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재이는 눈물을 훔치며 건물을 뛰쳐나오다 다리가 후들거려 멀리 갈 수 없었다. 결국 맞은편의 한적한 개인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대충 커피를 시키고 테이블에 앉아 처지를 비관하며 훌쩍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해준을 닮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 최대한 그를 내조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도맡아서 했다.
“근데 제 입장에서 그런 지시를 들었으면 조금 당혹스러웠을 거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해서 나온 말인 거 같거든요. 직급은 낮지만 경력이 더 기니까요.”
가끔 아랫사람의 시선이 필요할 때 해준에게 조언을 주기도 했고, 일에 몰두해 개인 관리에 소홀할 때는 재이가 직접 나서기도 했다. 다른 것에 신경 쓸 수고를 덜 수 있도록 일상을 관리해 주는 비서나 다름없었다.
“어제 비타민이랑 약 안 먹었죠. 얼른 먹어요. 셔츠 맡겨 놓은 거 사무실로 보냈으니까 오후 세 시 전에 도착할 거예요. 권 비서님한테도 연락드렸어요.”
단순히 빌붙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도 적잖이 노력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막상 유 회장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무척 속상했다.
“왜 그렇게 울어요. 도둑이라도 맞았나?”
낯선 남자가 냅킨을 건네면서 재이의 옆에 섰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훤칠한 키에 피부가 반질거렸다. 그게 재이의 첫인상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니 경계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남자가 변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냥 나는 짠해서 그러지.”
“저리 가세요.”
그의 말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재이는 몹시 불쾌했다. 뭐야 이 모르는 남자는. 그러나 낯선 남자는 별다른 타격도 없이 능청맞은 태도로 맞은 편에 앉았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닌데. 그쪽은 조금 까칠한 거 같기도 하고.”
“일어나세요. 왜 앉아요?”
“지금 혼자 4인 테이블을 쓰고 있어서 만석이잖아요. 자영업자 입장도 생각해 줍시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제야 제이는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조금 북적이는 정도였던 카페는 점심시간이 되자 금세 만석이 되었다.
재이가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와 테이블에 널브러진 자신의 짐을 황급히 치웠다. 그녀의 사원증을 본 남자가 잠시 멈칫거리며 물었다.
“아아, 그 대원 공주님?”
“……누구세요?”
흠칫 놀란 건 재이도 마찬가지였다. ‘대원 공주’는 재이를 가리키는 말로, 그룹의 사정을 꽤나 자세하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은어였다. 남자가 씩 웃으며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나 해준 형 사촌 동생이에요. 반가워요.”
“…….”
하지만 재이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조금 억울하다는 듯 허허 웃었다.
“왜 그렇게 사기꾼처럼 쳐다보지? 정말인데. 지난주에 귀국했어요.”
남자는 재이가 누구인지 잘 아는 듯했다. 혼자서 친근한 마음에 들뜬 게 역력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근데 왜 그렇게 서럽게 운 거예요? 형이랑 싸웠나.”
“…….”
“진짠데. 표정이 왜 그렇지.”
하지만 재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도하게 알은체를 하는 게 찜찜하고 수상하게 여겨졌다. 이상한 남자가 갑자기 껄떡거리는데, 그게 해준의 사촌 동생이라고? 이런 우연의 일치는 없을뿐더러 자신에게 일어날 리 없는 확률의 일이었다.
“지금 신고할게요.”
“신고 어디요?”
“112요.”
“아니,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나 진짜 사촌 동생이라니까요?”
재이가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난 그럼 친동생이에요.”
통화를 누르고 신호가 가던 도중 남자가 재이를 말리지 못해 쩔쩔매다 창밖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아니, 아, 잠시만요. 잠시…… 어 형!”
마침 회장을 배웅하고 뒷문으로 돌아오던 해준은 재이와 사촌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해준은 둘을 알아보고 성큼성큼 가게로 들어왔다.
“여긴 웬일이야.”
“형 진짜 오랜만이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걸 보며 재이가 조금 당황했다. 아니, 사실이란 말이야? 슬그머니 통화를 끊고는 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헛짚은 거라니. 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아도 희박한 확률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놀러 왔어?”
“나 오늘 근처에서 약속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지. 형은? 아님 다 같이 저녁 먹을래?”
“아니야. 됐어. 난 할 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먹자.”
“형 진짜 밥 먹어야 해.”
재이는 아직 떨떠름한 감정이 남아 있어 선뜻 그와 반갑게 인사하지 못했다. 해준도 굳이 당장 재이를 붙잡아 이야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재이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해준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회사 근처 한식당. 점심시간이 끝나 조용해질 즈음이었다. 유 회장과 윤재가 식당에 마주 앉았다. 윤재가 근처에 있다는 약속은 유 회장과의 식사 자리였다. 유 회장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삐딱하게 물었다.
“좀 어떻더냐.”
“뭐. 무턱대고 덤비거나 멋모르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지켜봐야 할 듯싶어요.”
“그게 보기보다 맹랑하다.”
