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24/70)

24

가윤의 덫에 보기 좋게 걸려든 재이는 ‘자신의 차를 타고 회사로 가자.’는 말에 물러설 수 없었다. 해준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될지 물어보는 게 더 확실하고 좋은 결과를 보장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빠한테 물어보는 딸도 아니고, 그건 어른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얕보이지 않으려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미묘한 신경전과 자존심 사이에서 재이는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잘 생각했어요. 일단 출근은 해야지.”

가윤은 짤막하게 말한 뒤 재이를 태우고 회사로 갔다. 이대로 사무실로 갈 줄 알았으나 가윤은 재이를 국장실로 데려갔다.

“잠깐 올라가죠. 처리할 것도 있으니까.”

“아. 네.”

카페에서만 해도 나름대로 괜찮았던 재이는 회사로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적에게 홈구장을 내어 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당연하게도 회사 문턱을 넘자마자 가윤은 과장이 되었고 재이는 사원도 아닌 일개 인턴이 되었다. 지나가는 직원이 가윤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가윤에게 인사한 직원의 사원증에는 김윤지 대리라고 써 있었다. ‘대리’. 재이는 엉겁결에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 숙이고 인사했다.

“어, 오랜만이네? 저번에 취재 잘 끝났어요?”

“아. 거기 현장은 징글징글해요, 이제. 사람이 어떻게 항상 많은지.”

가윤은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면서도 재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재이는 뒤에서 얌전히 가윤을 기다려야 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재이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나를 이렇게 세워 놓을 사정이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켰다. 어른스럽게 굴어야 하며 최대한 인턴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가윤은 잡담을 마치고 국장실 문을 열며 넌지시 말했다.

“들어가자마자 인사부터 해요. 최대한 깍듯하게”

인사라니. 재이가 눈을 크게 뜨며 가윤을 바라봤지만 이미 문이 열렸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재이는 문틈으로 보이는 유 회장을 보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앉아라.”

유 회장과 재이가 공중에서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재이를 보며 유 회장은 역시 마땅히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며 혀를 찼다. 유 회장과 재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정 국장이 일어나 재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재이 인턴.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나는 정우환 국장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재이는 당황하여 얼결에 악수까지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가윤의 덫에 보기 속수무책으로 걸려든 걸 깨달았다. 국장은 재이의 안색을 살피며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서두를 꺼냈다.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보고 받았네. 많이 상심했겠어.”

“…….”

재이는 빈말로라도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정 국장은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부에서도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분위기가 껄끄러워지자 유 회장이 직접 나서 말을 가로챘다.

“내가 이야기하겠네.”

이미 재이의 신경은 온통 유 회장에게 쏠린 채였다. 재이는 시선을 자신의 무릎께에 고정한 채 가만히 유 회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 일어났으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다. 내부에서도 응당 조치를 취한다고 하니 적당히 합의하거라.”

유 회장은 그 말을 하고서 유리 탁자 위로 서류를 재이에게 밀었다. 합의서였다. 재이는 참담한 심정으로 내용을 읽어 보았다. 사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비밀 유지를 하겠다는 서약서와 다를 바 없었다.

“회장님.”

내용을 읽으며 재이가 울컥하는 마음에 회장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재이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도 해준이를 생각해라.”

‘해준’. 그 두 글자에 재이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자신이 지금 해준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사색이 된 재이의 얼굴을 보며 유 회장이 몰아갔다.

“너만 좋게 넘어가면 해준이도 어쩔 수 없을 거다. 너도 알겠지만 혼사가 오고 가는 집안이야. 뭐라고 한 건지 몰라도 해준이 나름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

“분란 일으켜 봤자 해준이에게 악영향을 끼칠 거다. 그런 일이 있었다간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셈이냐.”

유 회장이 마른 입을 달싹이며 나직하게 말했지만 고함보다 더한 힘이 있었다. 재이는 손이 떨리는 걸 감추려고 주먹을 쥐었다.

유 회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한 짓은 재이도 잘 알았다. 미우나 고우나 아무리 눈 밖에 났다고 해도 아들을 내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잔인함에는 물러섬과 예외가 없었다.

“……펜 주세요.”

잠시 고민한 재이는 이를 악물고 첫 마디를 뗐다. 오로지 해준의 안전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밖에서나 안에서나 오빠, 오빠 거리지 마라. 누가 보면 남매인 줄 오해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재이만 꾀어 사인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기에 그때부터는 모든 일이 정신없이 마무리되었다. 유 회장은 국장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배려해 주었다. 재이는 말없이 자리를 지키다 돌아왔다.

