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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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회장 일가의 가장 중요한 날은 회장의 생일이었다. 어느 재벌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은 성대한 잔칫날이었다.

특히나 해준이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에 유 회장은 손자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더더욱 잔치에 신경을 썼다. 실질적인 주인공은 해준이나 다름없었다. 해준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행사였다.

그랬기에 매번 빠지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자리였다. 해준은 오늘을 위해 새로 맞춘 갑갑한 정장을 입고 내내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멀끔하구나.”

“감사합니다. 회장님도 오늘 안색이 좋으시네요.”

회장의 진심 어린 칭찬에 해준이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해준의 속내를 알아차린 회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가까운 일가족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해준 씨!”

멀리서 가윤이 손을 흔들며 잔뜩 알은체했다. 업무적으로 최측근 또는 일가족이 아니면 올 수 없는 행사인데 어떻게 알고 온 건지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거 좀 받아 줘요. 팔이 무거워서.”

가윤이 멋들어지게 포장된 와인을 건넸다. 해준이 얼결에 건네받으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회장님께 초대받았어요. 그런데 아는 분이 해준 씨밖에 없네요.”

가윤이 멋쩍게 웃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반면 해준은 유 회장이 초대했다는 말에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채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회장을 바라봤다.

이 자리는 아주 특별한 자리였다. 정재계 인사 모두 유 회장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었으나 아주 프라이빗하게 진행되었다. 이곳은 재이도 감히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를 불러?

“안녕하세요, 회장님.”

해준의 속을 알 리 만무한 가윤이 유 회장을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밝게 인사했다.

“바쁠 텐데 시간 내서 애써 와 주었군요.”

“아니에요. 생신 너무 축하드려요. 아 참. 해준 씨한테 선물 전달 드렸어요. 저희 아버지가 이번에 여행 가서 사 오신 와인이에요.”

회장과 가윤은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했다. 일가족들은 못 보던 아가씨가 해준과 회장 곁을 맴도니 자연히 가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예비 신부라고 추측할 만한 장면이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해요.”

보다 못한 해준이 가윤을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짜증이 난 기색은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올 거면 미리 말을 해야지.”

“왜요. 난 나대로 초대받아서 온 건데.”

그의 타박에 가윤은 눈을 말똥하게 뜨고 받아쳤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 상황이었기에 해준은 헛웃음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기념사진 촬영 있겠습니다!”

사진작가가 연회장 내부에서 소리쳤다. 심지어 이걸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니. 해준은 낭패감을 느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미 참석자들이 모두 일렬로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가운데에 선 유 회장이 해준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해준. 이리 오너라.”

“네.”

유 회장의 오른편에 해준이 섰다. 회장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저 우리 가윤 양도 해준이 옆에 서시고.”

“해준 씨. 표정 좀 풀어요.”

“…….”

해준은 당장이라도 욕을 지껄이며 튀어 나가고 싶었으나 오늘은 날이 날인만큼 참는 수밖에 없었다.

“자, 사진 찍습니다!”

사진작가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연회장에 울렸다.

* * *

해준이 곤욕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 마냥 곱게 키우고만 싶은 해준의 바람과는 달리 재이는 위험에 빠져 있었다.

“자, 건배!”

빼곡하게 모여 앉은 회사원들이 술잔을 든 손을 같은 곳을 향해 치켜들었다. 어수선하게 들떠 있는 회식의 분위기는 재이에게 어렵기만 했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며 눈치 보기 바빴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할까. 재이는 뻐근한 목과 어깨를 티 나지 않게 스트레칭하며 끝나는 시간만 기다렸다.

“야. 인턴 이리 와 봐. 너 몇 살이라고?”

옆 부서 부장이 그녀를 향해 삿대질하며 물었다. 놀란 재이는 자리에 앉아 대답하려 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장소에 비해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부장의 옆으로 가서 앉아야 했다.

“한잔 따라 봐. 그래. 몇 살이라고?”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재이가 입으로 숨 쉬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스물여섯 살입니다.”

“미국 물 좀 먹었다고?”

“공부를 미국에서 하다 귀국했습니다.”

질문에는 이유 모를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최대한 별것 아닌 것처럼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 미국 좋지. 너희 집 좀 사냐?”

“아니요. 오빠가 힘들게 공부시켜 줬습니다.”

재이가 속으로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부풀렸지만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재이만큼은 집안에 손 벌리지 않고 떳떳하게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해준은 빠듯한 유학 생활과 일을 병행했다. 단 하루도 늦잠 한번 맘 놓고 자지 않았던 고생의 시간이었다. 재이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지. 너, 곱게 자랐다고 사회에서 뻐겼다간 그대로 침몰이야. 인마.”

