공격적이고 감정적으로 재이를 쏘아붙였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당황한 건 가윤도 마찬가지였다. 약혼식이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정말로 기사를 터트리다니.

이 일은 혼담에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해준은 사업가였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모두가 분명 재이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재이가 어리둥절하게 발뺌하는 모습이 더욱 얄미워 보였다.

“보기보다 혼자 할 줄 아는 게 심하게 없네요. 오빠 밑에서 어화둥둥 커서 그런가?”

재이는 그제야 방송사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게 해준의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당신 우리와 합의한 거 알죠? 각오해야 할 거예요.”

가윤은 서슬 퍼런 말을 남기고 다시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코팅된 바닥에 자동차 바퀴가 미끄러져 나가는 소리가 멀어졌다.

재이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사무실에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나 붙잡고 탓하고 싶었다. 재이가 울먹이며 떨리는 손으로 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았다. 차라리 평소처럼 받지 말라고 속으로 빌었지만 기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재이가 최대한 감정을 짓누르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요.”

-살아 있는 게 후회될 정도로 괴롭게 만들 거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데요? 국장까지 연관되어 있다고 하잖아요.”

속이 답답했다. 자신은 그에게 영향이 가지 않기 위해 합의서까지 썼지만 이렇게 물거품이 되어 버리다니.

“분란 일으켜 봤자 해준이에게 악영향을 끼칠 거다. 그런 일이 있었다간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셈이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재이와 달리 해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오빠.”

-지금 미팅 들어가 봐야 해서 이따 마저 이야기하자.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은 반영될 거 같지 않았다. 재이는 속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 답답했다. 여전히 자신을 싸고도는 해준의 모습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전처럼 그의 말에 곧이곧대로 따랐다간 되레 자신의 마음이 다친다는 걸 학습한 상태였다.

“이래도 그 여자랑 결혼할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같은 질문을 던질 때 그의 대답을 기대하게 되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재이야.

그는 매번 그랬듯 절대로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재이는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럴 거면 서로 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해요.”

재이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직원들의 시선이 정확하게 그녀에게 쏠렸다.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기는 숨 막힐 듯 무거웠다. 재이는 차분히 책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짐을 쌌다.

응당 그래야 했다는 것처럼 아무도 재이를 말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재이는 회사와 사회의 적폐가 되어 있었다. 부장의 모함이 몹시 억울했으나 재이는 그걸 해명하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싸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해준은 권 비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일 기사를 터트렸다. 상대방을 격추시키기 위해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서서히 풀며 정 국장과 김 부장을 괴롭혔다. 이러다 말겠지 하며 지켜보던 유 회장이 나서려 했지만 앞에서만 ‘네, 네.’ 할 뿐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해준 씨 이야기 좀 해요.]

[자꾸 이러실 거예요?]

[저 정말 찾아가는 수가 있어요.]

보다 못한 가윤이 여러 차례 대화를 요청했으나 해준은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가윤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서 대원으로 찾아갔다.

“유해준 본부장님 뵈러 왔는데요.”

“약속 잡으셨나요?”

“아니요. 따로 잡은 건 없고 약혼자입니다.”

“약혼이요?”

그 말에 비서실 직원은 서로 눈짓을 하며 의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에 가윤의 자존심이 상했다. 공공연한 사실은 아니지만 비서실에서도 이런 반응이 나올 정도라면 얼마나 관심이 없다는 걸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해준이 가윤에 대해 대외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가윤을 그저 또 하나의 거래처로 여겼다. 허울뿐인 결혼은 꼭 가윤이 아니더라도 무방했다.

“본부장님 지금 자리 비우신 데다 앞선 일정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하시는데요.”

비서가 짧은 통화 후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정말 자리 비운 거 맞아요?”

“네. 기다리시겠어요?”

“…….”

해준이 자리를 비웠다는 말만 돌아오자 가윤은 약이 올랐다. 안에 뻔히 있는 걸 아는데 사람을 돌려보내겠다고?

“잠시만요. 잠깐 전화 좀 할게요.”

“네에.”

“네. 여보세요. 회장님 안녕하세요. 저 정가윤입니다.”

결국 가윤은 유 회장의 권한을 통해 본부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작 계집애 하나 때문에 천하의 정가윤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 기가 찰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해준과 재이의 사이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졌다.

“해준 씨. 나랑 이야기 좀 해요.”

“기다려요.”

해준은 가윤이 막무가내로 들어왔음에도 본체만체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상하지 않은 멋들어진 얼굴을 하고 태연히 업무를 처리하며 말했다. 가윤은 성질을 못 이겨 씩씩거렸지만 아쉬운 처지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가 비아냥거리며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

“얼굴 한번 보기 참 어렵네요.”

“무슨 일입니까.”

“이쯤이면 됐지 않아요?”

“뭐가요.”

“그만하라구요. 지금 고작 작은 일 때문에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예 출근도 못 하고 계시고 곧 있으면 압수 수색 들어올지도 몰라요.”

“고작 그걸로?”

해준이 고개를 들어 가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가윤이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국장님, 여당에서 기부금 명목으로 돈 받아먹은 건 소화되셨답니까. 그날 이후로 총선 관련해서 편파 보도가 대폭 늘었던데.”

그사이에 조금 마른 것 같은 남자는 몹시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굶주린 짐승처럼 흔들림 없는 검은 동공이 더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가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그러게 왜 토를 달아. 내가 회장님보다 더한 새끼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반말과 존대를 미묘하게 넘나드는 말투는 그의 심기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보여 주는 듯했다. 가윤도 지지 않고 날 세워 맞섰다.

“결혼 생각이 없으면 없다고 말해요. 여러 사람 곤란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소립니까. 진행해야지.”

“뭐라구요?”

가윤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해준은 덤덤히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물론 본인이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도 좋아요. 상대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윤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게 데면데면하던 태도는 오히려 신사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원하는 게 뭐예요?”

“당신한테 원하는 거 없어.”

원하는 게 없다는 말은 가윤이 무슨 짓을 해도 그의 계획은 틀어지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해준은 기어코 아버지와 방송사를 곤란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치를 떨던 가윤은 해준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유해준 씨 참 무섭네요.”

“정가윤 씨. 만약 결혼을 해도 내가 당신에게 호의적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아.”

“그럼 결혼을 왜 해요?”

달콤하고 로맨틱한 결혼을 바라진 않았지만 이런 식의 푸대접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가윤의 질문에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겨 입으며 대답했다.

“필요하니까.”

가윤은 그 모습에 이를 갈았다.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모든 사단이 그 보잘것없는 계집애 때문이라는 게 기가 막혔다.

“필요하니까…….”

가윤이 해준의 대답을 똑같이 중얼거렸다. 자신도 ‘그’와의 결혼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힘과 훌륭한 남편, 그리고 이 굴욕에 대한 복수를 모두 얻을 수 있는 선택이었다. 같잖은 계집애와 꼿꼿한 그 사이를 비집고 결국 들어앉는 것은 자신이 될 테니까. 그녀는 기어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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