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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했다. 사실 잘 수 있는 여유는 몇 시간이라도 있었지만 재이와의 다툼을 떠올리면 도저히 잘 수 없었다.

결국 새벽 내내 밤을 지새운 그는 해가 뜨자마자 짐을 챙겨 회사에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해준 나름대로의 극복법이었다. 일에 파묻히다 보면 당장 내가 무엇에 화를 냈는지, 무엇에 슬펐는지, 울었는지 잊혔기 때문이다.

[해준 씨 오늘 잠깐 시간 될까요? 간절하게 빌게요.]

아침 일찍, 가윤에게 메시지가 왔다. 어제 멀쩡하게 들어갔을 텐데 갑자기 왜 보자고 하는 거지, 게다가 메시지의 뉘앙스에는 무언가 일이 생긴 눈치였다.

결국 해준은 오전 중 회사 근처 브런치 집에서 가윤을 만나기로 했다. 장소에 도착하고 가윤을 발견한 그가 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 앉았다.

“한 10분 정도 시간 있습니다.”

“아 예. 나와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가윤은 묘하게 피부가 푸석했고 초조해 보였다. 과도할 정도로 깍듯한 태도도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해준이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하는 중이었다.

“아니요, 됐습니다. 용건이 뭔가요.”

“저도 오늘 오전에야 이야길 들어서…….”

“…….”

가윤은 재이가 해준과 워낙 막역한 사이라 당연히 어제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거라 예상했다. 하필 사고 쳐도 유해준의 동생을 상대로 하다니. 아버지 역시 소식을 듣는 내내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제가 가서 말 잘하고 올게요.”

가윤은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안심시키며 나왔다. 해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먼저 자신과 아버지가 사과하길 기다리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재이 씨가 정말 크게 상심한 거 알고 있어요. 저희 내부에서도 지금 징계 절차를 밟고 있지만 최대한.”

가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재이’라는 말이 해준의 신경을 붙잡았다. 그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재이가 뭐요.”

“네? 재이 씨가 어제 회식 중에. 아.”

설마 모르는 건가. 가윤이 뒤늦게 든 생각에 말꼬리를 잘랐으나 소용없었다. 자신에게 적당히 하라고 했던 그때처럼 해준은 서늘한 살기를 내뿜으며 다시 한번 독촉했다.

이제 와서 적당히 얼버무린다든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윤은 쩔쩔매며 사실을 고백해야 했다.

“똑바로 말해. 재이가 뭐.”

“재이 씨가. 어제 회식 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더라고요. 서로 뺨도 때리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구요. 그러고 오늘까지 연락이 안 돼요.”

“…….”

해준은 너무나 황당하여 속으로 가윤이 한 말을 곱씹다 물었다.

“우리 애가 성추행을 당하고 뺨도 맞았다는 소리네.”

해준의 목소리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덤덤했으나 그의 눈빛에는 안광이 번쩍였다. 평소에도 강한 존재감을 내뿜던 그는 이제 명백한 살기를 풍겼다.

그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윤이 전에 봤던 그 눈빛에 흠칫 놀랐다. 그녀가 곤욕스러워하며 말없이 입술을 축였다.

“직원 정보 넘기세요.”

“해준 씨. 맘은 알지만 그건 좀.”

가윤이 난감하게 대답했다. 애석하게도 문제의 부장은 아버지의 라인 중 중요 인사였다. 애초에 징계 위원회는 허울일 뿐 조용히 협의 후 사건을 키우지 않고 위로금 명목으로 웃돈을 주어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런 계획을 해준이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나직하고 강력하게 말했다.

“내가 직접 방송사에 행차하길 원해요?”

“…….”

“뺨을 때렸다. 나는 뺨으로는 안 되겠는데.”

“해준 씨.”

가윤은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뉴스에도 실리지 못할 만큼 잔인한 짓을 벌이고도 남을 기세였다.

“가윤 씨도 생각 고쳐먹어요. 나랑 결혼할 생각 안 하는 게 좋아.”

“…….”

“내가 회장님보다 더한 새끼라는 걸 왜 모르지?”

해준이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며 빈정거렸다. 입에는 서슬 퍼런 칼을 문 것처럼 살기가 형형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잔인함이 어른거렸다.

* * *

재이가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넘는 시간이었다. 방 안에선 새 가구 냄새가 진동했다. 재이는 제대로 비닐 커버도 벗기지 않은 매트리스 위에서 눈을 떴다. 아니, 뜨려고 했지만 간밤에 너무 심하게 우는 바람에 눈가가 따끔거려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이제 그 집에서 생활해도 좋아.”

