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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국장실을 나온 재이는 생전 처음 겪는 당혹감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을 국장실로 부르다니. 정가윤이라는 여자는 국장의 가족일 게 분명했다.

“그럼. 오빠한테 들었지. 나 모르니?”

가윤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다.

“기가 차서…….”

딸? 조카? 어떤 관계일까.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두들겨 맞으면 이런 마음일까.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많이 도와줄 테니까.”

가윤이 한 행동에는 많은 의미가 깔려 있었다. 선심처럼 포장했지만 명백한 과시였다. 나는 너를 언제든 오라 가라 부를 수 있는 위치이고, 국장실까지 드나드는 사람이다. 너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불이익도 줄 수 있겠지.

곱씹어 생각할수록 가윤의 행동은 호의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압적으로 느껴졌다.

해준이 도움을 요청했을 리는 없다. 그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재이는 이미 혼자 힘으로 시작하겠다고 신신당부해 왔다. 그런 걸로 보아 둘은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분명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왜 오지랖이야.”

일방적인 오지랖일 뿐이라고 생각해 보려 해도 맘 같아선 해준에게 쏴붙이고 싶었다.

“하아.”

도대체 여자랑 어떤 사이길래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정말 아무 감정도 없다면 왜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않은 거냐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귀에 댔던 재이가 탁한 숨을 뱉으며 간신히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자신은 제 주장을 할 만한 명분이나 입지가 없다. 다른 대책을 찾아야 했다.

한편 재이가 국장실을 떠나고, 진짜 보도 국장이 자신의 사무실로 복귀했을 때도 가윤은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오자마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재이를 험담했다.

“제 눈 똑바로 뜨고 그런 이야길 하는데 한눈에 봐도 보통이 아니라니까요?”

“허어.”

“눈빛이……! 아니, 난 처음에 애라길래 그냥 어디서 어릴 때 사고 쳐서 데리고 있는 애를 말하는 줄 알았어요.”

국장은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한참 동안의 한풀이가 끝나자 겨우 가볍게 장단을 맞춰 주었을 뿐이다.

“나도 소문을 들었다. 친동생이나 다름없다더군.”

“지나치게 건방지던데요. 버릇이 없어.”

가윤은 분한 표정을 지으며 손부채질을 멈추지 못했다. 어른 대 어른으로 맞설 수 없으니 그게 더 약 올랐다.

“친하게 지내자.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알겠다지만 엿을 까 잡수란 표정이 선명했다. 얼굴에는 맹랑함이 차고 넘쳤다. 가윤은 전혀 아쉬운 처지도 아니었지만 문득 모욕감을 느꼈다.

가윤은 그때 확신했다. 이 아가씨는 보통이 아니라는 걸. 철없이 자라 세상 물정 모르겠거니, 함께 오래 살아왔다길래 유해준처럼 선비 같겠거니 했던 생각은 모두 자신의 착각이었다.

특출 나진 않아도 담백하고, 예쁘장했지만 어린 삵처럼 날카로움이 남아 있는 눈빛이었다. 말은 공손해도 눈빛에는 자신을 싫어하는 걸 숨기지 않을 정도로 간이 크다니.

“너도 그 나이 땐 그랬다.”

적당히 하라는 듯한 뉘앙스에 가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요.”

“뭐 어쩌겠냐. 애인이 아닌 게 다행이지.”

가윤이 툴툴거리자 국장이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가윤은 뾰로통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가설을 내밀었다.

“본인을 그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같던데요? 그게 본처가 아니면 뭐예요.”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들었다.”

“아빠.”

가윤이 조금 답답하다는 듯 국장을 불렀다. 그 눈빛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불편한 우려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너도 자꾸 그런 데 몰두하지 마라.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해. 그런 핏덩이한테 연연하지 말고. 목표는 그게 아닌데 왜 자꾸 불필요한 데 에너지를 쏟는 거야.”

“이번에는 저도 간절하단 말이에요.”

“고집은.”

신경 쓰인다는 말은 감추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부친이 답답했다. 가윤은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음.”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지만 국장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로또와 다름없는 혼담이 오고 가고 있는데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떤 사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의 보증 수표였다.

유해준이란 인물은 정재계에서도 특출 난 청년이었다. 술과 도박에 빠져 살지도 않고 집안에 손을 벌리지도 않는 착실한 자식. 회장 밑으로 들어갔으니 쉽게 산다고 보일 수 있지만 미국에서 경영 공부를 우수하게 마쳐 스카우트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 혼담을 쉽게 그르칠 수 없다.

“내가 손써 보마.”

국장이 결심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 * *

그날 밤, 유 회장과 국장이 마주 앉았다. 분기마다 예약을 받고 일반인들은 그마저도 쉽지 않은 고즈넉한 한정식집이었다.

해가 막 진 서늘한 날씨에 단아한 정원에서 풀벌레 소리와 인공 연못의 물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운치 좋은 곳이었다.

“이거 참. 오랜만에 봅니다. 좀 더 일찍이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데, 누가 먼저 찾는 게 대수겠습니까.”

두 남자 사이에서 술잔과 덕담이 오갔다. 유 회장은 시종일관 사람 좋아 보이는 느긋한 미소를 머금었다.

