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후 세 시, 타이핑 소리와 전화 소리로 두서없는 사무실에서 재이가 꾸벅꾸벅 졸았다. 요즘 이사 스트레스와 길어지는 냉전으로 새벽 다섯 시나 되어야 겨우 눈만 붙이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때 재이의 어깨에 손길이 느껴졌다.
“재이 씨. 힘들죠?”
익숙한 목소리였다.
“예?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라며 깬 재이가 허겁지겁 사과했다. 하필 자신을 깨운 사람이 가윤이라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잠깐 나가서 커피 한잔해요.”
가윤은 따로 재이를 질책하지 않고 작게 속삭였다.
둘은 커피를 들고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찬 바람을 쐬자 그제야 잠이 좀 가시는 거 같았다. 재이가 민망함을 애써 숨기자 가윤이 빙긋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주말에 많이 바빴나 봐요. 조는 거 처음 보네.”
“아……. 아니에요. 제가 긴장이 풀려서.”
“어휴. 그런 말 안 해도 돼. 그 팀 김 부장이 인턴 교육하잖아. 좀 깐깐하게 굴지? 과제도 많이 내 주고.”
“아아. 그런 건 괜찮아요.”
“내숭 부릴 필요 없어. 그 위치되면 나 같아도 어려웠어. 난 회장님 뵙고 오니 새삼 재이 씨가 대단하게 느껴지더라니까.”
자신을 격려해 주는 친절한 말을 듣다 문득 ‘회장님’이라는 말에 재이의 신경이 붙잡혔다. 회장님을 봤다고? 언제?
“회장님이요?”
“아아. 못 들었어? 해준 씨랑 셋이서 식사 한번 했어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크게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 놀란 재이가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해준과 오래 살았지만 회장은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해서 제대로 본 적이 한 손에 꼽는다. 그런데 가윤을 회장이 만나 주다니.
가윤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낭창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내년 초쯤 이야기 하시더라구요. 많이 급하신가.”
“…….”
내년 초. 그래 봤자 반년도 남지 않았다. 둘이 결혼하면 자신은 해준과 영영 떨어지게 되겠지. 커피를 든 재이의 손과 두 다리가 벌벌 떨렸다. 심장은 아주 크게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다.
겨우 몇 번 만나는 게 다인 줄 알았다. 선으로 만난 거니 결혼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날짜가 언급될 정도로 본격적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재이의 머릿속에 누가 사이렌을 틀어 놓은 듯 시끄러웠다.
“만약 차질 없이 진행되면 재이 씨 거처도 내가 신경 써 줄게. 독립하고 싶다며.”
“네?”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그때까지 집에서 지내는 거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벌써부터 예비 신부인 척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윤이 역겨워 보였다. 선심 쓰는 듯한 말투에 속이 울렁였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만 있을 수 있게 해 줄게. 재이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속이 끓었다.
그 뒤로도 스몰톡이 이어졌지만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재이는 해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회사에서 만나요. 시간 좀 내 주세요.]
그러나 답은 없었다. 평소처럼 그는 일상용 휴대폰을 볼 시간도 없는 듯했다. 퇴근하자마자 재이는 짐을 챙겨 바로 해준의 회사로 향했다.
원래의 재이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돌발 행동이었다. 그가 재이를 아끼는 만큼 재이도 그를 아꼈다. 워커홀릭인 그를 위해 얼마나 배려했던가.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조심하고 그가 업무에 매진할 수 있게 회사 근처로는 되도록 가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빠 만나러 왔어요.”
“재이 씨. 본부장님이 바쁘셔서 지금은 좀 곤란한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재이를 보고 권 비서도 몹시 놀랐다. 평소에는 해준이 놀러 오라고 그렇게 말해도 한사코 거절하던 재이가 무서울 게 없다는 듯 사무실을 박차고 들어왔다.
“재이 씨.”
“정확하게 10분 기다릴 수 있어요.”
재이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권 비서가 난감해하며 그녀를 말렸다.
“재이 씨. 무슨 일인지 몰라도 지금 업무 중이시잖아.”
“10분이요. 10분 지나면 저 무조건 들어갈 거예요.”
“…….”
“제가 지금 당장 들어가길 바라세요? 빨리 전해 주세요.”
권 비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이의 얼굴을 보고서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재이는 잔뜩 몸을 부풀린 복어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보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대형 사건일 게 뻔했다.
권 비서는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노크하고 들어갔다. 해외 지사 사장과 열띤 영상 통화를 하던 해준에게 모니터 뒤로 필담을 전했다.
[재이 씨 오셨습니다. 10분 안으로 뵙지 않으면 당장 들어오신다고 하는데요. 적잖이 화가 난 거 같습니다. 일단 제가 로비로 함께 이동할까요?]
재이의 행동에 의아한 건 해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메모지에 자신의 대답을 적어 비서에게 건넸다.
[그럴 필요 없어. 알겠다고 해.]
영상 통화가 한창이었지만 해준은 양해를 구하며 마무리했다. 그는 약속된 10분보다 재이를 일찍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재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이 화났을 때처럼 온몸의 피가 다 식어 버린 듯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을 뿐이다.
“결혼해요?”
서론은 필요 없었다. 재이가 궁금한 건 그것뿐이었다. 사무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해준이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재이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결혼하냐구요.”
