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재이야. 미안해.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욕 한 개, 비난 한 줄 없었지만 재이가 살면서 들었던 말 중에 더없이 서운했다.
“하…….”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잠꼬대라도 주의 깊게 듣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허무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은 듯 회의감에 휩싸였다.
Rrrrrr-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기고, 재이의 휴대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재이가 섣불리 신고라도 해 회사가 시끄러워질 걸 의식한 게 분명했다.
그냥, 죄다 신물이 났다. 재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이렇게 순식간에 힘든 일만 몰려오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좋은 것은 싫어지고, 기대했던 것은 실망으로 바뀌었으며, 자리는 빼앗기게 생겼다. 깊은 회의감이 그녀를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짜증 나……!”
재이가 이를 악물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아악!”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있는 힘껏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그녀를 지나치던 사람이 그걸 보고 힐끔거렸지만 재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회사도 출근하지 않을 거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을 거다.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재이는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발걸음을 옮겼고 눈앞에 보이는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하이볼 주세요.”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이기지도 못할 술을 끊임없이 들이부었다. 결국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비틀거리며 나왔지만 재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취해 있었다.
“죽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번화가 한가운데 쪼그려 앉았다. 점점 토기가 몰려왔다. 재이는 낯선 이들의 시선도 무시한 채 구역감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끙끙거렸다.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여기서 뭐 해?”
재이가 반쯤 감긴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유윤재였다.
* * *
유윤재는 재이를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로 데리고 갔다. 그사이 재이는 취기가 더 올라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토할 때마다 윤재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너 도대체 얼마나 마셨냐? 어?”
“몰라.”
“진짜 미쳤어? 너 이렇게 먹다가는 객사해. 치사량이라고.”
안 그래도 토할 거 같은데 쏟아지는 잔소리 세례에 재이가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회피했다.
“차이기라도 했어? 화장은 왜 이렇게…….”
윤재가 중얼거리며 빼꼼히 보이는 재이의 눈가에 손을 뻗을 참이었다. 재이가 진저리 치며 손을 뿌리쳤다. 그 소리는 카페 종업원도 쳐다볼 만큼 컸다.
“얼굴 만지지 마.”
재이의 얼굴에는 살기가 형형했다. 스킨십이 몸에 배어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을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 몰랐던 윤재는 당황했다.
“야, 너 무섭다. 왜 이래.”
“손에서 담배 냄새 나. 만지지 마.”
“아. 미안, 미안. 역시 공주님한테는 당연히 손을 씻어야겠지.”
“…….”
그가 사과했으나 재이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통 화난 게 아님을 눈치채고 윤재가 정중하게 다시 말했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아니야. 됐어.”
재이는 더 이상 까칠하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정중한 사과가 돌아오자 그녀의 날카로움이 한풀 꺾였다.
재이는 유윤재의 손을 너무 강하게 뿌리친 건 아닌가 조금 미안한 한편, 후회가 됐다. 유윤재한테 한 행동의 반이라도 그 늙은 고목나무 같은 부장에게 했어야 하는데.
“너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냐. 형 부를까?”
윤재는 재이를 발견했을 당시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술집이 즐비한 거리 한가운데 한참을 쪼그려 있지 않나, 얼굴은 화장이 다 번진 채 덕지덕지 지저분했고, 하나로 묶은 머리는 죄다 삐져나온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보다 못한 유윤재가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재이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냐. 오빠 지금 바쁘니까 괜찮아.”
“형? 아. 지금쯤 끝났을 텐데?”
“응?”
“엄마가 지금 사진 보냈네.”
네가 미팅이 끝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묻기도 전에 윤재는 제 휴대폰을 보여 주었다. 낯익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진이었다.
“으하하. 꼰대 왜 이렇게 험악하게 나왔어.”
윤재가 가운데 선 유 회장을 유심히 보더니 뒤로 넘어갈 듯 떠나가라 웃었다. 그중에는 해준도 있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회장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재이가 혼란스럽게 물었다.
“이게 뭐야?”
“몰랐어? 오늘 회장님 생신이잖아.”
윤재가 빨대를 입에 물며 대답했다. 그의 태연한 대답에 온몸에 소름이 흘렀다. 내가 잘못 봤던 거겠지? 재이는 다시 사진을 확인했다. 여전히 해준의 옆에는 가윤이 서 있었다.
* * *
해준의 옆자리는 항상 재이의 차지였다. 여럿이 모여 있을 바에 차라리 혼자를 자처하는 그의 성격상 유일한 예외의 인물이었다.
그런 ‘특별 대우’가 좋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도처에 자신을 마땅찮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으나 재이는 항상 그런 그의 태도로 안심했고 그의 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가윤이 해준의 옆에 서 있는 사진을 보자마자 재이는 정말로 결단을 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느꼈다.
