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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국장실에서 가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손톱을 짓씹었다. 누가 봐도 수심이 가득한 안색이었다. 한참 고민에 쌓여 있는 그녀를 보고 보도 국장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윤아.”
초조함에 휩싸여 있던 가윤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면서도 원망의 말이 터져 나왔다.
“제가 김 부장님은 그 망할 주사 때문에 안 된다고 했잖아요……!”
하필 건드려도 안재이를 건드리다니. 신경질적으로 울먹이는 가윤을 보며 보도 국장이 그녀를 위로했다.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쩌겠냐.”
어딘지 모르게 수수방관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직접 나설 의향이 없어 보이는 말에 가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힘주어 말했다.
“어쩌라니요. 아빠, 이건 지금 현재 진행형이라고요.”
상기된 가윤을 빤히 바라보던 보도 국장이 물었다.
“뭘 원하는 거냐. 어떻게 하면 좋겠어.”
“예? 당연히 잘라야죠. 그런 인간을 회사에 두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그렇게는 어렵다.”
“아빠!”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가 황당함이 지나쳐 따지듯 부친을 불렀지만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는 안 돼. 내부 징계로 갈무리할 거니까 너도 적당히 해.”
보도 국장은 외부 일정이 있는지 사무실에서 재킷과 소지품을 챙겼다. 가윤은 황망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차 싶어 따졌다.
“그럼 결혼은요? 결혼 엎어져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여기서 결혼이 왜 나오냐.”
“자기 동생 성추행한 새끼가 버젓이 회사 다닌다고 하면 가만히 있겠어요?”
그녀의 말에 보도 국장이 가방을 들고 우뚝 서서 말했다.
“엄연히 말하면 동생이 아니라 남이지.”
“…….”
“가윤아. 네가 그 어린애랑 결혼을 하는 거냐?”
가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정이 격양되며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아버지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는 더 강하게 짚이는 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버지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가윤의 가슴팍이 들썩이며 씩씩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녀가 물었다.
“……아파트 투자금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뭐?”
“김 부장이 다리 놔 준 사업 투자금이요. 그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냐구요.”
김 부장은 아버지의 사내 인맥 라인 중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사내에서는 주요 결정권에 힘을 실어 주었고 외부의 여러 사업과도 긴밀히 관련 있었다.
김 부장이 술과 관련한 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아버지가 눈감아 주고 넘어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도 국장이 덮어 주면 김 부장이 밀어준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둘은 명백한 공생 관계였다. 여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슨 이유든 쫓아내진 못한다. 둘이 좋아서 하는 결혼이지 너 팔아 가며 비굴하게 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어.”
부친의 말에 가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에겐 김 부장은 유해준과 견줄 수 있을 만큼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불확실한 ‘결혼’이라는 확률에 자신의 패를 걸고 싶지 않을 수 있다.
“난 간절하다구요. 아빠, 나 유해준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하지만 가윤의 입장은 달랐다. 아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자신은 유명 인사도 가기 어렵다는 유 회장의 생일잔치에도 다녀왔다. 유 회장의 마음에 든다면 다 된 거나 마찬가지인 결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부친의 반응은 해준이 재이에게 얼마나 열성적인지 몰라서 가능한 반응이었다.
“안 된다고 했다. 돌아가라.”
“아빠!”
“시답잖은 일로 툴툴거릴 거면 돌아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결혼이면 네가 직접 해결해.”
결국 부친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가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부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국장실을 나갔다.
“하…….”
가윤이 숨 막힐 듯한 표정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 *
해준은 권 비서를 재이에게 마련해 준 집으로 불렀다. 재이는 침실에서 자고 있는 중이었다. 해준이 식탁에서 보고를 받으며 펼쳐 놓은 서류를 뒤적였다.
“김재구 부장이라.”
그가 중얼거렸다. 권 비서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국장 라인인데 돈으로도 여기저기 얽혀 있고 개인적으로도 친한 모양입니다. 김재구 부장 외가가 사업을 해서 돈이 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시장이나 도지사 쪽과도 커넥션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원 정보는 못 주겠다고 한 거고. 내부에서 어떻게 처리할지 말 나온 거 있나?”
“아직은 특별히 없다고 합니다.”
“재미있네.”
해준이 표정 변화 없이 중얼거렸다. 권 비서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일단은 지켜보심이.”
하지만 해준은 전혀 그럴 의향이 없었다. 지켜보고, 그냥 넘어가고 이런 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재이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지만 ‘그 애를 위해서라도’라는 만류를 들어 참아 왔다. 자신은 재이의 일이라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울 때가 있었으니 그게 현명한 거라고 생각했다. 재이가 힘들게 인턴 과정을 밟는 것도 마땅찮은 판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까지 일어났다. 해준이 평정을 유지할 리가 만무했다. 그는 비서의 말은 곧장 흘려들은 채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기자들 좀 매수해 봐.”