재이는 멍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복귀했다. 해준의 얼굴과 자신이 서명했던 서류가 번갈아 떠올랐다. 현명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순식간에 아주 중요한 결정을 했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좀처럼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사무실의 분위기는 묘하게 붕 떠 있었다. 직원들은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착각이겠지. 재이가 애써 찜찜한 기분을 넘기며 탕비실로 들어갔다. 텀블러에 정수기 물을 받는 중이었다.

“저기…… 너 괜찮아?”

“어?”

누가 조심스레 어깨를 치는 느낌에 재이가 뒤를 돌아봤다.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얼굴이 낯익은 동기 인턴이었다.

재이가 반사적으로 물었으나 동기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우려스러움과 궁금함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둘 사이에서 묘한 침묵이 흘렀다.

“…….”

설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벌써 다 알게 된 걸까. 성추행이 일어났던 회식 테이블에는 인턴이 없었다. 재이는 불길한 느낌에 애써 침착하며 질문했다.

“뭐가?”

“아, 아냐.”

동기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지 말을 얼버무리며 서둘러 탕비실을 떠났다. 재이는 이로써 회사 전체에 소문이 났음을 깨달았다. 영영 숨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회적 체면이 가루가 되는 기분이었다. 거대한 수치심이 재이를 휩쓸었다.

재이가 자리에 돌아가자 곧 문제의 부장이 그녀를 불렀다.

“안재이 씨. 어제는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던 거 같네. 내가 술김에 조금 다그치듯 말한 거 같아.”

그는 미리 국장실에서 약속한 대로 ‘별일 없었다는 듯’ 사과했고, 재이는 그걸 받아 주어야 했다.

“……아, 아닙니다.”

“그래. 너그럽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늙으니까 술이 잘 안 받아서 말이야.”

직원들의 힐끔거림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재이는 더 이상 속에 없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자리로 복귀해야 했다.

* * *

재이가 말없이 출근했다는 보고를 받고 해준은 기분이 몹시 언짢은 상태였다. 권 비서가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재이는 답장도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돌발 행동을 했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이미 방송국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회사란 그런 곳이니까.

재이가 또다시 겪을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을 떠올리면 해준은 업무를 처리하다가도 주먹이 쥐어졌다. 그런 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해준이 권 비서 앞에서 서류를 결재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정가윤을 만나야겠어.”

“조금만 기다려 주시는 건 어떨까요.”

“기다릴 이유가 없어.”

“재이 씨가 굳이 출근을 강행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재이의 일이라면 일단 행동부터 나가는 해준을 가라앉히는 건 권 비서의 몫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결정이 쉽지 않은 만큼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 같습니다. 일단 퇴근까지 기다려 보시는 게 재이 씨와 대화를 시도하는 데도 수월할 것 같아서요.”

해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가 바라는 건 재이가 세상의 풍파를 영영 모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다. 남들은 겪어야 하지만 본인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걸 왜 자처하는 건지. 아직도 자신이 부족한 탓인 거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유 회장님 들어가십니다.]

그때 예고 없이 인터폰이 울렸다. 유 회장이 행차했다는 말에 권 비서가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깍듯하게 인사했다. 해준은 덤덤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라. 나는 여기 앉으련다.”

유 회장이 사무실 안 소파에 풀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해준은 유 회장이 재이의 일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걸 알아챘지만 모르쇠로 물었다.

“어떤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알면서 물어 뭐 하냐. 준비하고 있는 거 그만둬라.”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더지처럼 정 국장 파 대는 거 그만두라고 했다.”

유 회장이 경고했다. 기자, 법조, 정치, 경찰…… 온갖 필요한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으니 소문이 그만큼 빠르게 퍼질 수밖에. 해준이 눈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대꾸했다.

“제가 알아서 판단하겠습니다.”

“일을 키워 봤자 그 계집애한테도 좋을 게 없어.”

“재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잘못하면 벌 받아야죠.”

남자 둘 사이에 금세 스파크가 튀었다.

“벌은 법이 주겠지.”

“여전히 법보다 빠른 게 많죠.”

“미친 게로구나.”

강경한 해준의 모습에 유 회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해준도 알았다. 자신이 표면적으로나마 재이의 일에 우유부단하게 군다면 이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준은 재이의 일이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유 회장은 해준의 반응을 이미 예상한지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만 다른 생각이 있었기에 굳이 더 실랑이하지 않았을 뿐이다. 유 회장은 두 번째 용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약혼식은 다음 달로 잡았다.”

“…….”

“넌 똑똑하니 사리 분별이 그다지 어렵진 않겠지.”

유 회장은 손주를 잘 알면서도 끝끝내 기대를 저버리기가 어려웠다. 다음 달에 약혼식을 진행할 집안을 정조준하여 겨눌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해준은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기사 나갈 겁니다.”

유 회장이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한번 해 보자는 거냐?”

해준이 속을 선뜻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그냥 그게 제 할 일입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