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유윤재의 억지로 둘은 근처의 백반집으로 갔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사이에 굳이 맛과 격식을 차려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재이는 별말 없이 식사에 집중하며 자리로 복귀했을 때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업무를 곱씹었다. 그러자 유윤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인턴 얼마나 남았는데?”
“얼마 안 남았어요. 한 일주일 조금.”
“한 달짜리겠네?”
“네.”
상대에게 무신경한 자신과 다르게 유윤재는 이런저런 대화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성격인 듯했다. 어찌 보면 가윤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회성이 떨어져 스몰톡도 즐기지 않는 재이는 기계적인 대답만 담백하게 내놓았다.
“형 바빠서 신경도 못 써 주겠네.”
“신경 쓰면 안 되죠. 나이가 스물여섯 살인데.”
“생각보다 막 그런 스타일은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문득 재이는 가윤이 비슷하게 자신을 도발했던 것이 떠올랐다.
“뭐가요?”
“공주님 공주님 소리 하던데 막 그렇게 떠먹여 주길 바라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서.”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어떤 뜻이래도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가윤도 그렇고 유윤재도 그렇고 모두 자신을 아무것도 못 하는 철부지 부잣집 여식쯤으로 여긴 듯했다. 내가 그렇게 주체적이지 않아 보이나. 평소라면 흘려들을 말이 유독 마음에 꽂혔다.
“형이 워낙 싸고돈다니까 나도 궁금하긴 했어. 애지중지 지극정성이라더라고.”
“……그런 거도 아니에요.”
“형도 그렇대?”
너 그 말 진심이냐는 따지는 듯한, 아니 도발하는 듯한 뉘앙스의 되물음에 재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진위 여부를 떠나 내가 아니꼽다는 건가? 그렇다면 자신도 만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당하고만 있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둘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재이는 굳이 눈을 피하지 않았다.
“…….”
“농담이야.”
유윤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실실 웃었다. 재이는 조금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나올지 시험하는 건가. 당하고만 있을 수 없는 그녀가 덤덤히 응수했다.
“오빠랑 성격 되게 정반대인 거 같아요.”
해준은 차갑지만 거짓은 없었고 차분하고 담백했다. 유윤재는 따뜻하고 자유롭긴 했지만 뭔가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과대망상인 걸까. 어제의 기막힌 우연을 떠올리며 재이가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지. 그러니까 난 회사원 안 하잖아. 회장님 말씀 곧이곧대로 못 듣겠거든.”
“…….”
“너도 오히려 나랑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런 답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낱낱이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의 말에는 분명히 해준의 태도를 깎아내리는 평가가 깔려 있었다. 그런 말을 해준의 앞에서도 할 수 있을까?
재이는 유윤재를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유윤재가 능청맞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코를 찡긋거렸다.
* * *
유윤재는 돌아온 탕아였다. 유학을 핑계로 해외를 전전하는 게 그의 인생이었다. 미국에도 있어 봤고, 영국에도 있어 봤고 캐나다에도 살아 봤다. 물론 대부분 학교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그가 집안에서 내쳐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유 회장의 직계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 회장의 외아들 고집은 업계에서도 유명했다. 영영 머리를 넘볼 수 없는 자리지만 미련도 없는 게 유윤재였다.
정도를 걷는 유해준과 달리 유윤재는 최대한 효율적인 인생을 지향했다. 적당히 살며 유 회장에게 돈을 받아 살지만 주거지가 외국이라 눈치 볼 일도 없는 인생. 돈도 성과도 되도록 쉽게 공으로 먹는 게 최고인 인간이었다.
“너무 바빠서 얼굴 한번 볼 새가 없네. 과로사하는 거 아니야?.”
“다음에 먹자. 미안하게 됐다.”
유윤재는 재이와 식사가 끝나고서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랜만에 귀국하니 인생이 얼마나 지루한지. 누구라도 들쑤시고 싶었을 뿐이다. 망칠 것을 찾아 서성거리는 게 그의 인생이었다.
“여기 앞에서 밥 먹었는데 맛있더라.”
“어. 그래. 좀 앉아 있어.”
해준을 찾아갔지만 그는 일에 매진하느라 자신에게 쓸 시간은 없어 보였다. 윤재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도발했다.
“형. 결혼하면 상무로 올려 준다며? 좋겠다.”
“무슨 소리야.”
해준은 듣도 보도 못한 말에 솔깃하기는커녕 사촌 동생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인간으로 보였다. 해준이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 같은 인간이었다면 유윤재는 하이에나와 여우 그쯤을 닮았다. 깜빡하면 홀릴 수 있으니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
“회장님이 그러시던데?”
“…….”
“잘 생각해. 그러다 노총각으로 죽지 말고.”
반들거리는 맹랑한 얼굴에 해준은 초연히 대꾸했다.
“내가 알아서 해.”
“그래, 뭐. 내 코가 석 자지.”