“나 갈게.”
재이는 윤재도 뿌리치고 집으로 갔다. 택시를 타고 최대한 빨리 가 달라고 재촉했다. 재이가 집에 황급히 들어갔지만 이미 현관에는 해준의 구두가 가지런히 벗겨져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재이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다. 집은 무드 등만 켜져 있었다. 해준의 서재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재이는 머리를 대충 정리하다 말고 그의 서재로 가서 노크했다.
“들어와.”
그가 짤막하게 허락했다. 재이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해준은 안경을 쓰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안경을 써도 가려지지 않은 뚜렷하고 담백한 이목구비와 넓은 어깨. 어떤 위기가 닥쳐도 초연할 것 같은 타고난 기질과 단정한 성품. 저런 남자를 가윤이 놓칠 리가 없다.
“저 왔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막상 그를 보자 나오는 말이라고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게 고작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
“언제 들어왔어요?”
“앉은 지 5분도 안 됐어.”
해준은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서류를 넘기며 대꾸했다. 재이는 이제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그를 보자 심장이 싸르르 아팠다.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고 태연한 거처럼 말했다.
“생신 잔치 잘 갔다 왔어요?”
그제야 해준은 고개를 들어 재이를 바라봤다. 그가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지, 알리기를 미루려는 건지 몰라도 재이는 이 피 말리는 시간들이 힘들었다. 당장 결론을 내고 싶었다.
“어떻게 알았어.”
재이의 예상대로 해준은 화들짝 놀란다거나 경박하게 화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소식의 출처를 알아내어 재이가 어디까지 아는지 확인할 참이었다.
“결혼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
“여태 그 여자랑 있다가 왔어요?”
그러나 재이도 만만한 마음으로 서재까지 뛰어온 게 아니었다. 자조적으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주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독기가 가득 찬 거 같기도 했다. 생전 보인 적 없던 기색에 해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거냐.”
“지금 나더러 어쩌란 거냐는 뜻이에요?”
“아니. 질문한 거야.”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긴 할 거예요?”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게.”
둘의 대화에 긴장감이 팽팽했다. 재이가 보란 듯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요구했다.
“그럼 우리 둘이 도망가요.”
“…….”
해준이 재이를 말없이 쳐다봤다. 검은 동공은 차분하다 못해 차갑게 얼어 있었다. 동요 없는 반응마저 재이에겐 뼈저리게 슬펐다. 재이가 울며 애원하듯 빌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요. 우리 둘만 있는 곳으로. 영화도 잘 안 받아지는 네덜란드 시골 이런 데 가서 살아요.”
외국 생활은 신물 났지만 그와 함께라면 감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부와 명예 같은 건 재이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애초에 열심히 살았던 건 해준에게 누가 되지 않고 은혜를 갚고 싶어서였다. 해준이 자신의 옆에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해준은 재이가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님을 직감했다. 쓸데없이 그녀를 희망 고문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럴 수 없어.”
“왜요?”
“안 돼. 그건 불가능해.”
그랬다간 유 회장이 널 죽이고도 남을 거다. 자신이 말해도 재이는 믿지 않겠지만 유 회장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네덜란드로 가도, 지옥으로 숨어도 소용없다. 유 회장은 기어코 둘을 찾아내어 재이에게 보복할 것이다. 그의 속도 모르는 재이는 그저 해준이 발을 빼는 걸로 보일 뿐이었다.
“아니요. 난 돼요.”
“…….”
“난 할 수 있어요. 오빠가 못 하는 거겠죠.”
“안재이.”
재이의 감정이 점차 격해졌다. 속에 꾹꾹 눌러 왔던 말을 한마디 꺼낼 때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재이가 목소리를 높이며 해준에게 물었다.
“그 여자 사랑해요?”
“아니.”
“나는요?”
“…….”
해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회피할 생각은 없었으나 재이가 그렇게 묻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재이에 대한 감정을 자신도 쉽게 결론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어떻냐고요! 나 사랑해요?”
“그래.”
하지만 여기서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재이가 다칠 게 뻔했다.
“…….”
“가족으로서 사랑해.”
재이는 속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는 해준은 사람의 마음이 미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이를 악물고 초연한 척 연기하며 재이에게 거리를 두어야 함을 곱씹었다.
“……집 알아봐 놨으니 굳이 찾으러 다니지 마, 열쇠는 식탁에 있어. 이제 그 집에서 생활해도 좋아.”
해준이 억지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채 통보했다. 재이는 한참을 눈물만 뚝뚝 흘리며 그를 쳐다보다 서재를 나갔다. 잠시 뒤 그녀가 집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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