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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윤은 퇴근 시간쯤 로비에서 재이를 기다렸다. 재이는 동기들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내려왔다. 멀리서부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재이가 작은 몸을 이끌고 비척비척 걸어왔다.

가윤은 문득 해준이 그녀에게 부성애를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재이는 멀리서 가윤을 보고 멈추어 섰다. 가윤은 재이에게 다가가 작게 말했다.

“오늘 고마워요.”

“뭐가요?”

재이는 지치고, 날카로워 보였다. 마지막 남은 기력을 끌어모아 경계심을 발휘하는 어리고 사나운 살쾡이 같았다. 가윤이 주위를 둘러보고 작게 말했다.

“아까 합의해 준 거요. 해준 씨 생각해서 해 준 일이란 건 알지만, 쉽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가윤은 마냥 고맙지만도 않았다. 절대로 해 줄 것 같지 않던 재이가 해준이라는 말에 곧장 반응하는 모습에서 둘 사이의 각별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치하고 그리 좋은 타이밍이 아닌 걸 알지만 선을 긋고 싶었다. 그 남자, 더 이상 네 거 아니야.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남매끼리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잘 알겠더라구요.”

“과장님.”

슬슬 재이의 인내심이 동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데, 약혼식에 와 줄 거죠?”

“네?”

“예상보다 좀 앞당기기로 했어요.”

재이의 말문이 막혔다. 머리를 크게 맞은 듯 얼얼했다. 결혼 계속 진행하는 거였어?

“…….”

자신이 죽니 사니 했을 때 해준은 분명히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했다. 그 말을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넘겨짚은 게 실책이었다.

“해준 씨 성격에 자세히 설명해 줄 거 같지도 않고. 이제 우리 가족이 될 사이니까 나라도 미리 말해 줘야 할 거 같아서.”

가윤이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약혼이라니. 둘이 결혼을 약속하게 되다니. 여태 결국에는 하지 않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결혼에 대한 실감이 들었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같이 아팠다.

가윤과 가족이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자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 없었다. 재이에게 가족은 해준과 본인 단둘뿐이었다.

“재이 씨?”

재이는 가윤의 반반한 얼굴을 바라보다 귀신이라도 본 듯 황망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 ♟ *

재이는 해준이 마련해 준 곳이 아닌 원래 함께 살던 아파트로 갔다. 아파트 문 앞에서 도어락을 누르지 않고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를 기다린 지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두 시간 반쯤이 되었을 때 해준이 걸어왔다. 평소보단 빨랐지만 늦은 밤이었다.

“안재이. 왜 여기 서 있어.”

해준은 멀리서 재이를 발견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놀란 눈치였다. 빠르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 후 현관문을 열어젖힌 채 말했다.

“들어가자.”

“…….”

하지만 재이는 묵묵히 옆에 선 그대로 버텼다. 그녀는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오기와 자존심 같은 거였다. 해준은 말도 없이 거처를 마련해 그녀를 보내 버리듯 했다. 의도와 이유를 떠나 재이가 느낀 감정은 쫓겨남이었다. 그런 꼴을 당하고 제 발로 도로 기어들고 싶지 않았다.

“안재이.”

“안 들어가요.”

재이의 단호한 목소리에 해준은 한숨 대신 잠시 먼 곳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라고 하며 두고 들어갔을 테지만 도저히 재이를 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오늘 언제 출근했어.”

사뭇 냉정한 척 물어도 오늘따라 핏기 없어 보이는 새하얀 얼굴에 그의 애가 탔다.

“아까 점심시간쯤이요.”

“왜?”

“……인턴 과정 중이니까요. 그래서 출근한 거예요. 끝을 내야죠.”

재이는 거짓으로 대답했다. 정가윤에게 속았다고 이야기하기도 싫었고 당신 생각에 병신 같은 합의를 등 떠밀리듯 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안재이. 넌 그런 곳에 출근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어.”

“아니요. 전 해야 해요.”

“굳이 그럴 이유가 있다고?”

“일이니까요.”

“안재이.”

해준은 가슴에 벽돌을 얹은 듯 갑갑해졌다. 원체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일에 파묻혀 사는 걸 보고 배워서 그런 걸까. 재이의 미련한 선택마저도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떻게 하려고.”

“……사회생활 하면서 나만 당한 것도 아니구요.”

“걱정 마. 내가 처리할 테니까. 일단 거기서 나와서.”

그때였다.

“약혼해요?”

재이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준은 내심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게 되었는지 황당했지만 잠시 뜸 들이다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래.”

누구에게 어떻게 들었는지 몰라도 재이는 자신이 약혼 사실을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떻게 변명하고 설명해도 재이에겐 와닿지 않을 것이다. 해준은 말을 아꼈다.