성추행도 재이의 입장에선 벼락같은 사건이었지만 그의 폭탄 발언에는 비할 것이 아니었다. 배신감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숙박업소로 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난밤 재이는 그가 식탁에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올려놓은 것을 확인하고서 그 집으로 들어와 출근하지 않았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37통.

모르는 번호, 권 비서님, 방송국 전화번호, 해준까지. 참 여러 사람에게도 연락이 뒤섞인 채였다. 재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준은 왜 전화한 걸까. 메시지 함도 사정은 비슷했다. 해준의 것만 확인했다.

[전화 받아.]

짤막했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재이는 고민하다 전화를 걸었다. 해준이 곧장 받았다.

-어디야.

“그게 뭐가 중요해요.”

-어디냐고 물었어.

재이는 초연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밤새 오열하며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을 낸 상태였다.

“찾지 마세요. 저 그냥 죽을 거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안재이. 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열어.

해준은 처음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그의 목소리에도 재이는 초연했다. 죽으면 다 끝이니까.

“싫어요.”

-열어.

문고리가 철컥거리며 열리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이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통보했다.

“들어오려고 하면 뛰어내릴 거예요.”

-뭐?

“난 엄마 아빠도 잃고, 친오빠도 잃었어요. 난 당신 사랑해요. 더 이상 잃을 바에, 죽을래요.”

재이는 눈에 생기를 잃은 채 대답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초연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전화를 통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냥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겉으로는 자신을 공주라고 빈정거리지만 실상은 기생충 취급을 받는다. 해준을 도와 내조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이젠 이마저도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으니 영영 사라지라고 한다.

사는 게 왜 이렇게 치여야 하는지 버거웠다. 이 모든 게 자신이 해준을 포기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편할 거 같았다.

해준은 말없이 재이의 우는 소릴 듣다 묵은 감정을 토해 내듯 힘겹게 말했다.

-재이야. 내가 잘못했다.

“…….”

-내가 잘못했어.

재이가 어깨를 떨며 잘게 울었다. 울면서도,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비는 그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항복을 받아 낸 재이는 당장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 해준에게 안겼다.

* * *

재이는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다 진이 빠져 다시 잠들었다. 끼니까지 거른 채 자는 모습을 보고 해준은 그녀를 깨울까 하다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릴 때랑 똑같네.”

해준은 재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턴 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더니 재이의 입술은 여기저기 터져 있었다. 맘고생도 한몫했겠지. 그런 아이가 모욕을 당할 동안 자신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막혔다.

극적인 죄책감은 그의 인내심을 한계로 몰고 갔다. 분명 할 말이 있다고,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말을 하면서까지 전화를 하고 싶어 했는데. 그렇게 정신없이 끊었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와 재이를 내려다보다 잠에서 깬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왜 안 갔어요?”

“…….”

“그냥 죽게 놔두지.”

잠에서 덜 깬 재이는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해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재이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그의 손은 재이를 덮고도 남았다. 따스한 온기에 재이는 눈물이 날 거 같아 등을 돌려 누웠다. 그래도 해준은 일어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벽을 보고 돌아누워 있는데 뒤에서 그가 고해 성사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죽는 게 너무 무서웠다.”

“…….”

재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해준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회사가 무너지고, 조부가 쓰러져도 끄떡없던 그는 재이가 자신과 헤어지는 것 외에 자연사해서 세상에 없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미어지는 거 같았다. 모든 판단은 이성에 기반하여 냉정하다는 평을 달고 살던 본인이었지만 ‘생명을 다하면 죽는다’는 만물의 이치도 싫었다. 재이의 존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싫었다.

그만큼 재이는 그를 어리고, 어리석게 만들었다. 해준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내 마음을 너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길 빈다.”

“…….”

“나와 같은 마음을 겪어 네가 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 또한 견딜 수 없을 거 같으니까.”

해준의 말을 들으며 재이가 생각했다. 당신은 나를 절대로 모른다고. 재이의 생각을 모르는 그가 이야기를 갈무리 지었다.

“너무 많은 걸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잠자코 듣고 있던 재이가 입을 떼어 건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오빠를 알아 버렸는걸요.”

전 그렇게 믿어요. 이 사랑도 만물의 이치일 거라고.

“…….”

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둘은 너무 늦어 버렸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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