자책하지만 진심은 아닌 듯한 반응에 해준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릴 적, 보다 못한 유 회장이 저렇게 살다간 언젠간 객사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형 다음 주에 회장님 생신인 거 알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해준이 시선을 달력으로 옮겼다. 윤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음력으로 하잖아. 잘 좀 해. 자꾸 데면데면하게 굴어서 밉보이지 말고.”
두 남자는 서로를 잘 알았다. 윤재는 가벼운 충고를 던졌다. 아쉬울 건 체면밖에 없는 노친네에게 자꾸 딱딱하게 구니까 무엇이든 선뜻 쉽게 내주는 법이 없다. 자신 같으면 조금 입바른 말도 하며 성질을 받아 줬을 것이다. 유 회장은 보답이 확실했으니까.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해.”
“으이구. 나 먼저 갈게.”
“그래. 조심해서 가라.”
“그리고 걔 있잖아. 여자애.”
사무실을 나가려던 윤재가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말했다.
“누구, 재이?”
해준은 단박에 눈치챘지만 모르쇠 하며 물었다. 윤재는 팔짱을 낀 채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걔 뭐가 그렇게 좋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형이 좋아 죽는 거 같길래.”
자신을 떠보는 게 느껴졌지만 해준은 덤덤히 당연한 사실로 대꾸했다.
“동생이니까.”
“흐음.”
윤재가 할 말이 많은 듯한 애매한 표정을 짓다 물었다.
“진짜 그냥 동생이야?”
해준의 펜이 서류에서 멈췄다. 점점 선을 넘으려 하는 윤재를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넌 그럼 뭐라고 생각하냐.”
순식간에 사무실 분위기가 얼음장이 되었다. 하지만 갖은 비행으로 가진 건 깡밖에 없어진 윤재는 어깨를 으쓱일 뿐, 굳이 발뺌하지도 않았다.
“뭐, 이것저것.”
해준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느꼈다. 눈빛이 가라앉은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가.”
“미안, 미안하다고. 다음에 봐.”
윤재가 낄낄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빠져나갈 땐 저렇게도 생쥐처럼 움직이다니.
“…….”
사무실 문이 닫히고 다시 혼자 남게 된 해준은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곱씹었다. 가족에게 할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자신에게 뻗대는 것을 바로 도전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분명히 유 회장에게 물려받은 못난 모습이었지만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편두통을 참아 냈다. 한참을 책상 위에서 고심하던 해준이 비서를 호출했다.
“권 비서. 내년 상반기 진급 대상자에 대해서 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 * *
해준이 이사로 진급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내포했다.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기회는 해준이 아주 강렬하게 원하던 것이었다.
성취욕과 업무 능력에 대한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도 컸지만 이사가 되면 그의 실권이 더욱 강력해진다. 유 회장과 가까워질수록 회장의 기를 세워 주는 동시에 회사를 빨리 물려받게 될 것이었다. 회장은 끔찍하게 키워 온 회사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을 것이고, 해준이 아쉬워질 것이다.
“확실해?”
해준이 까칠하게 물었다. 권 비서가 차분하게 들은 소문에 설득력을 더했다.
“예. 비서실에서도 나온 말이고 전기본에서도 대략적으로 귀띔 받은 내용이라고 합니다. 결혼 선물로 상무이사 진급을 약속하셨답니다.”
“…….”
윤재의 말은 아주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말이 결혼 선물이지 결혼하지 않으면 꿈도 꾸지 말란 뜻이었으니까. 유 회장은 대가 끊겨 엉뚱한 놈이 회사를 가져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내가 이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뭐 지분 관계부터 많은 것들이 변하겠지만.”
“…….”
“본부장님을 정말로 놓치고 싶지 않으시겠죠. 현재도 여전히 그렇게 사료됩니다.”
해준의 머리가 스트레스로 지끈거렸다. 놓칠 수 없는 자리였지만 섣불리 결정할 수도 없었다.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 냉정하게 따져 봐야 할 문제였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저와 함께 귀농도 고려해 주시겠습니까?”
권 비서가 적잖이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해준의 얼굴이 흐려졌다. 대를 잇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은 아버지보다 더한 꼴을 겪을 것이다. 본인으로 그치면 다행이지만 자신의 측근들도 피할 수 없겠지. 재이도, 권 비서도 위험해질 게 뻔했다.
누구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지만 해준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살지 않았다. 차라리 피할 수 없다면 죽을 만치 달리는 게 그의 성격이었다.
“5년 안으로 부회장 자릴 달면?”
권 비서가 물끄러미 해준을 바라보았다. 신의가 두터운 남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사무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권 비서가 어렵게나마 입을 뗐다.
“……재이 씨가 안전해지겠죠.”
전에도, 현재에도 모든 그의 동기는 재이에서부터 시작했다. 해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누구보다 잘 아는 결론이었다.
결혼을 하면, 재이가 안전해진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재이가 위험해진다.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더 있었다. 결혼을 하면, 재이를 보고 살 수 없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재이는 자신을 만나 줄 것이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