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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비서가 연락드릴 겁니다.]
그 시각 가윤은 기대하지도 못한 답장에 환호성이 튀어나오던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좋다 싫다 알겠다 모르겠다 이런 의지가 담긴 대답 따위는 아니었지만 이건 분명한 기회였다. 싱거운 소개팅이 끝나고 그간 제대로 얼굴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님을 봐야 뽕을 따지. 가윤은 상기된 얼굴로 연신 호들갑을 떨며 거울을 확인했다. 화장 괜찮고 안색 좋고 헤어 굿이고.
가윤은 어디 가도 떨어지지 않는 부유한 집의 자제였다. 나름대로 뼈대 있는 집안에서 자랑할 만한 인물은 언론사의 국장인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외삼촌은 삼선 국회 의원에 어머니는 교육자 집안의 배울 만큼 배운 영민한 여성이었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건만 왜 유해준은 자신에게 이렇게 꼿꼿한지 못내 답답할 뿐이다.
“셋이서 이렇게 보니 또 느낌이 색다르네.”
결국 해준과 재이, 그리고 가윤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동생이라면 죽고 못 산다길래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 만났더니 막상 모이자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당황했다.
사이 좋은 거 아니었나?
“재이가 부서에서부터 일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라고요.”
“아하하…….”
“인턴 끝나고 의향 있다면 우리 방송사에 들어와요. 정말 괜찮은 곳이에요.”
“예?”
입바른 칭찬에 어색하게 웃던 재이가 가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빈말 아닌데? 재이 씨가 원한다면 언제든.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오빠 입장에서도 맘 놓일 거고.”
가윤이 상냥하게 말하다 고개를 돌려 해준을 바라보았다. 재이는 얼굴에서 난감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 반갑지 않은 제안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문 참이었다.
“아니요. 제가 데려올 겁니다.”
해준이 덤덤히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원형 테이블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고개 숙인 재이는 눈만 빼꼼 올려 해준을 쳐다봤고 해준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식사에 집중했다.
가윤은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다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왔다.
“아…… 보기보다 그런 스타일인가 봐요?”
가윤이 재이를 빤히 바라보며 코앞에서 물었다. 은근한 물음. ‘너도 다른 애들이랑 똑같니?’ 결코 칭찬은 아닌 듯한 뉘앙스에 재이가 발끈하여 되물었다.
“예?”
“막 그렇게 개척하는 편은 아닌가 봐. 하긴, 품 안에 있을 때가 편하긴 하죠.”
“……”
재이의 얼굴에 꼭꼭 감춰 둔 맹랑함이 심지에 불이 붙듯 빛났다. 자신을 도발하려는 의도인 줄 알면서도 왜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 재이는 입을 뗀 김에 뭐라 쏴붙이려다 해준을 의식해 말을 줄였다.
“그냥. 아직 이거저거 고민 중이에요.”
“흐음. 그래요. 고민이 많을 시기지. 독립하고 싶진 않아요?”
“예?”
가윤은 재이의 말에 수긍하는 듯하다가도 쉴 새 없이 질문을 휘몰아쳤다. 가윤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한 구슬 같았다. 어떤 대답이 나와도 재이의 말을 자신의 의도로 다룰 수 있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재이의 생각은 정확했다. 가윤은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는 해준을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아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거슬리는 아가씨를 그 집에서 다른 곳으로 유배 보내야 함을 깨달았다. 집에 아이가 있다고 해서 많아 봤자 미취학 아동일 줄 알았는데 장성한 스물여섯 살짜리를 말한 거란 걸 깨닫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냥. 오빠가 보통 깐깐해 보이는 게 아니라서 물어봤어요. 난 졸업하자마자 뛰쳐나왔거든.”
“독립은…….”
“아. 미안, 미안. 그런 스타일이 아니지.”
애석하게도 재이는 가윤보다 농익지 못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뻔히 덫임을 알고도 자존심을 꺾지 못할 만큼 풋풋했다.
“집 알아보고 있어요.”
재이가 돌발 발언을 터트렸다. 가윤은 능숙하게 함박웃음을 애매한 미소로 대치했다.
“흐음. 그래?”
“예. 바빠서 많이 보진 못했는데. 저도 곧 해야죠.”
재이가 보란 듯이 해준을 향해 중얼거렸다. 자리를 수락했으나 시종일관 느릿하게 식사만 이어 가던 해준이 재이를 바라봤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재이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그의 심기에도, 재이의 마음에도 실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 * *
해준이 달라졌다. 그것도 어떤 기미도 없이 갑자기. 외박을 해도 찾지 않고, 자신과 거리를 둔다.
불편한 식사가 끝나고 재이는 회사로 복귀했지만 서운함이 풀리지 않았다. 집을 구하겠다는 말은 진담, 오기, 복수, 떠보는 마음이 뒤섞인 나쁜 의도였다. 하지만 해준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은 듯 속상했다.
가윤과 해준 둘 중 누가 그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몰라도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자리에 앉고도 체기가 나아지지 않아 소화제를 앉은 자리에서 두 병이나 들이켰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만 결론 없는 잡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결국 일어나 탕비실로 커피를 가지러 갔다.
“안녕? 너 되게 열심히 하더라.”
“어…… 안녕.”
뺀질하게 생긴 인턴 동기가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재이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으나 그녀는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부자연스레 대꾸했다.
“내 이름은 알아? 김동환인데.”
“아. 알지.”
“나도 너 알아.”