“참. 이렇게 좋은 분과 단둘이 함께하니 영광입니다. 오늘 밤이 정말로 운치 있네요.”

정 국장이 유 회장을 치켜세웠다. 유 회장의 인맥은 학연과 지연으로 촘촘히 얽힌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한두 다리를 거쳐 알게 된 정 국장도 귀한 인맥 중의 하나였다.

물론 해준과 비교하면 댈 것도 아니라는 평가는 여전했지만 결혼만 성사되면 그 정도는 감안할 수 있었다. 게다가 외가 쪽 집안에 정계 인사가 있으니 나쁘지 않으리라. 이상적인 윈-윈 관계였다.

식사가 얼추 마무리되고 새로운 술상이 막 들어왔을 때 미닫이문이 열렸다. 허우대가 훤칠한 해준이 머리를 받을까 고개를 숙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오, 해준 씨. 오랜만이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해준은 무심결에 들어오다 낯선 목소리에 시선을 올렸다. 가윤의 부친 정 국장이 유 회장과 함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회사에서 홈런 한번 쳤다며. 날이 갈수록 멋있어지네.”

“아닙니다. 워낙 직원들이 유능한 덕분이죠.”

“겸손하기까지. 회장님. 손자 한번 잘 두셨소.”

분위기를 매끄럽게 만들어 줄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노친네. 와서 술 좀 받으란 말에 마지못해 왔건만 이런 불청객이라니. 해준은 몹시 불편했지만 그러한 기색을 숨겼다.

결국 해준은 불편한 어른 둘과 한 상에 둘러앉아야 했다. 표면적인 대화가 이어지다 정 국장이 용건을 꺼냈다.

“아 참. 해준 군. 내가 외부 일정 때문에 오늘 동생을 못 보고 보내서 말이야. 미안할세.”

“동생?”

유 회장이 술잔을 내려놓다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해준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재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안재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윤이가 격려 차원에서 한번 봤다는데. 아주 야무지게 보였다더군. 우리가 잘 돌볼 테니 안심하게.”

“…….”

정확히 이 대목에서부터 해준의 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속내가 어떻든 잔잔한 호수처럼 대꾸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라. 실수하더라도 예쁘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럼. 누구 동생인데. 우리 방송사는 언제든지 인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가 넘어갔지만 해준의 정신은 방금 전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해준을 잘 아는 유 회장은 그가 이미 속으로 칼을 갈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 가윤이가 격려 차원에서 한번 봤다는데. 아주 야무지게 보였다더군. 우리가 잘 돌볼 테니 안심하게.”

해준은 노친네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정 국장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의 검은 동공에 차가움이 감돌았다.

그건 재이를 잘 봐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해준에게는 경고를 유 회장에게는 당부를 한 것이었다. 둘 사이에 조막만 한 녀석이 끼여 우리 딸을 거슬리게 하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해준의 얼굴에 살기가 감도는 걸 보고 유 회장이 곁눈질하며 의식했다. 평소에는 어떤 일에도 초연함을 유지하며 신중하게 행동하는 손자가 망할 어린것의 일에는 광견병 걸린 개처럼 굴었다.

“……오늘은 내가 영 컨디션이 별로군.”

잠시 고민하던 유 회장이 먼저 입을 뗐다. 바쁜 시간을 내서 만든 자리를 망칠 수는 없었다. 회장은 피로하다는 핑계를 대며 잠시 뒤 술자리를 갈무리 지었다.

* * *

차창 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빠르게 스쳐 갔다. 해준은 휴대폰으로 재이에게 온 메시지를 읽었다.

[언제 와요? 같이 치킨 먹고 싶은데.]

[늦을 거 같으면 혼자 먹고 잘게요!]

메시지 내용을 읽으며 해준은 냉장고 주위와 부엌을 서성이며 먹을 걸 고르는 재이를 떠올렸다. 그가 조금 생각하다 답장했다.

[금방 갈 거야. 30분쯤 남았어. 배고프면 먼저 먹고 있어.]

아마 한 시간은 고민하고 남긴 메시지일 것이다. 그는 재이를 잘 알았다. 옆에서 해준이 재이와 연락하는 걸 본 유 회장이 공격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어쩔 셈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걔가 벌써 스물여섯 살이다.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런 건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해준이 덤덤히 받아치자 유 회장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는 사람이 봐도 이상해. 넌 도대체 아직도 애라면 넋을 빼놓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거냐. 무슨 약점이라도.”

“그런 거 아닙니다. 아직 애예요.”

“네가 아직도 갓난쟁이를 데리고 산다고 생각하는 거냐? 정신 병원이라도 가고 싶어서 내게 이러는 거야?”

유 회장의 입장에선 답답할 지경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불쌍한 마음에 손자 나름대로 호의를 베푼 것이라 믿었다. 한국에 들어오면 그대로 끝일 거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유학이 길어지고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쉽게 둘을 떨어트려 놓을 순 없었다. 해준은 재이의 일이라면 타협 없이 강경했고, 물러섬을 몰랐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몰라요.”

“유해준.”

“아이에게 들어가는 것만큼은 전혀 손 벌린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제 소관이니까 걱정 마세요.”

“…….”

“제가 그 애 보호자입니다.”

둘의 신경전이 터질듯한 긴장감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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