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흐으으…….
거실에서 아주 희미하게 재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소파 의자에 앉아 있던 해준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내장 속속들이 뒤틀리는 기분이 이런 걸까.
재이의 표정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어젯밤부터 먹지도 자지도 않고 집을 지켰다. 맘 같아선 외박에 대해 꼬집고 싶었으나 기껏해야 행방에 대해 묻는 것에 그쳤다.
“지금이라도 조금 거리를 두시는 게 재이 씨에게 이로울 거 같습니다.”
순전히 재이를 위한 행동이었다.
본격적으로 선을 보기 전에는 아니, 가윤을 만나기 전만 해도 이 정도의 압박은 들어오지 않았다. 전엔 얼른 혼사를 찾으라는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러 차례 엎어지고, 재이가 독립할 기미가 없는 와중 적극적인 가윤이 유 회장에겐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임원이 되어 실권을 잡기 전에는 유 회장의 말을 아주 거부할 수는 없다. 전략적인 수긍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잊지 마라. 나는 아들도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오직 그룹의 존망을 위해서 살았어.”
“…….”
“내가 못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해준은 아버지가 그룹에서 내쳐지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다. 섣불리 행동했다간 유 회장은 재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서 재이를 떼어 놓아야 했다.
* * *
재이는 다음 날부터 부지런히 자취집을 알아보았다. 그간 해준에게서 받은 용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기에 회사 근처의 원룸 정도는 가능할 듯싶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지금 제 방만 한 집을 돌아다니며 재이는 자신이 얼마나 해준의 울타리 안에서 곱게 자라 왔는지 실감했다.
금 같은 주말을 부동산과 원룸을 알아보며 썼다. 저녁쯤 되자 재이는 다리가 퉁퉁 부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재이 씨.”
“권 비서님.”
아파트 로비 테이블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해준의 비서였다. 재이가 반갑게 인사하자 권 비서가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본부장님은 업무 중이십니다. 혼자 왔어요.”
“…….”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혼자 왔다는 말에 재이의 안색이 흐려졌다. 권 비서가 혼자 움직이는 일은 무척 드물었으니까. 권 비서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모두 그다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둘은 가까운 카페로 가서 앉았다. 피곤한 기색을 본 권 비서는 지체하지 않고 화두를 꺼냈다.
“나가서 살 집을 알아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오빠가 그러던가요?”
“본부장님은 아닙니다만 세상은 워낙 말들이 많으니까요.”
가끔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회장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느낀 적이 왕왕 있었으니까. 재이는 덤덤하게 물었다.
“회장님께서 보내셨죠?”
“대학원을 가면 어떻겠냐 하시던데요.”
“대학원이요?”
“예. 미국이든 영국이든. 원하는 대로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권 비서는 부인하지 않고 회장의 뜻을 전했다. 재이가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비서님, 저 바보 아니에요. 그거 한국에서 나가란 말 아닌가요.”
“전하신 말씀은 일단 그렇습니다. 뭐, 나가서 직장 생활을 바로 하셔도 좋구요.”
“전 한국이 좋아요.”
재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맞지 않는 미국 생활을 하느라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가라니. 이건 해준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말에 권 비서는 굳이 더 이상 그녀를 회유하지 않고 떠났다.
“내가 그렇게…….”
기생충 같은 존재인 건가?
재이는 혼자 남겨진 채 한참을 혼자서 생각했다.
같은 시간 해준은 카페에서 나온 권 비서와 통화 중이었다.
-요즘 컨디션을 떠나 해외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으신 듯했습니다.
“그래?”
-네. 오히려 미국에서 많이 고달프셨는지 외국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얼굴이 안 좋으시더라고요.
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미국 생활은 나름대로 부족함 없이 풍족했지만 재이는 이따금 향수병을 앓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교육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했다.
해준도 그걸 잘 알기에 재이를 절대로 외국에 다시 보내는 불상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지켜본 바로는 집을 꽤나 열심히 알아보고 계신 듯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해준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자신의 손과 발인 권 비서는 회장이 전하는 내용들을 자신에게 일일이 공유해 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재이의 반응까지도.
비서의 입장에서 무척 위험한 일이었지만 대신 해준은 권 비서를 무척 신뢰했고 확실한 보상으로 보답했다.
-본부장님.
“왜.”
-이제…… 어떻게 할까요?
침묵이 흘렀다.
“……일단 끊어.”
해준은 전화를 끊고도 가만히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재이를 떼어 놓는다. 상상도 해 본 적 없고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결혼을 해야 할까. 가윤과 정략결혼을 한다면 재이는 더 이상 집안에서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재이를 두고 결혼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재이와 어디까지 가고 싶은 걸까. 여러 가정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골치가 아프군.”
그가 혼잣말로 푸념했다.
