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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자신은 이 나이를 먹고도 그의 앞에 서면 응석을 부리게 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의 품이 너무나 편안했다. 해준의 앞에서 멋지게,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아이처럼 모든 걸 의지하고 싶기도 했다.

“괜찮아.”

해준은 재이를 안심시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동시에 팔을 뻗어 자신의 앞에 선 재이의 볼을 감쌌다. 재이가 벅찬 감정에 흘린 눈물이 그의 손에 툭 떨어졌다. 내리깐 재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재이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전처럼 돌아간 듯한 이 순간을 일분일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울음으로 볼이 붉게 달아오른 그녀가 쌕쌕 헐떡였다. 재이는 그대로 그의 품에 파고들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말 대신 행동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안아 주세요.”

포옹은 그가 가끔 해 주는 특별한 스킨십이었지만 이번엔 내가 안길 테니 품을 내어 달라는 통보였다. 해준을 욕심내고 있다. 재이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게 긴장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모호했다.

재이는 어느새 울음기가 사라진 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청량한 풀내와 우드향이 적절히 섞인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이 또한 재이가 골라 준 것이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숨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재이의 욕심이 식물에 물을 주듯 점점 솟아났다. 그의 온기와 셔츠 너머에 탄탄한 근육, 가슴팍의 살내가 느껴지자 입이 말랐다.

그는 자신을 초조하게 만든다. 그와 몸이 닿자마자 주체할 수 없는 두근거림에 재이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키스하고 싶었다.

“오빠.”

“…….”

“나…….”

하지만 말을 줄였다.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난 어떻냐고요! 나 사랑해요?”

“그래. 가족으로서 사랑해.”

재이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천하의 유해준이 그렇게 두려울 정도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런 옅은 희망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재이가 그를 끌어안은 팔을 고쳐 안으며 중얼거렸다.

“나 없이 살 수 있어요?”

재이는 그런 생각과 바람을 극단적인 질문으로 숨겼다. 해준은 대답 대신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해준은 재이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했고 유례없이 다정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최대한 스킨십을 자제하고 재이의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손써 주는 것에서 자신을 절제해 왔다.

재이를 오롯이 책임지고 자신의 태도를 지키고 싶었다. 둘이 끝까지 가 보았자 연애일 뿐이다. 사랑, 그 달콤하고 끈적한 건 사실 1그램도 되지 않는 호르몬의 농간에 지나지 않았고, 연인이란 건 돌아서면 하루아침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곤 했으니까.

해준은 깊은 관계에 대해 염세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믿는 건 상황과 결과물이었다. 운명은 자신에게 한 번도 호락호락한 적이 없었다. 마음을 주면 떠나고, 가졌다 하면 뺏어 가기 일쑤였다. 자신에게 관대했던 아버지가 그랬고, 재이네 가족이 그랬다.

그는 재이에게 지속 가능한 상황과 꾸준한 지원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널 사랑하니 없으면 안 되니 하며 감언이설로 탐하다 변심했다며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신뢰하지 않았기에 굳이 시험에 들길 자처하며 흔들리기 싫었다. 그 정도로 불면 꺼질까, 만지면 터질까 곱게 키워 온 귀한 아이였다.

“만져 주세요.”

재이가 응석을 부리고 울 때마다 그는 안아 주고 싶었고 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손에 재이의 뜨겁고 축축한 볼이 닿았다. 그는 엄지로 재이의 볼을 연신 쓸어 주며 위로했다.

“안아 주세요.”

재이의 말에 해준은 잠시 고민했다. 어느새 눈물이 그친 재이는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거 같기도 했다. 작은 아이 때부터 지켜본 재이가 자신의 품을 원하는데 못 내어 줄 이유가 없었다. 마음만큼은 그랬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제해야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갈무리 지어야 했다. 그게 자신의 위치였고, 여태까지 해 왔던 것이었다.

“…….”

그러나 이번에 재이는 자신의 말보다 빨랐다. 그가 허락하기도 전에 자신의 품에 들어왔다. 그의 품에 반밖에 안 될 것 같은 작은 몸이 들어왔다. 볼에서 느껴졌던 온기가 재이의 몸에서 느껴졌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밀어 내려면 밀어 낼 수 있었지만 그의 손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재이를 괴롭게 한다는 죄책감과 회의감. 그게 철옹성 같은 해준의 마음에 흠집을 내어 틈을 만들었다. 재이는 자연스레 그 틈에 스며들어 갔다.

“나 없이 살 수 있어요?”