속도 모르는 동기가 재이에게 치근덕거렸다. 재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그가 화제를 틀었다.
“오늘 끝나고 동기끼리 술 마시려고 하는데, 갈래?”
“아니 나…… 아, 아냐. 좋아. 어디서 마시는데?”
“그냥 이 앞에서 마시려고 하는데.”
“완전 좋지.”
무심결에 평소처럼 거절하려던 참에 삐딱한 마음이 불쑥 솟아났다. 해준처럼 뭐든 자신도 돌발 행동으로 대갚음하고 싶었다.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란 듯이 행동할 것이다.
평소엔 은근하게 냉랭한 재이가 흔쾌히 대꾸하니 동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들뜬 얼굴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며 탕비실을 나섰다.
“재이야!”
그러나 재이가 그 결정을 후회한 건 약속 시간이 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기 앉아, 여기 앉아.”
“어, 아니, 나 여기….”
“여기가 명당이야! 내가 미리 맡아 놨지.”
동기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아직 어색한 동기들이 자신과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안주 뭐 먹을래? 내가 덜어 줄까?”
“아니, 괜찮아. 나도 가까워.”
탕비실에서 말을 걸었던 동기는 그녀에게 부담스러운 호의를 베풀며 집중 마크했다. 다른 동기들은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둘을 꼴불견처럼 여겼다.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닌데.
재이는 제 옆에 앉은 동기를 밀쳐 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그냥 집에 가서 쉴 걸 그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좋아하지도 않는 어수선한 술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이란.
결국 멍하게 딴생각을 하며 잔을 만지작거리자 동환이 재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자취해?”
“아니. 아. 오빠랑 같이해.”
자취는 아니지만 자취에 가까운 그런 주거 형태. 재이는 사람과 친해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남들에겐 평범한 스몰톡이 될 수 있는 주제도 자신에겐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사연이었으니까.
“아, 부모님 없이 오빠랑 둘이서?”
“……응.”
“난 제대하고 잠깐 누나랑 같이 산 적 있는데 완전 곤욕이던데.”
“우린 괜찮아. 잘 맞아서.”
재이는 영혼 없이 대답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해준과의 관계를 두둔하는 기분에 입이 까끌거렸다. 반항하겠답시고 이 시간에 나와 안 하던 짓까지 하고 있으면서 뭐가 잘 맞는다는 거냐.
“너 몇 시까지 들어가야 해 그럼?”
“나? 그런 거 상관없어.”
“정말? 너희 집 되게 프리한가 보다. 난 옛날에 늦게 들어가면 누나가 자다 깬다고 엄청 신경질 내더라고.”
“집에 잘 없어. 바쁘거든.”
“와, 완전 괜찮은데? 부럽다.”
재이가 잠시 뜸 들이다 대답했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술잔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난 있는 게 더 좋은 거 같아.”
그렇게 밉다고 생각해 놓고도 이런 말이 나오는 자신이 기막혔다.
“왜, 밤에 무서워서?”
“애들 2차 간대. 괜찮아?”
멀리 떨어져 있던 동기가 동환과 재이에게 물었다. 동환은 대답하지 않고 재이를 빤히 바라봤다. 그때 재이의 휴대폰에 진동이 왔다. 휴대폰 팝업창으로 해준이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전에 부탁한 서류 비서가 메일로 보냈을 거야.]
이 시간까지 밖에 나와 있는데 어디냐고 한마디를 묻지 않는 문자조차 신경전으로 느껴졌다. 재이는 문자를 보자마자 길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 좋아. 나도 갈게.”
“그럼 나도.”
동환이 뒤따라 대답했다. 재이는 옆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도 느끼지 못했다.
* * *
재이는 결국 외박을 했다. 불금을 핑계로 길어진 술자리는 새벽 네 시에나 끝났다. 그녀는 회사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들어가 하룻밤 신세를 졌다.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 정오였다. 오늘이 주말인 것도 잊고서 깜짝 놀라 일어났다가 친구가 깔깔 웃는 소리에 도로 누웠다. 결국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네 시였다.
“다녀왔습니다.”
“외박이 잦다.”
혼잣말로 습관적으로 인사를 하며 들어오던 재이가 흠칫 놀랐다. 당연히 없을 줄 알았던 해준은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린 걸까. 재이가 망설이다 대답했다.
“……동기끼리 술 마셨어요.”
“잠은.”
“친구 집에서요. 회사 바로 앞이에요.”
“…….”
“샤워도 하고. 점심에는 같이 쌀국수로 해장도 하고 그랬어요.”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왜 늦은 건지 일일이 설명하게 된다.
“알겠다.”
“…….”
재이는 그 대답이 싫었다.
자신이 어떻게 하든 더 이상 그의 안중에는 없는 것 같았다. 불쑥 솟은 오기가 재이를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저 독립하려구요.”
독립하고 싶은 맘은 없었다. 순전히 그의 심기를 그르치고 싶었다.
“안 돼.”
해준이 단호하고 무겁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재이는 마음이 크게 상한 상태였다.
“왜요?”
“안 된다면 안 돼.”
“안 되는 이유 없잖아요.”
“굳이 해야 하는 이유도 없어.”
“그렇담 말릴 이유도 없어요.”
둘의 대화가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거 같지 않은 해준에 비해 재이의 얼굴은 이미 붉어진 상태였다. 문득 그녀는 감정 컨트롤에 실패해 씩씩거리는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듯 거실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거세게 닫혔지만 밖에선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쁜 새끼…….”
재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상해 눈물이 닦아도 질금질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