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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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중 해준은 비교적 수월하게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그 안에서도 나름의 어려움이란 존재했다. 재이는 외국 드라마에서 보았던 자유로운 대학 생활은 사실 허상에 가까웠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해준은 정말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매진했다. 잠을 줄이고도 더 줄이기 위해 끼니를 걸렀고, 성격에 맞지 않은 짓까지 해 가며 대학 생활을 ‘버텼다’.

“왜 이렇게 많이 취했어요?”

“교수가. 완전히 주당이야. 앉은 자리에서 위스키 두 병을 깠어.”

연말을 앞두고 술에 만취해 들어온 해준을 보고 재이가 깜짝 놀라 쫓아갔다. 폭군 같던 담당 교수가 이혼을 하며 학생들을 여러모로 곤란하게 하던 때였기 때문에 해준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펄쩍 놀란 재이가 이온 음료를 챙겨 줬지만 해준은 만취한 상태로 고전 중이었다. 그나마 술주정은 없었지만 소파에 이마를 짚고 한참 동안 기대어 있었다. 재이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쩔쩔매면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재이야. 이리 와.”

멀찍이서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재이와 눈이 마주치자 해준이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재이가 다가가자 그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여요.”

재이가 툴툴거렸다. 해준은 엉뚱한 소릴 했다.

“다음 주부터 조금 더 늦게 올 거야.”

“왜요?”

“교수가 학과 사무실 소일거리를 소개시켜 줬어.”

“……여기서 일을 더 해요?”

재이가 사색이 되었다. 해준은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숨 가쁘게 각종 일을 병행했다. 순전히 재이 때문이었다.

유 회장의 조건과 해준의 합의점은 간단했다. 한 명분의 생활비와 해준의 학비만 지원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재이를 책임지는 건 해준의 자의였고, 유 회장은 그 생활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해준은 고된 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재이를 책임지고 싶었다. 목표와 의지는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리하는 수밖에. 그나마 해준이 가지고 있던 배당주와 채권이 생활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그는 무조건 일을 해야 했다.

“괜찮아. 뭐 필요한 거 없어?”

재이는 그가 곧 다가올 자신의 생일 때문에 일을 늘렸다는 걸 눈치챘다. 선물도 좋지만 이러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말렸다.

“설마 생일 때문에 더 일한다고 한 거예요? 필요하고 가지고 싶은 그런 거 없어요. 난 괜찮으니까.”

“괜찮아. 재이야. 괜찮아.”

술에 취한 해준의 목소리가 축축 처지듯이 나른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재이를 연신 안심시키며 손짓했다.

“이리 와. 우리 강아지.”

해준은 말씨름을 할 힘도 없어 보였다. 오늘만 해도 한 시간도 채 안 되게 쪽잠을 자고 강행군을 이어 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재이는 지친 그를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아 말을 줄였다. 조용히 그의 옆에 앉자 그가 연신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쓰다듬었다.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익숙한 손길이었다. 그가 이렇게 애틋하고 조심스럽게 만지는 건 재이밖에 없었고, 재이를 이만큼 금지옥엽 여기는 사람도 해준뿐이었다. 재이가 잠시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있잖아요……. 뭐 물어봐도 돼요?”

“어떤 거.”

“전에 봤던 그 언니랑 오늘 카페에서 마주쳤어요.”

“그래?”

해준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재이의 말이라 다정하게 대답했지만 내용의 인물에는 무관심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재이는 작게나마 위안을 받았다.

재이는 해준의 얼굴을 살폈다. 몸이 몹시 힘든지 눈을 감은 채 듣고 있었다. 선물에 대해서 말하려다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 언니가 결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안 해.”

재이가 정말 말하고, 물어보고 싶었던 내용이었다.

함께 살고 모든 걸 나누지만 막상 유 회장이 좋아할 법하고 해준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번에도 한참을 맘고생 했지만 해준의 명쾌한 답변에 마음이 녹는 듯 풀어졌다. 조금 더 욕심내고 싶어졌다. 재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계속 둘이서만 살면 안 돼요?”

“그래.”

사실은 ‘저랑 결혼하면 안 돼요?’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해준은 자신을 여동생처럼 여기기에, 그런 마음으로 사랑하기에 애매한 질문을 해야 했다.

“정말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재이가 다시 한번 물었을 때는, 해준은 잠에 들어 대답하지 못했다.

* * *

해준과 재이는 둘밖에 없는 사이였다. 여태까지는, 아니 과거에는 그랬다. 막연히 상상만 했던 변화가 찾아오자 재이는 어쩔 줄 몰라 당혹스러웠다.

“약속했잖아요. 나랑 약속했었잖아요.”

재이는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채 어깨를 들썩이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는 해준은 누가 심장을 숟가락으로 잘근잘근 짓이기는 듯 느껴졌다.

