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유해준, 그는 까다롭고 만족을 모르는 유 회장의 보물이자 유일한 후계자였다. 평소엔 무뚝뚝해도 필요할 때면 유연하게 굴만큼 똑똑한 놈이었다. 다만 조그마한 계집애 일이라면 조부도 몰라보고 달려든다. 마치 앞뒤를 모르는 사냥견처럼. 그게 매번 유 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들지 마라.”
명백한 경고였다. 입가를 파들거리며 말하는 유 회장의 눈에는 분노가 일렁였다.
“회장님.”
“그 애가 네 혼삿길을 막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따로 갈게요. 기사님, 먼저 내리겠습니다.”
수행 기사는 해준의 요청에 갓길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십시오.”
차가 멈추자 그가 내리기 전에 유 회장이 통보했다.
“잊지 마라. 나는 아들도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오직 그룹의 존망을 위해서 살았어.”
“…….”
“내가 못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남자 둘 사이에서 살벌하고 잔인한 기운이 감돌았다. 해준은 물끄러미 유 회장을 바라보다 차를 내렸다.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삼킨 채로.
* * *
별안간 해준이 재이에게 거리를 두고 관계가 상한 날, 그는 집으로 올라오기 전에 자신의 차에 앉아 이 사안에 대해 비서와 의논해야 했다.
권 비서는 그의 심복이자 손발과 다름없었다. 우직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유 회장이 탐내는 인재이기도 했다.
“노친네가 이상한 소릴 하더군. 뭐 별다른 거 없나?”
-회장님께서 재이 씨 인턴 활동 관련하여 좀 알아보셨다고 합니다.
“그건 왜.”
잠시 침묵이 흐르다 권 비서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냥 뭐…… 다 컸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실까요?
“아직 애야.”
-…….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침묵이 돌아오자 해준이 힘주어 다시 말했다.
“애라고.”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권 비서는 성심껏 대꾸했다. 절대 동의 못 하지만 데리고 사는 본인이 그렇다면야. 아무리 유해준이라도 빈말은 못 하는 게 권 비서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쉬운 것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다소 얄밉고 괘씸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노친네는 항상 해준의 예상보다 빨랐다. 권 비서의 귀에 이 정도가 들어왔다면 이미 가윤에 대해서도 조사가 끝났을 것이다. 그 회사에 수저가 각각 몇 개씩 있는지 알고도 남을 인간이다.
“하. 다른 건.”
-그리고 해외 취업 관련하여 알아보셨다고 합니다.
“무슨 해외? 한국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좋아 보이면 노친네나 가라고 해.”
외국 이야기가 나오자 해준이 즉각적으로 대꾸했다.
-아니요. 본부장님 말고 재이 씨 말입니다.
“누구?”
-…….
그는 분명히 제대로 이해했다. 토씨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들었다. 비서는 그 목소리에 서린 살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만으로도 눈빛이 돌변한 해준의 얼굴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식은땀이 나는 장면이다.
“걔를 왜 보내는데.”
-뭐, 두루두루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드디어 노망이 났군.”
당장이라도 유 회장의 저택으로 뛰어갈 거 같은 해준을 권 비서가 능청으로 매끄럽게 다루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남자 둘은 유 회장을 잘 알았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재이를 보내 버리고 남을 거란 것도. 비서는 고심하던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본부장님께서 강경하다면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시면 어떨까요.
“무슨 의사?”
-……결혼에 대한 의사 말입니다.
“…….”
유 회장은 해준이 결혼이란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 모두 재이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
-아시다시피 회장님이 보시기에는 아마 재이 씨 때문에 망설인다고 생각하시는 듯하여.
“권 비서가 보기엔 어때.”
-네?
“권 비서가 봐도, 내가 재이 때문에 못, 아니. 안 하는 거 같냐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적잖이 언짢으실 거 같습니다.
해준은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했음을 인정했다.
-지금이라도 조금 거리를 두시는 게 재이 씨에게 이로울 거 같습니다.
비서의 말에 해준이 이마를 짚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흐른 오늘이 되어서도 명확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건 똑같았다.
* * *
해준은 느지막이 집에 도착했다. 재이는 거실 소파에서 그를 기다리다 깜빡 졸았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퍼뜩 눈을 깼다.
“괜찮으니까 마저 자.”
“옷 주세요.”
재이는 후다닥 일어나 그에게 팔을 뻗었다. 외투를 받아 스타일러에 정돈하여 넣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지만 재이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해준을 보고 재이는 그의 방문 앞에 서서 물었다.
“바로 잘래요?”
“가윤 씨가 만나서 인사했다던데.”