너 없이 살 수 있냐고. 그는 생각했다, 네가 없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해준은 차마 재이를 밀어 내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재이는 자신을 놓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부둥켜안고서 한참을 있었다.

매사에 평정을 유지하려는 해준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해준은 애써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며 감정의 요동을 경계했다.

* * *

재이는 머리를 식히라는 해준의 조언에 따라 근처 카페로 가서 테라스에 앉았다. 바깥바람을 맞지 않으면 자꾸만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를 거 같았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온 재이는 조금 고민하다 메일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권 비서가 보낸 새 메일이 도착한 상태였다. 해준이 느지막이 출근하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일을 계속하고 싶어?”

“그래도 해야죠.”

“정 하고 싶으면 우리 회사로 넘어와. 곧 인턴도 뽑을 거니까 끝나고 정규직 전환되면 자연스럽잖아.”

“대원이요?”

재이는 우물쭈물하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일부러 특혜를 받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해 왔던 건데. 넥타이를 매던 해준이 거울 속 재이를 바라보자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경험이 필요하면 검증된 곳에서 해. 권 비서한테 서류 양식 보내라고 할게.”

“아, 네.”

‘검증된 곳’. 다시 말하면 해준의 품이자 ‘안전한 곳’일 수 있다. 그는 아마 자신이 없는 곳이라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대원이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선뜻 내키는 제안도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 하지만 성추행까지 당해서 난리가 난 마당에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떡한담.”

재이가 심란하게 중얼거리며 메일을 확인했다. 여전히 대원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적었지만 어찌 되었든 취직은 해야 하니 또 다른 인턴 과정을 찾아야 하겠지. 게다가 회사에서도 전화가 더 이상 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가 턱을 괴고 싱숭생숭하게 서류 양식을 살필 때였다.

“그래서 공채가 언제 뜬다는 거지.”

서류를 확인하다 궁금한 것이 생겨 권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재이는 답장을 기다리며 서류 양식을 채우던 중이었다.

♪♬

잠시 후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재이가 무심결에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재이 씨. 나 정가윤이에요. 전화 좀 받아 주세요.]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요? 간곡히 부탁할게요.]

재이는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을 국장실로 불러내어 거드름 피울 때는 언제고 바싹 엎드려 비는 모습이라니. 해준과 함께 밥을 먹을 때도 고개가 빳빳하던 도회적인 그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간곡히 부탁할게요. 간절해 보이는 태도에 재이의 마음이 쉽게도 흔들렸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승리감과 함께 여유가 새어 나왔다. 무슨 이야기 하는지 들어나 볼까.

재이는 조금 더 고민하다 가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있는 곳을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가겠다던 가윤은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로 찾아왔다.

“만나 줘서 고마워요.”

“……아, 네.”

재이는 가윤이 제 맞은편에 앉았을 때만 해도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다니. 게다가 이렇게까지 금방 올 줄 몰랐다.

“…….”

“…….”

막상 만났지만 둘 사이에 껄끄러운 침묵이 흘렀다. 가윤이 목소리를 다듬으며 서두를 꺼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 부분은 내가 사과할게요.”

“네.”

재이는 그녀의 말에 대답했으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부장이 우악스레 움켜쥐던 그 손의 힘이 다시 생생히 떠오르는 듯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겪었던 거대한 치욕감과 모욕감이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몇 가지 글자로 간단히 끝낼 수 있다는 게 몹시 불쾌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 왔어요.”

“무슨 이야기요?”

“일단은 출근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뭐, 사적으로 삼자대면을 하고 싶진 않아 하는 거 같으니까.”

“…….”

재이는 뭔가 상황이 자신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윤은 자신의 상상과 달리 그다지 미안해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무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해준 때문이라도 납작 엎드릴 줄 알았던 자신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리고 재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런 것이었기에 갈피를 잃은 것처럼 당황했다.

“기왕 어렵게 붙은 인턴 과정인 만큼 굳이 그만둘 이유도 없는 거고. 잘 마무리 하는 게 어떨지 해서.”

“…….”

재이는 당황했다. 가윤이 꺼낸 말은 너무나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오빠가 나가지 말래요.’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출근은 출근이고. 일은 일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죠? 우리 어른이니까요.”

어른. 그 단어가 재이를 자극했다. 그녀가 일부러 자신을 자극했고, 가윤이 제 생각대로 행동할 여지가 없는 걸 알았지만 짜증이 솟구쳤다.

“어른이고말고. 전 떳떳하니까요. 안 나갈 이유가 없죠.”

일부러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 척 교묘하게 대답했으나 가윤은 그마저도 파악한 듯 의미심장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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