“…….”

“대답을 안 해?”

재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장이 바라는 게 어떤 말일까. 네, 아니오? 알겠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고? 아님 좋다고? 싫다고?

차마 어떤 대답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다.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던 해준이 떠올랐다. 그렇게 힘들게 학교를 보내 줬는데 취업한답시고 용쓰는 중 이런 소리나 듣다니.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건가.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야, 너 같은 애들은 꼭 행동으로 보여 줘야 알아. 어?”

부장은 잔뜩 화가 난 듯했다. 이미 만취해서 개가 되었지만 주위 직원들은 아무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전히 초연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재이를 보며 그가 입술을 씰룩였다.

“이거 달고 뭐 대단한 거 한다고 뻐기고 있냔 말이야. 술이나 따르지!”

그가 재이를 괘씸하게 여기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누구도 말릴 틈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철썩!

그리고 재이가 아빠뻘 부장의 따귀를 후려친 것도 순식간이었다.

* * *

재이는 술집과 편의점의 간판만이 빛나는 번화가를 정처 없이 걸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걷기만 했다.

불편한 로퍼 때문에 발에는 물집이 잡혔지만 그게 뭐가 대수랴. 재이는 조금 처량하고 멍한 기분으로 대교를 건넜다.

차들이 지나가고 저녁 운동을 나온 자전거도 그녀를 지나쳤다. 재이는 도시에 홀로 남은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며 비틀비틀 걸었다.

Rrrrrrr-

모르는 번호, 회사 번호로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벌써 8통째다. 재이는 처참했던 회식을 떠올렸다.

“이 미친년이!”

회식 자리는 뒤집어졌다. 만취한 부장은 지지 않고 재이의 뺨을 내리쳤다. 태어나서 처음 맞아 보는 따귀였다. 온 힘을 다해 내리쳤는지 재이가 옆으로 엎어지고도 머리가 멍해 잠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직원들은 우르르 일어나 달려들어 부장을 말리고 재이를 일으켰다. 그제야 눈물이 찔끔 났다. 그때까지도 부장은 재이에게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듣기도 흉할 정도의 원색적인 욕설이었다.

“저 갈게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인턴이고 뭐고 재이는 모조리 때려치우고 싶었다. 휴대폰과 가방을 챙겨 바로 고깃집을 튀어 나갔다.

“재이 씨! 말 좀 해! 재이 씨!”

뒤에서 직원들이 재이를 쫓아오며 고함쳤다. 위로를 하려는 건지, 신고를 말리려는 건지 모호했지만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어떡하냐.”

인턴 월급 나오면 해준의 구두를 사 줄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되자 당장 다음 날 출근부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아 봐도, 도저히 출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내가 정말 귀하게만 자라 너무 나약한 걸까.

이 와중에도 재이는 해준이 너무나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이런 일에 대해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가 자신보다 더욱 속상해할 게 뻔했으니까. 말해도 맞은 것까진 말하지 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평소와 달리 해준은 일찍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반가운 목소리였다. 중저음의 낮은 톤이지만 묘하게 부드럽다기보다는 냉정하고 칼 같은 목소리. 누가 들어도 유해준이었다. 막상 목소리를 듣자 울음이 울컥 차오른 재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디예요? 나 이야기할 거 있는데.”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지금 잠시 미팅 중이야.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라고 대답했지만 재이는 뭔가 풀 죽는 기분이었다.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게 뻔했지만 사람 마음이 맘처럼 되지 않았다.

-이따가 말하자.

평소 같았으면 두말 않고 재이가 먼저 전화를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이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저기, 오빠.”

-응.

“아, 혹시 오늘 좀 빨리 들어올 수 있어요?”

-오늘은 늦을 거 같은데. 혹시 용건 있으면 지금 말할래.

재이가 순간 뜸 들이다 결심했다. 그래. 지금 마음이 섰을 때 말하자. 아님 평생 말하지 못할지도 몰라.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으나 그의 목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용기를 냈다.

“아니, 그게. 제가요 오늘 회식이 있었는데.”

-…….

하지만 전화 건너편에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재이가 찜찜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혹시 지금 내 말을 안 듣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던 남자는 이제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을 만큼 변했다. 하지만 이내 아닐 거라고. 통화 음질 탓일 거라고 생각하며 불안하게 그를 불렀다.

“……오빠?”

-재이야. 미안해.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갑자기 해준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돌연 전화가 끊겼다.

“…….”

눈을 크게 뜬 재이가 휴대폰을 쥔 채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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