* * *
유 회장은 며칠 뒤 해준을 불러냈다.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하자는 말에 해준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재이에 대한 이야기를 매듭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 회장의 으름장을 나 몰라라 무시하기에는 그는 재이를 너무나 아꼈다.
“저 왔습니다.”
“앉아라.”
조부와 손자 사이로는 보이지 않는 딱딱한 분위기가 일식 식당 룸 안에서 흘렀다.
“항상 드시던 걸로 시킬까요.”
“아니, 잠시만 기다려라.”
그때 종업원이 미닫이문 너머에서 말했다.
“손님 오셨습니다.”
“누구예요?”
해준이 유 회장에게 물었다. 다른 일행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회장은 보면 안다는 듯 문 쪽으로 턱짓했다. 몰래 온 손님은 다름 아닌 가윤이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해준 씨.”
간드러지는 말투에는 진한 애교가 섞여 있었다. 유 회장이 해준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온화하게 그녀를 반겼다. 해준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눈가에는 살얼음이 끼듯 쌀쌀맞다 못해 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 뵙네. 반가워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정 국장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런 훌륭한 따님이 있는 걸 내가 몰랐지.”
이 자리가 불편한 건 해준뿐인 듯했다. 가윤은 일부러 내내 유 회장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풀풀 풍겼으니까.
“이제 들지.”
하지만 유 회장이라는 든든한 방패 덕에 가윤은 맘 놓고 식사를 즐겼다. 그룹의 주축인 유 회장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
이 사실은 해준이 자신을 흡족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주권을 가지고 그룹을 쥐락펴락하는 노인네였다. 유 회장이 자신과 해준의 결혼을 추진한다면 분명 성공할 것이다.
“둘이는 자주 만나고?”
유 회장도 차가운 태도의 손자보다 가윤에게 집중했다. 가윤이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해준 씨가 워낙 바쁘신 분이라 여태 한… 두어 번 정도 만났어요.”
“워낙 무뚝뚝해서 말이야. 먼저 만나자고도 안 했을 거고.”
“아니에요, 동생분에게도 너무 살뜰하시고. 멋진 분 같아요.”
가윤의 말에 유 회장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동생?”
짧은 순간이었지만 심기가 불편한 되물음이었다. 가윤은 미끼를 물어 준 유 회장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예감이 좋다.
“재이 씨요. 셋이서 얼마 전에 밥도 먹었거든요.”
“그래?”
“네에. 워낙 사이가 막역한 남매 같더라구요.”
부친과 자신이 얼마나 그의 뒷조사에 매진했는지 모른다. 재이가 남의 집 딸이지만 그가 동생으로 여기고 있으며 공주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과 유 회장이 재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가윤은 상냥한 말 사이에 묘한 메시지를 끼운 채 끊임없이 던졌다. 둘 사이에 재이가 존재감을 가진다는 것마저 유 회장은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자기가 재이를 언급할수록 해준은 여자관계에서 재이를 떼어 놓지 못한다는 평가를 얻게 되겠지.
“……자기 사람은 잘 챙기니 걱정 말게나.”
그렇다면 유 회장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낮게 가라앉은 유 회장의 목소리에 비해 가윤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럼요. 이제 곧 독립할 거 같던데 굉장히 헛헛하겠어요.”
“독립?”
“전에 식사하다 이제 독립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해준이 고개 돌려 가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만 떠들란 의미였으나 가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유 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끔찍한 식사가 끝나고 해준은 가윤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때까지도 해준은 건드리면 터질 거 같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윤은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연신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해준은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가윤은 민망을 무릅쓰고도 그와 엮이고 싶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차가 집 앞에 멈추자 가윤이 먼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해준은 앞을 보며 말했다.
“가윤 씨.”
“예?”
“적당히 해요.”
아무리 가윤이래도 그런 말을 듣고 덤덤할 순 없었다. 가윤의 귀가 달아오르고, 얼굴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일그러졌다. 해준이 핸들을 가볍게 치며 중얼거렸다. 재이를 더 이상 끌어들이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 말을 하는 해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살기가 끓어넘치는 그는 완전히 핀트를 잃었지만 간신히 억눌러진 짐승 같아 보였다. 흔한 욕지거리, 고함 한번 치지 않았지만 설명하기 힘든 안광이 번뜩였다.
“뭐라구요?”
가윤은 섬뜩함을 느꼈다. 조금 굴욕적이기도 했다. 어디 가서 모자라단 소리를 들어 본 적 없이 스스로도 떳떳하게 살아왔다. 그런 자신이 고작 어린 아가씨 하나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묘한 승리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라 섣불리 변명할 수 없었다.
“건드릴 게 따로 있지.”
“……갈게요.”
무섭고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가윤은 허겁지겁 차에서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