두 사람의 이야기 주제는 다름 아닌 재이였다.
“호락호락하게 나오진 않더라구요.”
그의 말에 유 회장이 혀를 내둘렀다. 천하의 유 회장도 손을 못 쓴다길래 어느 정도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었다. 윤재가 씩 웃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래. 일만 잘해 준다면 내가 크게 사례하마.”
미국에 있던 윤재는 유 회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았다. 재이를 해준에게서 떨어트려 달라는 것. 어떤 방법과 수를 써도 상관없으니 해준이 결혼을 무사히 할 때까지만이라도 걸림돌을 치워 달라는 의미였다.
윤재는 흔쾌하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능청맞은 자신의 성격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유 회장의 부탁을 성공적으로 들어주었을 때는 후한 보답이 자신을 기다릴 테니까.
게다가 옛날부터 윤재네 집은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유 회장에게 생활비를 받는 입장이었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유 회장의 전화를 받자마자 윤재는 지체 없이 한국으로 넘어와야 했다.
“그런데 형이 푹 빠져 살 만한 정도는 절대 아니던데요.”
윤재는 재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예쁘장하고 깔끔한 이미지이긴 했으나 철없는 공주보단 경계가 많은 어린 삵 같았다.
귀엽고 순진하게 생겼지만 눈빛에 일렁이는 공격성이 대비되어 묘하게 느껴졌다.
“빠져 살다니. 그런 말 어디 가서 했다간 큰일 난다.”
하지만 유 회장은 윤재의 말에 단박에 입단속을 시켰다.
“쉬쉬하시는 걸 보니……,”
유윤재가 퍽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웃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해준이 재이를 얼마나 감싸고 도는지 반증하는 듯 보였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길래?
유 회장이 진저리 치는 걸 직접 눈으로 보니 윤재는 싱겁게 끝난 만남이 아쉽게 느껴졌다.
“이놈 자식. 해준이 모르게 잘 처리해.”
유 회장이 마땅찮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 걸린 일은 제가 형보다 낫죠.”
윤재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재이는 그날 밤 꼭두새벽에 들리는 인기척에 잠에서 깨 부스스 거실로 나왔다. 막 퇴근한 참인 해준은 재이를 보고 멈춰 섰다.
“자고 가는 거예요?”
“아니, 샤워하고 다시 나가 봐야 해.”
이런 일은 익숙했다. 재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아까 윤재가 너 많이 놀란 거 같다고 그러더라.”
“네. 사기꾼인 줄 알았어요.”
해준이 놀랍지 않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나이답지 않게 능청맞아서 그래. 그런 기질도 없진 않고.”
재이가 가만히 있자 해준은 제 방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마친 채 나왔다. 그사이 재이는 따뜻한 차 한잔을 준비해 내어놓았다. 해준은 익숙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하시고 이야기했다.
“셋이서 밥 한번 먹자던데.”
“뭐……. 알겠어요.”
“권 비서 통해서 일정 좀 잡아 놓을 테니 가능한 시간 전해 줘.”
“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해준이 현관 복도로 걸어가자 재이가 뒤를 따라 배웅하며 말했다.
“둘이 안 닮은 거 같아요.”
“닮을 리가 없지.”
차라리 닮지 않길 바라는 듯한 눈치였다. 재이는 무심결에 그를 배웅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식사 일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잡혔다. 재이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생각했으나 유윤재는 최대한 빨리가 좋다며 바로 다음 날 약속을 잡았다.
신고하니 마니 푸닥거리를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봐야 한다니. 조금 난감했지만 피하는 것도 웃기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형은?”
“바쁜가 봐요, 연락도 없고.”
하지만 막상 도착했을 때 남겨진 건 두 사람뿐이었다. 대원 컴퍼니의 로비 카페테리아에 앉은 둘은 꼼짝없이 해준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가 봐?”
“아니요. 일하고 있을 거예요. 기다려야죠.”
재이는 차분히 해준을 기다렸다. 이런 일은 아주 자주 있었다. 대부분 앞서 진행된 회의가 길어질 때나 중요한 통화를 끊지 못할 때 생기니 감안할 수밖에.
그때 재이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회장님이 부르셔서 오늘은 어려울 거 같은데 윤재한테 취소됐다고 말할까?]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말할게요.]
약속 시간 이후로 10분이 넘어갈 때 일정 취소를 예감하고 있던 터라 화가 나진 않았다. 재이는 차분히 답장하고 윤재에게 말을 전했다.
“오늘 회장님이 호출하셔서 어려울 거 같대요. 가 보시면 될 거 같은데.”
처음 겪는 일에 윤재는 조금 황당한 거 같았으나 이내 재이에게 물었다.
“너는?”
“예?”
“넌 안 먹냐고. 굶어? 살 빼?”
“아니요. 저는 회사 가서 먹겠죠.”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재이가 덤덤히 대꾸했다. 유윤재가 다시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같이 먹자고. 나 혼밥 싫어해.”
재이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서둘러 표정을 풀었다. 그는 만만찮은 상대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