타인도, 자신도 본인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간이라고 평가했지만 재이 앞에서는 달랐다. 그는 본인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이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초연함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고, 단지 그런 ‘척’할 뿐이었다.

“재이야.”

결국 해준은 그녀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아 줄 참이었다. 재이도 그가 자신을 부르자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인터폰으로 권 비서가 그를 급하게 불렀다.

“무슨 일이야.”

-본부장님. 회장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말을 들은 재이가 놀라 닭똥처럼 흐르던 눈물이 뚝 그쳤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유 회장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왔다. 재이는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해준은 주먹을 쥐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연락하고 오시지 그랬어요.”

“내 회사에서 내가 왜 연락을 미리 해야 하나? 어?”

유 회장은 해준에게 용건을 말하려던 차에 단박에 재이를 발견했다. 재이와 눈이 마주치자 유 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아. 안녕하세요.”

재이가 울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매번 재이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하는 유 회장 앞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누그러드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둘이 미국 생활을 길게 했기에 숨통이 트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유 회장은 재이를 아래위로 훑으며 소파에 앉았다.

“독립한다고?”

“아, 네네. 그러려구요.”

“다 큰 여자랑 남자가 부대끼고 사는 거, 보기 좋지 않다.”

“……죄송합니다.”

“마땅한 집이 없으면 구해 줄 테니까 얼른 준비해.”

재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유 회장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냉랭하게 명령했다. 내 손주 옆에서 썩 떨어지란 말이었다. 재이는 스스로가 기생충이 된 기분을 다시 느꼈다. 보다 못한 해준이 둘 사이에 나섰다.

“그 문제는 저희가 의논하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뭘 의논하고 자시고 할 게 있어.”

유 회장의 힐난에 재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유 회장 앞에서 기가 죽어 지내다 보니 성인이 되어도 막연하게 어렵고 무서웠다.

“재이야. 먼저 들어가. 집에 가서 마저 이야기하자.”

해준이 재이를 돌려보냈다. 숨 막히는 눈초리에 재이도 더 이상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다시 한번 꾸벅 인사하고 사무실을 도망쳐 나와야 했다. 유 회장은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해준은 유 회장의 자랑이었다. 아들까지 버리며 일궈 온 기업을 물려받아 마땅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함은 해준의 정체성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경영 수업을 마쳤으나 해준이 본부장으로 오기 전까진 많은 우려가 있었다. 이론만으론 안 된다, 경험이 부족하다, 너무 어리다……. 하지만 해준은 그런 우려를 가볍게 짓밟고 차근차근 성과를 올렸다.

해준은 오자마자 유통 구조를 뜯어고쳐 전년도 해당 분기 대비 7% 성장률을 기록했다. 실패할 시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던 호언장담이 무색할 정도로 좋은 성적이었다.

“회장님.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비서 실장은 유 회장이 부탁한 기업 내부 성과 보고서를 올리며 말했다. 유 회장은 안경을 쓴 채 페이지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이번 분기도 실적이 나쁘지 않아.”

“본부장님 실력이야 자타가 공인하니까요. 회사에서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보상을 해 줘야겠지.”

해준이 좋은 성적을 거둘수록 유 회장의 입지가 강해진다. 왕권을 견고하게 확립시켜 준 손자를 위해 유 회장은 진급을 계획했다.

때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내년 상반기. 결혼 소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알릴 생각이었다. 손자의 공이지만 자신의 공과 다름없을 만큼 기뻤다. 유 회장이 해준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리러 갈 때였다.

“흐윽…….”

하지만 자신의 회사에 기어 들어온 쥐새끼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을 뻔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게다가 눈을 붉히고 징징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문득 저런 식으로 자신의 손자를 휘어잡아 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할 땐 웃음을 흘리고, 불리할 땐 눈물 바람을 흩뿌렸겠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유 회장이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연락하고 오시지 그랬어요.”

“내 회사에서 내가 왜 연락을 미리 해야 하나? 어?”

희소식을 전하려고 왔지만 막상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험악한 윽박지름이었다. 재이는 남자 둘을 보며 쩔쩔매다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그런 모습마저도 유 회장은 심기가 불편했다. 살갑고 애교 많은 가윤과 하나부터 열까지 비교되었다.

“어쩔 셈이냐? 나가기 싫다고 떼쓰고 있던 거냐?”

“먼저 나간다고 했습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예상외의 답변이었지만 유 회장의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못했다.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해준이 자신도 소파에 앉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가윤 씨와 제 사이에 관여하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계약 결혼이니까. 유 회장은 해준이 사무적인 태도로 혼사에 임하는 건 진작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차마 진심이 되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유 회장도 그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이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제가 보호자니까요.”

자신을 남처럼 대하는 해준의 태도에 유 회장이 잠시 멍하게 있더니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자식 버린 죄로. 말년에 이런 꼴을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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