“아직 정해진 거 없어.”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결혼 생각 있어요?”
“경과를 봐야겠지.”
한마디 한마디가 핑퐁처럼 두 사람을 오고 가는 동안 재이의 마음은 싸늘하게 얼어 갔다. 분노와 배신감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가자 오히려 감정이 꽝꽝 얼었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
여태까지 불확실하게 대답하던 그가 이번에는 확답을 내렸다. 얼음이 된 재이의 심장을 그가 망치로 내리치는 충격이었다.
재이의 얼굴은 참담했고 해준은 초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잠시 후 재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 마세요.”
작은 얼굴에서 결국 눈물이 툭 터졌다.
“약속했잖아요. 나랑 약속했었잖아요.”
재이는 해준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상상해 본 적 없냐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해준이 멋들어진 2차 성징을 마치고 어렴풋 성인 남자의 모습이 날 때부터 이어져 온 고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들의 대시가 쏟아졌다. 대상은 인종과 나이를 막론했다. 유학 중, 해준은 일부러 아주 보수적인 생활을 이어 갔지만 큰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외모는 물론이고 어릴 적부터 꾸준히 운동을 즐겨 현지인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은 키와 체격에 전형적인 핫가이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어딜 가도 은근한 눈짓과 추파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선물은 거절했지만 발신자가 불분명한 일방적인 선물에는 콘돔이 들어 있을 때가 태반이었다. 재이는 그런 광경을 좋든 싫든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미국 유학 중, 하루는 재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해준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처음 보는 여자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재이.”
이내 해준도 그녀를 발견했다. 굵은 컬이 곱슬거리는 까무잡잡한 여자였다. 여전히 애티가 나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재이는 평소 자신의 그런 모습이 콤플렉스였기 때문에 성숙한 스타일의 여자를 보자 조금 당황했다. 해준은 자연스럽게 재이를 소개했다.
“내 동생이야.”
“여동생이 있었어? 오…… 몰랐네. 외동인 줄 알았어.”
여자는 그와의 대화를 갈무리 짓고 내일 보자는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갔다. 별다른 설명 없이 덤덤한 해준을 보며 재이는 수십 번을 고민하다 물었다.
“……아까 그 언니 누구예요?”
“동기야. 왜?”
“아니 그냥. 되게 세련되고 예뻐서요.”
재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해준은 단박에 재이가 그 여자를 신경 쓴다는 걸 눈치채고 알아서 궁금해할 것을 대답해 주었다.
“별거 아니야. 자기 다니는 교회 나오래.”
재이는 속내가 훤히 들킨 것 같아 머쓱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거 물어보려구 말한 건 아닌데.”
“궁금해할 거 같아서.”
괜스레 거짓말을 하며 변명했지만 그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재이는 내친김에 찜찜했던 걸 더 물어보았다.
“아까 외동인 거도 아는 눈치던데요.”
“아마 알겠지. 어릴 때도 몇 번 봤으니까.”
“……어릴 때는 왜요?”
“성진 둘째 딸이야.”
한창 표정 관리를 하던 재이의 얼굴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며 엉성해졌다. 큰일 났다는 생각뿐이었다. 여성스럽고 어른 같은 섹시한 언니가 잘사는 것도 모자라 재벌집 자제라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해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로 보아 호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재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신이 속으로 질투와 과한 우려를 품고 있음을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여자를 다신 볼 일 없길 빌었지만 며칠 뒤 카페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오, 안녕. 해준이 동생이지?”
“아. 아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여자가 먼저 재이를 알아보았다. 사실 들어올 때부터 메뉴판 앞에서 여자를 먼저 발견했던 재이는 처음 본 척 연기해야 했다.
“커피 마시러 온 거야?”
“네. 테이크 아웃해 가려구요.”
“내가 사 줄게. 뭐 마실래?”
“아. 저…….”
공짜 커피지만 크게 내키지 않았다. 여자에게 조금도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살갑게 웃으며 재이에게 물었다.
“괜찮아. 해준이 동생인데 당연히 내가 사 줘야지. 뭐 마실래? 말만 해.”
주문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재이는 얼른 카페를 벗어나고 싶었기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아 저는 그럼 핫초코요.”
여자는 혹시라도 재이가 주문을 물릴까 얼른 자신이 마실 것과 함께 주문했다.
“여기 핫초코 하나에 바닐라 라떼 따뜻한 거 저지방으로 바꾸고 시럽은 한 번만 넣어서 주세요.”
카페 메뉴. 정말 아무거도 아닌 것인데, 재이는 여자의 말을 듣고 있다 문득 자신이 너무 애 같다고 느꼈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자격지심과 콤플렉스가 뒤섞이고 질투와 합해지자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 듯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재이가 어떤 상태인 줄 까맣게 모르던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미안한데. 해준이 크리스마스 선물 좀 사 주려고 하거든.”
“크리스마스 선물이요?”
“으응. 그래서 그런데 혹시 어떤 게 좋을까?”
재이가 잠시 고민했다. 절대로 임팩트를 남길 수 없게 남들 다 주고받는 그런 평범한 걸로 말할까. 하지만 해준이 이성적 호감이 담긴 물건을 사용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 여자가 준 거라면 더 싫었다. 재이가 짧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글쎄요. 목도리……같은 거?”
해준은 목이 졸리는 것 같다며 기피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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