“……,”

둘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고, 재이는 고개를 숙여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참담한 심정인 듯했다. 해준 역시 그런 모습을 보며 죄스러움에 시달렸다. 그런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모두 집어치우겠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논리적이지만 재이가 그런 일을 당한 게 모두 자신의 탓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완성되지 못하여 생긴 일이라 여겨졌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재이를 아끼는 걸 모두 알아 아무도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과 힘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재이를 바라보았다. 재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왜 하는데요?”

그는 자신의 의지를 단출한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게 내 일이니까.”

자신이 했던 말이 차가운 대답으로 돌아오자 재이가 바들바들 떨었다. 설움과 화에 감정이 복받쳐 보였다. 재이가 애써 울음을 삼키고는 쌕쌕 숨을 고르며 물었다.

“내 원래 일은 뭔지 알아요?”

“…….”

“유해준을 사랑하는 거예요.”

재이는 자신이 어깃장을 놓는 게 불가능하다면 보란 듯이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면 자신의 마음을 낱낱이 드러내어 그의 선택에 걸림돌 같은 게 되기로 결심했다.

해준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재이는 더 이상 그에게 만져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재이는 선뜻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자신의 볼을 마구잡이로 비볐다. 화장이 묻어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준은 손을 빼지도, 자처해 달래 주지도 않았다.

“재이야.”

“두고 봐요. 절대로 나 두고 결혼 못 할 거니까.”

재이가 그의 손을 놓고 다시 뒤돌아 아파트를 떠났다.

* * *

[정우환 국장, 영진 건설 게이트 연루 의혹…….]

[BMD 정우환 국장, 블랙리스트 작성 핵심 인물?]

[영진 건설 게이트, 방송사 간부가 핵심 키 맨?]

며칠 뒤, 아침 일찍 방송사가 발칵 뒤집힐 만한 기사가 터졌다. 국장과 가윤은 출근하지 않았고 부장은 이른 시각 연락을 받고 회사로 쫓아와 관련 자료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부장은 ‘방송사 간부’로 뭉뚱그려져 있었으나 이미 사내에서도 국장과의 각별한 사이는 유명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낭패감은 더욱 강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재이는 평소보다 붐비는 대중교통에 시달려 겨우 지각을 면했다. 정신은 혼비백산하고, 온몸에 진이 빠진 채로 출근했다.

“야, 인턴!”

그리고 그녀가 사무실 문턱을 넘는 순간 벼락같은 고함이 떨어졌다.

“그래, 너 안재이, 너 이리 와!”

김 부장이 넥타이가 엉망이 된 채로 자신의 자리에서 삿대질을 하다 성큼성큼 걸어왔다. 재이는 눈이 휘둥그레 커진 채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이야, 대단해. 어? 너 인생이 쉽지?”

부장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류 뭉치로 재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놀란 재이가 뒷걸음질 쳤다. 부장은 계속해서 재이를 몰아세웠다.

“미국 가서 팽팽 놀다가 낙하산 타고 공으로 들어오고. 인생 살 만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뭐, 몰라? 몰라!”

부장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화가 난 상태였다. 김 부장은 해준이 터트린 기사임을 아는 상태였고, 이 모든 게 재이의 부탁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여겼다.

덩달아 놀란 직원들이 뒤늦게 김 부장을 뜯어말렸지만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소리쳤다.

“너 말이야! 발랑 까져서 낙하산 타고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어. 상사가 말해도 얌체같이 고개는 뻣뻣해 가지고!”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 같은 애들이야말로 사회악인 거야!”

김 부장은 재이의 평판을 추락시킬 기세로 거세게 욕했다. 낙하산이라니. 말도 안 되는 모함에 당황한 재이가 버벅였다. 온 사내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인턴 동기들의 따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재이는 몹시 억울했다. 해준은 오히려 취업 준비를 하는 자신을 말려 왔다. 게다가 도와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재이 자신도 떳떳하게 사회인이 되려 갖은 노력을 이어 왔고, 인턴 합격은 취업난에 어렵게 얻은 결과물이었다.

“여기 애들 다 열심히 사는 애들이야. 너같이 편하게 들어온 줄 알아? 어!”

“저기요 김 부장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안재이 씨.”

그때 뒤에서 낯설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격양된 분위기 속에 겉도는 차분한 음성은 오히려 튀게 느껴졌다. 재이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인사부에서 봤던 직원이었다.

“예?”

“잠깐 나와 보시겠어요.”

절묘한 타이밍에 인사부 직원을 보자마자 직원들은 모두 ‘재이에게 뭐가 있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턴 동기들은 재이를 적폐처럼 취급하며 힐끗거렸다. 재이는 억울함을 안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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