“예?”
“그리고 이 성남 시장이랑 같이 들어간 투자 건. 이거 좀 파 봐.”
“본부장님.”
국장의 뒤를 캐 보라는 말이었다. 그걸로 뭘 할 건지는 몰라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도 자체가 위험을 동반한 일이었다. 우려하는 비서의 목소리에도 해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괜찮아. 진행시켜. 그리고 자료 오면 나한테 올리고, 정가윤 앞으로 퀵 쏴서 보내 줘.”
방송사가 날고 기어도 대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 광고를 대는 큰손은 결국 대원이었으니까. 많은 인맥과 모델들이 대원을 의식했다. 나라의 경제 지표에 큰 영향을 주며 정부마저도 무시할 수 없는 곳이 대원 그룹이었다.
해준이 할 수 있는 나쁜 짓이란 무궁무진했다. 한탕 인생을 즐길 수도 있었고, 남에게 해코지하기도 쉬웠으며 범법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단지 안 하고 살았을 뿐. 상사를 걱정한 권 비서의 안색이 흐려졌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정말 보낼까요?”
“보내.”
“네. 알겠습니다.”
결국 무거운 대답이 돌아오는 걸 듣고서야 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 돌아가란 듯 손짓했다. 권 비서가 자신의 짐을 챙기곤 해준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려는 참이었다. 뒤에서 달칵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남자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쏠렸다.
“저기.”
방에서 나온 재이가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는지 어정쩡하게 선 채로 입을 뗐다. 안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씻고 옷까지 말끔히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권 비서는 재이를 보며 꾸벅 인사했고 해준이 대신 설명했다.
“이야기 다 끝났어. 권 비서님 금방 가 보실 거야.”
그 말에 재이가 조심스럽게 비서에게 물었다.
“아아. 혹시 그러시면. 저 좀 태워 주실 수 있을까요.”
“어디로?”
권 비서 대신 해준이 되물었다. 재이가 해준과 권 비서를 번갈아 보며 작게 대답했다.
“……회사 가려구요.”
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재이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비서에게 이 집을 떠나기를 지시했다.
“일단 들어가 봐.”
“네. 알겠습니다.”
권 비서는 깍듯하게 인사한 채 집을 나갔다. 냉랭한 분위기와 해준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이는 그가 무언갈 알아냈음을 눈치챘다.
해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가끔은 자신을 어디 멀리서 보고 있는 걸까 생각이 들 정도로 모르는 게 없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도 그랬다. 자신이 억울한 일을 겪거나 괴롭힘을 당하고 오면 어김없이 눈치채서 해결해 주곤 했다. 가끔은 자신의 얼굴색만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측하기도 했다.
그래서 재이는 해준의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다. 현명한 반응이 아닌 건 알지만 그의 말에 마치 해준과 자신 둘밖에 없이 견고했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외부의 압력이나 제삼자의 개입 없이 문제가 생기면 오롯이 둘이서 극복하며 애틋했던 날들.
기쁜 일이 생겨도, 나쁜 일이 생겨도 서로가 1등으로 떠오르고 미래에도 둘뿐이라 여겼던 날들.
“네가 거길 왜 가.”
“회사에서도 계속 연락 오구요. 가서 마무리라도 지으려면.”
“가지 마.”
“그래도, 이건 회사잖아요.”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생각 때문에 재이는 강하게 주장을 펼칠 수 없었다. 반면 해준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은 그렇지. 다들 아쉬운 처지니까.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아도 돼.”
“……그래도 가기는 가야 할 거 같아요. 일이잖아요.”
재이가 자신의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넣으며 대답했다. 유치하게도 재이가 무리하는 이유는 순전히 가윤 때문이었다.
“아…… 보기보다 그런 스타일인가 봐요?”
“막 그렇게 개척하는 편은 아닌가 봐. 하긴, 품 안에 있을 때가 편하긴 하죠.”
자신을 덜 자란 애 취급하며 경쟁자로 여기지조차 않는 그 여자에게 보란 듯이 출근하고 싶었다. 나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애 아니라고. 그녀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다.
“가지 마. 해결 중이니까.”
해준이 재이의 모습을 보며 더욱 힘주어 말했다. 보기 드문 강경한 모습에 재이도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오빠…….”
“날 믿어.”
해준의 눈빛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다정함이 넘치고 살갑게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심상찮음이 일렁였다. 재이는 흠칫 놀라는 동시에 그가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왔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어리석게 만들었다. 기꺼이 그에게 기대고 싶게 했다.
“……알겠어요.”
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은 그녀를 빤히 보다 나직하게 불렀다.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이리 와.”
그의 깊은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재이는 몽글몽글하게 풀어지는 마음에 제풀에 울컥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맨발로 그에게 비척비척 다가갔다. 둘 사이에는 대리석 바닥을 걷는 소리만이 들렸다.
“만져 주세요.”
재이가 울먹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