해준은 대답 대신 서두를 꺼냈다. 재이가 조금 당황하여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해준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네. 국장실에서 인사했어요.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더라구요.”
“그래? 아버지가 거기 국장이야.”
해준은 덤덤하게 말하며 넥타이를 풀었다. 그는 아마 자신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재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고민하다 입을 뗐다.
“그분이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요.”
“뭘?”
“오빠요.”
“글쎄다.”
재이 입장에서는 아주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와 가윤의 관계, 그의 마음 상태를 떠보는 말이었지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싱거운 대답에 오히려 마음이 갑갑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불러내서 그런 말을 하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
“…….”
재이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전혀 세련되지 않은 화법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해준이 말했다.
“인턴, 하기 싫으면 쉬다가 우리 공채로 들어와.”
“…….”
“언제든지 네 자린 마련되어 있으니까.”
재이에게는 그 말도 그다지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준이 적당히 애매한 대답을 하며 화제를 바꾸려는 걸로 보였으니까. 그의 손길이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 갔다. 재이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해야죠.”
“경력이 문제지. 장소는 중요하지 않잖아.”
“……무슨 사이예요?”
“가윤 씨랑?”
“예.”
참다못한 재이가 그에게 물었다. 대답을 듣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거 같았다. 해준이 단박에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담백하게 사실을 알렸다.
“그 여자 잘 몰라.”
“……회장님은 맘에 드신대요?”
“많은 후보 중에 하나겠지.”
그렇겠지. 하나뿐인 귀한 아들마저 저버린 노친네가 정략결혼을 시키는 게 무슨 대수일까.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많은 후보 중에 자신은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해준의 의지일 거라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해준은 주체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했다.
“결혼하자고 하면요?”
“그 여자가?”
“…….”
방에 침묵이 흘렀다. 안 한다고 해요. 결혼은 내가 원하는 상대와 할 거라고 대답하라고요. 재이의 입이 바싹 말랐다. 그러나 해준의 입에선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고려해 볼 수도 있겠지.”
그 말에 재이의 심장에 벽돌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팠다. 어떤 말도 하지 못했고 일그러지는 얼굴도 감출 수 없었다.
어릴 적 아쿠아리움에서 자신에게 유학을 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희망 고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헛된 기대는 오히려 상대를 괴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 성격을 알고도 재이는 못내 그 대답이 미웠다.
숨이 턱 막히며 배신감에 손이 벌벌 떨렸다. 덤덤한 해준의 말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재이가 황급하게 그의 방 앞을 떠났다. 해준은 그제야 정면만을 응시하며 단추를 다 푼 셔츠를 신경질적으로 벗었다.
* * *
잔잔하게 흘러가던 일상은 살얼음이 낀 듯 차가워졌다. 해준이 재이에게 거리를 두고, 재이는 큰 상심을 했다. 큰 소리 한번 나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히 다툼이었다.
아슬아슬한 대화를 하고 난 후 집에는 싸늘한 공기만 흘렀다. 둘이 살기에는 방이 남을 정도로 큰 집에서 대화가 사라지고 인기척이 없어졌다. 며칠 사이에 사람 손길이 닿는 따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준은 며칠 내내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날 재이가 외박을 했기 때문이다.
“본부장님?”
수행 비서가 이동 중인 차량 안에서 중요한 일정을 되짚었을 때도 그는 재이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그 생각을 떨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다 재차 자신을 부르는 의아한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미안해. 뭐라고?”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점심시간에 병원 예약 잡아 놓을까요?”
“아니. 괜찮아.”
해준이 수습했지만 비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 무척 낯설고 걱정스러운 듯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해준이 정말 괜찮다고 다시 한번 말하려 할 때였다.
[동생분과 밥 한 끼 어때요?]
가윤이 보낸 메시지였다. 해준이 성가신 연락에 눈살 찌푸리며 바로 읽음 처리를 하려던 참이었다.
순간 번뜩 스쳐 가는 생각에 그의 손가락이 액정에서 멈췄다. 해준이 잠시 생각하다 느릿하게 입을 뗐다.
“병원은 됐고. 식사 약속 하나 잡지.”
“네. 알겠습니다. 어디로 잡을까요?”
“대충. 재이 인턴 하는 곳 가까이로.”
“메뉴는요?”
“재이 요새 뭐 좋아하지?”
유해준의 선택 기준은 오로지 재이였다. 비서는 가끔 자신이 재이를 모시는 건지 해준을 모시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였다.
“요즘 아시안 음식 부쩍 찾으십니다.”
이미 그것에 익숙한 비서가 빠르게 답변하며 스케줄을 잡았다. 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집었다.
[저희 비서가 연락드릴 겁니다.]
해준이 무신경한 표정으로 짧게 답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